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25
#1324.
대기하다 (4)
“어…….”
이현수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호텔 스위트룸. 중앙에 위치한,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소파에 앉은 강진호가 느긋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런 강진호를 바라보던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대충은.”
“역시나 중국어를 아셔서 그런지…….”
“좀 이해가 안 가는 면도 있어. 신조어 같은 건 전혀 모르니까. 아마 지금 중국인들이 나와 중국어로 대화를 한다면 사극에 나오는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릴 거야.”
“…….”
사극이라…….
하기야 그렇겠다. 강진호는 적어도 오백 년 전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니까.
언어는 언제나 변한다. 사실 사극 톤이라는 것도 현대에 와 정형화된 것일 뿐이지, 진짜 몇 백 년 전에 그런 말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진호가 채널을 여기저기로 옮겼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흥미가 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쓰이는 중국어를 귀로 듣는 게 꽤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장민 장로와 대화 많이 하셨잖습니까?”
“그쪽도 살아 있는 화석이기는 마찬가지라…….”
“그래도 나름 트렌디하신 것 같던데.”
“그렇긴 하지.”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좀 억울하다니까.’
이곳에 온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 딱히 연락이 온 건 없고, 최연하는 바쁘게 쏘다니고 있다 보니 이현수와 강진호만 하릴없이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관광이라도 나가보려니 맡은 일의 엄중함 때문에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저어되고, 그렇다고 호텔에서만 죽치자니, 이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니었다.
스마트폰마저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그 와중에 강진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TV를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재미있으십니까?”
“볼만해.”
“……이게요?”
“왜?”
“아니, 뭐…….”
강진호가 이현수를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 실장.”
“예?”
“사람답게 살자.”
“…….”
따라오지 말라고, 따라오지 말라고 그만큼 이야기했더니, 기어코 따라와서는 지루하다고 푸념이나 해 대고 있다. 저런 인간을 데리고 같이 일을 해야 하다니…….
“아니, 저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죠.”
이현수가 살짝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으로 타깃이 오기 전까지는 재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각오야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고 멍하게 기다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이현수가 초조해하는 이유는 기다림이 지루하다기보다는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 접촉이 오지 않는다는 점이 컸다.
“저는 당연히 연락이 올 줄 알았죠. 이렇게 방치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원래 그런 거 아냐?”
“예?”
“너도 일시켜 놓은 사람이 대기한다고 딱히 신경 안 쓰잖아. 일주일 지나서 연락하기도 하고. 안 그래?”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사람이란 입장이 바뀌어봐야 남의 심정을 아는 법이지.”
“회주님은 많이 겪어보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겪어봤지.”
“……예?”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이미 모든 것을 설명했음에도 주변인들조차 강진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강진호는 물론 마교의 교주였다.
천하를 지배하던 마교. 그 마교를 완벽할 정도로 지배한 마인이 바로 강진호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강진호처럼 막대한 권력과 힘을 휘두른 교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그 사실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강진호라고 해서 마교에 들 때부터 교주일 수는 없는 법.
그가 적천마존이 아니라 적마(赤魔)라 불리던 시절, 그는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 했다. 그중에는 정파의 세력권으로 잠입하여 수행해야 하는 임무도 많았다.
지금이야 언제든 전화 한 통으로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시절이지만, 당시에야 어디 그런가. 제대로 된 서찰 한 통을 받기 위해서 몇 달이고 기다리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초조해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가. 그러다가 과도하게 긴장하면 일을 망치는 법이니까.”
이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진호를 바라봤다.
‘이상하다니까 진짜.’
사실 강진호는 자신의 신분이나 재력, 혹은 가진 힘에 비해서 여유가 굉장히 없는 편이다.
보통 강진호쯤 되는 지위를 가진 사람은 기본적으로 여유가 넘쳐야 한다. 이룩한 것이 많고, 지탱하는 것이 많으니까. 통장의 잔고만 좀 가득 차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사람 아닌가.
하지만 강진호는 가진 것에 비해 항상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전투와 관련된 일에만 얽히면 무척이나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어느 한쪽만 해주시면 좋을 텐데 말이지.’
이해는 하지만, 웃음이 절로 나오는 변화인 것만은 틀림없다. 만약 이곳이 적지 한중간이 아니라 한국의 호텔이라면 강진호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테니까.
막 한마디 하려는 순간, 주머니에 든 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이현수가 마치 서부의 건맨이 총을 뽑아 드는 것처럼 휴대폰을 뽑아 들었다.
모르는 번호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반갑다. 이현수가 전화를 받고 입을 열었다.
“전화받았습니다.”
[이현수 씨.]이종욱의 목소리다. 이현수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 늦네요.”
[아니!]건너편에서 울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지정한 호텔을 벗어나서 다른 데로 가셨습니까?]“보고드렸잖아요. 그게 뭔 문제라도 됩니까?”
[아니! 그럼 스위트룸이라도 잡지 마셨어야지! 그 호텔 스위트룸을 방문하려면 보안 카드가 있어야 하는 거 모르셨어요?]아, 그랬지.
그러고 보니 체크인할 때 카드를 받은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찍어야 문이 열렸지.
문을 열 때도 사용해서 딱히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그러네요.”
[우리 요원이 찾아갔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멍때리다가 돌아왔다잖습니까!]“그럼 전화를 하지그러셨어요.”
[요원들은 함부로 이쪽으로 연락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언제든 도청의 위험이 있다구요. 전화 한 통 하려고 회선을 몇 개나 돌려야 하는지 알고 하는 말씀이십니까?]당연히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뭐, 빤한 소리를.
“어, 네. 그러네요. 착오가 있었네요.”
[왜! 시작부터 계획이랑 다르게 움직여서 이런 사고를! 요원들이 한 번 움직일 때 얼마나 고생을 하는…….]“거, 알았으니까, 그냥 용건만 간단하게 이야기합시다. 서로 바쁜데 잔소리할 시간이 있어요?”
[끄으으으.]건너편에서 뭔가 집어 던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현수는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뭐 어쩌겠는가. 사소한 실수야 언제나 하는 법이지.
[후욱, 후욱…… 예, 맞습니다. 일 이야기만 하지요. 지금 호텔 로비에 우리 요원이 가 있을 겁니다. 내려가서 접선하십시오. 방으로는 들이지 마시고.]“방이 더 은밀하지 않습니까?”
[호텔 스위트룸만큼 주목도가 높은 곳도 없습니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그 비싼 호텔 스위트룸에 투숙을 하는 겁니까! 여기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이현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절대 암살자라고는 생각 안 하겠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은 맞는 말 아니겠는가.
이현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이건 정말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저희도 저들을 속이기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스위트룸에 묵는 겁니다. 자꾸만 엉덩이를 감싸는 푹신한 소파도 불편하기 짝이 없고, 고급 디퓨저에서 자꾸만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도 신경 거슬려요. 방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데 얼마나 먼지, 잘못하면 지리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십니까?”
[……많이 힘드시겠네요.]“그럼요. 게다가 그쪽 부담 덜하라고 우리가 돈도 냈잖아요.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차라리 이쪽 카드를 쓰지.]“예?”
[아닙니다.]차라리 세금을 썼으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할 텐데, 속이 썩어 들어가는 이종욱이었다.
[여하튼 내려가서 접선하시면 됩니다. 제가 직접 연락드리기가 쉽지 않으니, 연락 방법은 그쪽에서 말씀드릴 겁니다.]“네. 뭐,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시죠. 그렇게 긴장하다 보면 사람이 실수도 하고, 뭐, 그런 법이니까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네네.”
전화를 끊기 전에 다시 한 번 건너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현수는 신경 쓰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새끼. 뭐, 지가 상사인 것처럼 굴고 있어.”
괴롭히고 싶다.
좀 더 격렬하게 괴롭히고 싶다.
나라의 중대사가 얽히지 않았으면 정말 제대로 판 깔고 뒤집어엎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름 힘든 일 하시는 분이니 여기까지만 해야지.
“뭐래?”
“밑에 자기 요원 와 있다고, 내려가서 접촉하랍니다.”
“음.”
그 간단한 내용을 뭐 이리 길게 통화하는가.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예.”
이현수가 낯빛을 바꿨다.
여유를 가지는 건 이종욱과 통화를 하는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 이제는 진짜 ‘일’이 시작되니까.
방을 나온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왜 연락이 늦었대?”
“스위트룸은 올라오려면 카드 찍어야 한답니다.”
이현수가 손에 들린 카드를 살짝 흔들었다.
“…….”
‘그러니 호수를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지.’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라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실수지만, 아직 이 정도의 실수는 괜찮다. 그리고 원래 대부분의 일은 실수를 동반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니까.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강진호와 이현수가 로비로 나와 고개를 돌렸다. 로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과 소파에 몇 사람이 앉아 있다. 그중 누가 그들을 찾아온 사람일까?
두 사람이 말없이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슈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한 사람이 눈에 띈다.
‘저 사람인가?’
그때였다.
짐을 들고 그들의 앞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휘청거렸다.
이현수가 본능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평범한 인상.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농민공의 모습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요. 뭐, 별말씀을.”
“좀 급하다 보니까 말입니다. 배가 많이 고파서요.”
“……예?”
농민공이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빙그레 웃었다.
“도와주신 김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우육면 좋아하십니까? 이 뒤쪽에 제가 잘 아는 우육면 집이 있는데, 국물이 끝내줍니다.”
“아뇨. 저희는 좀 바빠서…….”
“괜찮으실 겁니다, 이영희 씨. 바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순간, 이현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그러네요. 이제 안 바빠졌습니다. 먹어보죠, 그 우육면이라는 것.”
사내가 싱긋 웃으며 짐을 들고 앞서자, 강진호와 이현수도 말없이 사내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