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12
#1611.
침략하다 (1)
“계열사 설립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흐음.”
정홍근이 다리를 꼰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서늘한 눈빛을 본 박상우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피바람.
그 말이 아니고서야 최근 태광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잘려 나간 사장만 다섯이 넘는다.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 사장단을 교체하는 것이야 그동안 빈번히 있어온 일이지만, 이리 짧은 시간 동안 이리 대규모로 숙청이 벌어진 적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덕분에 태광은 지금 떨어지는 볼펜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해진 상태였다.
그 조용한 회사의 가장 꼭대기 층에서 정홍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반발은?”
“당연히 없습니다.”
“줏대 없는 놈들.”
정홍근이 쯧쯧, 혀를 차댔다.
“사내새끼들이 한 번 생각을 정했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관철을 해야지, 그거 좀 얻어맞았다고 납작 엎드리는 꼴이라니. 애초에 큰일 하기는 틀린 것들이야.”
박상우는 굳이 ‘그럼 정말 목을 쳐버리시잖습니까’라는 생각을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놀랐겠지.’
생각해 보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정홍근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결정은 사장단과 부사장에게 일임해 왔다.
스스로가 무능력해졌다는 것을 인정한 게 아니라, 귀찮고 골치 아픈 일에 매달리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기조가 몇 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면에 나서서 회사를 뒤엎고 있으니,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박상우야 바로 옆에서 모시고 있으니 정홍근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지만, 정홍근을 대면하지 못하는 그들이 무슨 수로 이런 사실을 알겠는가.
살짝 동정마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계열사는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고?”
“예. 지분 문제만 처리하면 됩니다. 한데 회장님…….”
“왜?”
“계열사를 설립해 같이 사업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 대가로 태광의 지분을 양도한다는 건 좀…….”
“쯧쯧쯧쯧.”
정홍근이 혀를 차기 시작하자 박상우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저로서는 회장님의 고견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듣나. 임자, 내가 저번에 뭐라고 했지?”
“무슨 말씀이신지…….”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냐.”
정홍근이 눈을 찌푸렸다.
“우리 쪽이 유리할 수 있게 이득을 얻어오는 거래? 좋지, 아주 좋지. 그런데 그래서 우리한테 남는 게 뭔가?”
“……이득입니다.”
“더 명확하게.”
“돈입니다.”
“그래. 돈은 충분히 있어.”
정홍근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지금 내가 돈 몇 푼 벌자고 이러고 있는 것 같나? 태광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당장 회사가 망해도 내 아래로 5대는 황제처럼 살 수 있어.”
박상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정홍근을 바라보았다.
회사가 이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뭘 추구한단 말인가.
“우리가 처음부터 잘나갔나? 돈도 안 되는 과자나 팔아댄다고 무시받던 시절은 다 잊었어?”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요즘 보면 말이야…….”
정홍근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태광이 하던 짓이 예전에 우릴 무시하던 놈들과 별다를 게 없단 말이지. 세상은 자꾸 바뀌고 시간은 흘러가는데, 하는 짓이라고는 수성밖에 없어. 자네도 잘 알겠지만, 지키는 이는 절대 뚫는 이를 막지 못해.”
박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만은 공감한다.
세상은 항상 같은 역사를 반복해 왔다.
앞에 선 자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수성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얼마나 수성하느냐가 달라질 뿐, 결국은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절대 함락될 것 같지 않은 난공불락의 성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전에는 누가 더 성벽을 높이 쌓느냐의 싸움이었지. 그런데 그 싸움이 박살 난 이유가 뭐야?”
“저는 잘…….”
“대포가 등장해서 성벽을 부쉈지. 그래서 더 두껍게 성벽을 쌓았더니, 이제는 비행기가 날아와 머리 위에서 폭격을 해버린단 말이야.”
“…….”
“수성은 그래서 어려운 거야. 아무리 효율적으로 체제를 정비해도 개념이 바뀌면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지.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가진 것을 지키자고 사업을 했냐, 이 말이야.”
박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홍근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정홍근이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태광의 지분?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이미 번 것에는 관심이 없어. 앞으로 벌 게 이렇게 많은데.”
정홍근이 낄낄대며 웃었다.
싸늘하면서도 열정적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진행해. 회사가 보유한 주식쯤 적당히 넘긴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저 양반들이 태광 경영권에 관심이나 가질 것 같나?”
“……회장님.”
정홍근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네는 그렇게 오래 살고도 아직 사람을 모르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휴지 조각만도 못할 수도 있는 게야.”
정홍근이 혀를 찼다.
하기야…….
강진호를 겪어보지 못한 박상우로서는 저리 생각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여하튼 차질 없이 진행해.”
“예, 회장님.”
박상우가 살짝 정홍근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런데…….”
“뭐?”
“계열사 사장으로는 누굴 앉힐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아드님이…….”
“자네가 앉아.”
“……예?”
“자네가 하라고.”
박상우가 눈을 끔뻑였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회장님, 저는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적임자야. 내 아들 놈들은 그만한 그릇이 아니야.”
“학력도 좋고, 경영 성과도 좋으시잖습니까.”
“그래. 회장 자리를 물려받기에는 적당한 놈들이지. 하지만 개척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야. 그런 자리에는 자네 같은 이가 적임이지.”
박상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장님, 저는 이제 늙었습니다. 그런 자리를 맡을 능력도, 체력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 대부분의 일은 저쪽에서 알아서 할 거야. 아마 공동 사장 체제가 될 테니, 자네는 저쪽과 우리 쪽을 조율하는 업무를 맡아주면 돼.”
박상우가 입을 닫았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보게, 박 전무.”
“예, 회장님.”
“회사의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일이야. 나는 거기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를 앉히고 싶네.”
박상우가 살짝 몸을 떨었다.
“회장님, 저는…….”
“도와주게나.”
박상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그래.”
박상우가 감동한 듯 몸을 떠는 모습을 보며 정홍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러니 큰일은 못하는 거지.’
박상우는 좋은 사람이다.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사람에게 호감을 준다. 저런 사람이니 MK와도 큰 트러블을 만들지 않고 잘해줄 것이다.
다만, 그게 전부다.
박상우에게는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적당한 인물이니 적당한 곳에 끼워넣을 뿐이다.
의리? 신뢰?
웃기는 소리.
정홍근에게 남아 있는 것은 탐욕과 명예뿐이었다.
* * *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습니다.”
이현수가 서류를 뒤적이며 피식 웃었다.
“이 할아버지, 의욕이 넘쳐 나네요. 아주 제대로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니까.”
“그 이상도 좀 보입니다.”
“음?”
이현수가 낄낄대며 웃었다.
“드라마 좀 보셨습니까?”
“……갑자기 웬 드라마?”
“주인공이 재벌집 하인으로 나오는 드라마의 끝은 보통 주인공이 그 재벌집의 모든 것을 빼앗고, 그들을 짓밟는 것으로 끝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악한 재벌을 응징한다는 권선징악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들어가 있죠.”
“뭔데?”
“내가 모시던 놈을 내가 짓밟는 것.”
“…….”
이현수가 눈을 빛냈다.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은밀한 욕망입니다. 직장인치고 상사 싸대기 후려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이들도 언젠가는 이 관계를 역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반드시 하기 마련이죠.”
“……정홍근에게는 그게 일본이라는 건가?”
“그렇죠.”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홍근에게 있어서 일본은 본받을 만큼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가까운 곳에 있는 강자였을 뿐이죠.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면 자신에게 가장 살이 많이 붙은 뼈다귀를 던져 줄 수 있는 강자.”
강진호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지금까지 꼬리 치던 그 강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회가 온 거죠. 평생 동안 친일파로서 일본을 모시고 살아온 정홍근에게 이렇게 흥분되는 일은 흔치 않을 겁니다.”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정말 사람이 싫어질 정도로군.”
“사람은 다 그런 겁니다. 인간의 도덕성을 쓸데없이 높이 잡지 말아주십시오.”
“아니, 그건 도덕성이라기보다는…….”
강진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여하튼 정말 장난 아니네요. 제대로 해볼 생각인 모양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드십니까?”
그거,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널 데리고 올 때도 네가 이렇게 과하게 일할 줄은 몰랐지.
“여하튼 이 정도면 저쪽 준비는 거의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는 MK에서 어떻게 준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잘하고 있나?”
“……지옥을 보고 있죠.”
“…….”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이번 일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한국은 윗선에서 쪼아대기 때문에 급하게 일처리를 한다는 게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알아서 TF 구성해서 24시간 돌리던데요?”
“…….”
“뭐, 핏줄이 핏줄이니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었다.
나름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MK의 사무직으로 간 이들이 가엽게 느껴진다. 어쩌면 여기서 수련하고 사는 이들이 훨씬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최대한 완벽하게 처리해 보겠습니다. 대신 회주님이 일본에 두어 번 다녀오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야쿠자 새끼들 통합해서 지원하게 하는 게 영 잘 풀리지가 않아서.”
“그 정도야 뭐…….”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출국 수속도 따로 필요 없는 강진호에게는 잠깐 시간을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른 문제는 없나?”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이현수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건 우리가 아니라 정권이 풀어야 할 일이겠죠. 그리고 뭐, 굳이 풀리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대신 사업을 해줄 일본인들은 넘쳐 나니까요. 괴뢰정부 하나 세워보죠.”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예?”
“……너는 이런 일 할 때는 표정부터 달라지네.”
“오해십니다. 저 따뜻한 남자라고요.”
“…….”
너무 따뜻해서 타 죽겠네.
타 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