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42
#1741.
침공하다 (1)
그 목소리에는 묘한 무거움이 있었다.
“에이, 왜 이사님이 도움이 안 돼요.”
“글쎄.”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움이야 되겠지. 물론 진호 씨는 나에게서 정서적인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심미적인 충족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테니까.”
“…….”
아…….
재수 없다.
농담이라는 걸 아는데도 재수 없다.
“하지만 그건 뭐랄까…… 그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응원을 하는 치어리더 같은 심정이랄까? 내가 하는 응원이 이 승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딘가 만족되지 않는, 그 미묘한 부분이 있잖아.”
“……알 것 같네요.”
싸우는 이를 응원하는 것과 함께 싸우는 게 같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이 무슨 쌍팔년대도 아니고, 딱 전쟁터 가는 남편 배웅하는 심정이라니까.”
“……그것참 공감 가네요.”
전쟁터도 보통 전쟁터가 아니다.
최연하 역시 대충 상황은 알고 있다. 강진호는 얼버무렸지만, 그녀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강진호만은 아니니까. 당장 이현주만 해도 그녀의 등쌀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이유로 말을 안 해주는 것도 좋은 게 아니지.’
오히려 더 걱정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에휴, 내가 21세기에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지. 현주 씨는 안 불안해?”
“……불안하죠.”
불안하기는 오히려 최연하보다 이현주가 더하다.
이현주는 무인의 싸움이라는 게 얼마나 격하고 위험한지 잘 아니까. 그저 귀로만 듣는 사람에 비해 위기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그 무공인지 뭔지 좀 가르쳐 달라니까 죽어도 안 가르쳐 주는 것 있지? 인간이 치사하게…….”
이현주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닐 것 같은데요.’
이현주도 무학을 익힌 최연하는 보고 싶지 않다. 지금도 한 번씩 감당이 안 되는데, 무학까지 익혀놓으면 그걸 누가 감당하겠는가.
강진호가 하루 종일 밀착 마크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분명 어디서 사고가 터져도 단단히 터질 것이다.
“저도 불안해요. 그래서 같이 싸우러 가고 싶어요. 그런데…….”
이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니까요.”
과거였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주는 안다.
그녀는 더 이상 무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곳은 오로지 자신의 삶을 지킨 이들만이 내디딜 수 있는 전장이다. 어설프게 반쪽 다리를 걸치고 다른 삶을 살아버린 이들은 이물질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
그 이물질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함께하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방해만 될 뿐이다.
이건 가진 실력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언제라도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이들은 공포를 전염시킬 뿐이다.
‘할아버지.’
이중걸은 그녀가 당당한 무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총회를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후계자로 삼은 것은 이성휘였다.
과거의 이현주는 그 사실이 불만이었다. 엄격한 훈련은 시키면서 어째서 자신에게 총회를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니었던 거지.’
이성휘는 끝끝내 강진호에게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비록 더없이 어리석고 의미 없는 짓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다 버리면서까지 항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현주는 스스로의 운명을 위해 타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강진호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 까지는 항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무의 길을 포기하고 MK를 맡게 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결국 이중걸은 그녀가 끝도 없는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아니면 그녀가 차마 그런 길을 걷는 걸 볼 수 없든가.
‘어느 쪽이든…….’
세상 사람들이 다 이중걸을 욕해도 그녀만은 그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뭐, 알아서 하겠지. 바보 남자들.”
최연하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불안한 걸지도 모르겠어. 우선 내가 없는 데서, 내가 볼 수 없는 데서 모든 게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불안한 거지.”
“그렇죠.”
“그래도 뭘 어쩌겠어, 그런 양반들인데. 사람에게는 변화할 수 있는 부분과 변화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 나는 서로에게 맞춰주는 게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진호 씨가 나더러 배우 일 그만하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고 하면 엿이나 까 잡수라고 할 거야.”
최연하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과격하시네.”
“그런 거지.”
최연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예전에는 내가 그 양반을 이해를 못했거든. 막말로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돈도 많이 벌어놨겠다, 적당히 발만 빼면 앞으로 편히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잖아.”
“그게…….”
“그거 다 핑계야. 방법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
이현주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어쩌면 최연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강진호가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무인계에서 발을 빼는 걸 최우선적 과제로 움직였다면, 상황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몸 다쳐 오지,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얻어 오는 것도 아니지. 도무지 이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어떤 생각이요?”
“나더러 연기를 그만두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
이현주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기를 하지 않는 최연하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이상하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녀는 연기인으로 살 때 가장 빛이 난다.
“그만두라고 말할 명분은 충분하지. 연기라는 게 은근히 사람을 혹사시키거든. 거기다가 이제는 전국도 아니고, 대륙을 넘나들고 있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자기가 버는 돈에 비하면 쥐꼬리란 말이야.”
“쥐꼬리까지는…….”
“아냐?”
“……맞죠.”
이건 최연하가 돈을 못 버는 게 아니라 강진호가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거다. 지금쯤이면 강진호도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지 않을까?
……아니. 원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럼 왜 연기를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돈도 충분하고 몸은 힘든데.”
“글쎄요.”
“그냥 자기만족이거든.”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한다.
“변명거리를 엄청 찾아봤는데, 결국은 자기만족이더라 이거야. 그런데…… 이건 다른 데도 똑같이 통용되는 거야. 어차피 자기 생활을 유지할 만한 벌이 이상의 무언가는 다 자기만족이 될 수밖에 없어. 그 일에서 보람을 찾는 거지.”
“좀 극단적이긴 한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 그런데 ‘나는 내 자기만족을 할 테니, 너는 그냥 그런 거 포기하고 편히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겠어?”
“…….”
이현주가 입을 닫아버렸다.
“내로남불이잖아. 물론 뭐, 그 양반의 자기만족이라는 게 좀 많이 과격하고, 좀 많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연하가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한국에서 영화나 드라마 찍으면서 만족하면 안 돼?’라는 말에 대답할 수 없다면, 적당히 덜 위험한 일을 찾으라고 할 수도 없는 거지. 이게 참 사람 짜증 나는 일이야.”
이현주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봤다.
이 사람의 시선은 그가 아는 평범한 이들의 시선과는 참 다른 것 같다.
강진호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단순한 자기만족으로 치부하는 건 굉장히 폭력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현주는 그 짧은 단어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의 핵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사람의 핵심이겠지.’
최연하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한 편으로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지. 만족할 만큼 잘 놀고 돌아오라고 할 수밖에. 결국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나의 만족을 충족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만족을 배려한다는 의미잖아. 그쪽에서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면 내가 양보할 수밖에. 적어도 그건 내가 아주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아니니까.”
“뭔가 어렵네요.”
“사실은 다들 그렇게 살잖아.”
최연하가 웃으며 이현주를 바라봤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에는 내 만족이지. 함께 있으면 좋고, 함께 있고 싶다. 심지어 예전 영화에서나 나오던 ‘내가 부족하니까 더 좋은 사람에게 보내준다’는 개념도 실제로는 그 사람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자기만족이잖아?”
“……그걸 그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달라?”
“글쎄요…….”
최연하가 별 의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나는 말하는 거지. 가서 충분히 놀다 와. 막아서 너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게. 대신에 돌아올 때는 딴 데 새지 말고 여기로 바로 돌아와.”
“……엄마가 애들 놀이터 보내는 것 같네.”
“나도 말하다 보니 그러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지금 최연하는 강진호를 막지 않을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스스로 납득이라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조금은 서글픈 이현주였다.
“대신 대가는 언제나 있는 거야.”
“네?”
“주말에 마누라를 버리고 낚시 가는 남편은 주중에는 돌쇠처럼 지낼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잖아?”
“그렇죠.”
“만족의 영역은 건드리면 안 된다. 그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한 만족감을 느꼈다면 다른 부분은 자기가 양보해야지. 이번에 진호 씨가 다시 돌아오면 정강이부터 걷어차 버릴 거야.”
이현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딱히 생각 없이 욕망으로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으로는 이현주가 따라갈 수 없는 어떤 깊이가 있었다.
‘그래서 회주님과 잘 맞은 건지도 모르지.’
두 사람 다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면이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바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지. 그러니까 그 양반이 중국에서 깽판을 치는 동안 여기서 눈물 빼며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어.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이현주가 가만히 최연하를 보다가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왜?”
“아뇨, 아무것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럼 돌아오지 않으면?’
강진호가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최연하는 어쩔 셈인 걸까?
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건 금지되어 있으니까.
조금은 지쳐 보이는 눈의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갑자기?”
“밥 먹고 힘내야지. 왜요? 밥 먹었어요?”
“아뇨. 아직 식사 전이기는 한데…….”
“가자, 전우끼리.”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주의 손을 최연하가 잡아끌었다.
“그런데요, 이사님.”
“응?”
“반말을 하시려면 반말을 하시고, 존대를 하시려면 존대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왜요?”
최연하가 씨익 웃었다.
“이러면 친하면서도 예의 발라 보이잖아. 둘 다 놓치기 싫은데.”
“…….”
확실히 이 사람은 좀 이상하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