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741
#1740.
끌어내다 (5)
“자료가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최태현은 즉시 허리를 구십 도로 접었다.
책상에 앉은 미녀가 그런 최태현을 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는 완벽하니까 봐줄게. 다음부터는 속도를 좀 올려봐.”
“예? 아, 알겠습니다!”
최태현이 살짝 놀란 눈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현주.
MK의 실장이자 실질적인 MK의 실권자.
물론 그녀의 위로는 사장인 황민수가 있고, 다시 그 위로는 회장인 강진호가 있지만, 직원들에게 가장 큰 압박을 주는 이는 다름 아닌 이현주였다.
마녀.
취향에 따라 여러 수식어가 앞에 붙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MK의 직원들이 그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지금까지 MK의 어떤 직원도 이 호칭이 과하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건만, 지금 이현주의 반응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너무도 온화했다.
“문제 있어?”
“아, 아뇨. 아닙니다!”
이현주가 슬쩍 최태현을 보며 다시 말했다.
“말해봐.”
“예?”
“자료 정리하면서 나름 분석했을 거 아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봐.”
최태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제 생각에는…….”
“끊지 말고.”
“예! 제 생각에 매출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계?”
“예. 애초에 유통업이라는 건 피가 터지는 전쟁터가 아니겠습니까?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봐도 그렇고.”
“그렇지.”
“하지만 지금 MK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파이를 인수하고 있을 뿐, 다른 유통 회사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될 거라고 봅니다.”
물론 그 지분을 완전히 인수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매출이 보장되겠지만, 기업이란 얼마를 벌든 만족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흐음.”
이현주가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꼰 다리의 발끝이 살짝 까딱이는 게 지금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굉장히 빤한 분석이네.”
최태현이 움찔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시켜놓고는.’
“그리고 현실적이지도 않네. 최태현 과장.”
“예, 실장님!”
“본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그쪽도 당연히 알고 있지?”
“그, 그렇습니다.”
총회가 지금 대규모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MK가 이제는 총회와 웬만큼 분리가 되었다지만, MK의 근본은 당연히 총회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뭔가를 하자는 건가? 본사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 물론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태현이 살짝 이를 악물었다.
살짝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현주의 눈빛이 그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을 못할 수는 없잖은가.
“MK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법인입니다. 본사라고 해봤자 법률적으로는 전혀 얽혀 있지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 총회에 일이 있다고 해서 MK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다면, 그걸 어디 기업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흐응?”
이현주가 눈을 찌푸렸다. 최태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최태현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예.”
“좋아. 그럼 삼 일 줄 테니까, 기획안 하나 올려봐.”
“……예?”
“기획안 올려보라고.”
이현주가 고개를 살짝 모로 꺾었다.
“설마 ‘나는 아무 생각이 없지만, 이렇게 불만을 이야기해 놓고 나면 누군가는 나서서 해주겠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사실은 그랬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할 수 있지?”
“저, 그…… 실장님, 제가 다른 일도 하고 있는 게 있어서…….”
“다 제끼고 기획안 써 와.”
“…….”
“누가 말하면 내가 시켰다고 하고. 아니면 내가 불러서 말해줘?”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현주가 빙그레 웃었다.
“기대할게.”
“…….”
최태현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실장실을 빠져나갔다.
‘마녀가 아니기는!’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 그를 지켜보던 이현주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재미있네.’
이전에는 시킨 일만 하던 이들이 이제는 슬슬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배우던 입장에서 이끄는 입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MK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였다.
‘나도 맞춰야지.’
지금까지는 조금 과할 정도로 저들을 몰아붙였다. 볼멘소리가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만큼 조금 부드러워질 필요도 있다.
물론…….
이현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봤다.
‘심경의 변화가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성휘의 죽음은 아마 그녀의 가슴에 화인처럼 남았을 것이다.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목적만 보고 모든 걸 거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졌다. 그 목적이 옳든 그르든 결국 중요한 건 삶이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약해졌을지도 모르고.’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지금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표정을 단속한 그녀가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벌컥.
과감하게 열리는 문을 보니, 누군지 알 것도 같다.
“바빠요?”
“아니요. 안 바빠요.”
“그럼 잠깐 티타임?”
“들어오세요.”
이현주가 웃음끼 섞인 목소리로 최연하를 반겼다.
또각또각.
최연하가 걸어 들어오는 구두 소리가 방 안에 깔끔하게 울려 퍼졌다.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역시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사님.”
“응?”
“안 힘드세요?”
“뭐가?”
“매번 그렇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걸 보니까 제가 다 힘들어요. 좀 편하게 입고 나오시지.”
“쉿!”
최연하가 손가락을 입 앞에 대고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이건 일이거든.”
“네?”
“나도 집에서는 트레이닝복밖에 안 입어. 그런데 여긴 밖이잖아. 회사에서도 사람을 마주치고, 출퇴근길에 편의점을 가도 사람이 있거든. 그럼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를 보여줘야지.”
“…….”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이게 내 일인데.”
이현주가 새삼 감탄스럽다는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대단한 사람이야.’
최연하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그저 미모를 타고났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운 좋게 연기력까지 타고난 채 태어났다고.
하지만 최연하의 삶을 지켜본 이들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진 못할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지를 안다면 말이다.
“언제 오셨어요?”
“오늘 아침에.”
“시차 적응 안 되시겠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 낮이고 밤이고 생각 안 하고 일하면 되니까.”
이현주가 낮게 웃었다.
한때는 저 직설적이고 가리는 것 없는 화법에 당황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녀도 무인으로서 거친 삶을 살아왔기에 거친 말에는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저 입에서 쌍소리가 나오는 건 말이 다르지.’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는 이미지가 있잖은가.
“그래도 이사님 때문에 살았어요.”
“나요? 왜?”
“요즘 매출 좋던데요. 엔터부 아니었으면 지금 골머리 좀 썩었을 거예요.”
“또, 또 우는소리 한다. 내가 카페랑 일본 쪽이랑 엄청 잘나가는 거 아는데. 우리야 거기에 비하면 뭐 매출이라고 말이나 하겠어? 새 발의 피 정도지.”
“중요한 건 순이익이죠, 매출이 아니라. 카페는 너무 퍼 줘서 남는 게 없고, 일본 쪽은 아직 투자액도 회수 못했어요. 한참 더 걸릴 거예요. 정말 엔터부 때문에 산다니까요.”
“그럼 내가 어깨에 힘 좀 넣어야겠는데?”
최연하가 어깨를 과하게 들어 올렸다.
너스레를 떨고는 있지만, 정말 최연하가 만들어주는 매출은 MK에 단비가 되고 있었다.
“저는 예전에는 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진출하려는지 이해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사님을 보고 있으니까 알 것 같아요. 이거 완전히…….”
“쩌는 장사라고?”
“거저먹던데?”
“……야, 거저먹다니!”
“부대비용이 안 들잖아요. 완전 고효율이야.”
“흐음, 그건 그렇지.”
최연하가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같은 여자인 이현주도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으시던데.”
“그래봤자 뭔 의미가 있나. 회장님이 돈이 백배는 더 많을 텐데.”
“에이, 회장님 이름 나오면 반칙이죠.”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는 강진호가 이리 많은 돈을 벌다니.
최연하가 소파에 앉자 이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방 안에 커피 향이 가득 들어찰 때 즈음, 커피 두 잔을 뽑은 이현주가 최연하의 건너편에 가 앉았다.
“감사!”
최연하가 이현주에게서 커피를 받아 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캬! 속이 풀리는 것 같아.”
“……국밥 드셨어요?”
이 언니는 저런 얼굴로 왜 자꾸 아저씨처럼 굴지?
회주님한테 옮았나?
“커피는 역시 한국산이지.”
“……그거 페루산이에요.”
그리고 그 원두, 미국에도 가요. 정신 좀 차려요, 이 사람아.
“뭐, 어쨌든.”
최연하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그쪽은 좀 어때?”
“정신 없죠.”
이현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루하루 전쟁인 모양이에요. 물론 뭐, 진짜 전쟁은 시작도 안 했지만.”
최연하가 가라앉은 눈으로 이현주를 응시했다.
“현주도 고생이 많네.”
“고생이랄 건 없는데…….”
이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로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여긴 제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이니까. 제가 아직 거기에 남아 있었다면 흔한 사람이 되었겠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여기로 왔을 거예요. 그런데…….”
“한 번씩은 그쪽에 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거죠. 딱 그거죠.”
이현주가 최연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제가 하고 있는 일도 중요하다는 건 알죠. 그런데…… 저쪽에서 생고생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좀 그래요.”
“남자 친구가 고생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건 고생 좀 해야 돼요.”
“……냉정하네.”
이현주가 가만히 최연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사님.”
“응?”
“이사님은 후회 안 하세요?”
“뭘?”
“회주님 만난 거요.”
“…….”
이현주가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내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하지만 전 어쩔 수 없던 거였잖아요. 그런데 이사님은 다르잖아요.”
“흐응.”
최연하가 턱을 괴고는 재미있다는 듯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호 씨 만난 걸 후회하지 않냐고?”
“후회까지는 아닌데, 여하튼…….”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지. 그런데 뭐 어쩌겠어. 그게 내 팔자인데.”
최연하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박복한 년은 서방복도 없는 법이지.”
“…….”
“후회가 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최연하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