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835
#1834.
훈련하다 (4)
먼저 뒤로 한 발 물러선 건 백연홍이었다.
그가 양손을 가볍게 들어 딱히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강진호의 가라앉은 눈이 그런 백연홍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지나지 않겠지만, 백연홍은 그 두 눈에서 불타오르는 진득한 살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 저릿저릿해 오는 살기를 말이다.
‘흑왕과는 또 다르군.’
정제되어 전신을 조여 오는 흑왕의 마기와는 그 결이 확연히 다르다. 강진호의 마기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염과도 같았다.
손이 절로 움찔거렸다.
‘무기를 가져오지 않길 잘했어.’
지금 그의 손에 애병이 들려 있었다면 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병이 없다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경지는 이미 넘어선 지 오래지만, 감정의 영역은 또 다른 법이니까.
“딱히 지금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어.”
강진호의 눈이 살짝 꿈틀댄다.
“남의 영역에 흙발로 들어와 놓고는 의도가 없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니까.”
백연홍이 싱긋 웃었다.
“영역에 들어온 것 정도로 칼부림을 할 필요는 없잖은가.”
강진호가 들고 온 커피를 최연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럼 꺼져.”
“성미가 급하시군.”
백연홍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말이야.”
강진호가 슬쩍 백연홍을 보며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
“꺼지라고 했을 텐데?”
백연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물러나지. 내가 실례를 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곧 내가 찾아…….”
“으아아아아아아!”
백연홍과 강진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온 누군가가 날듯이 백연홍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제발! 제발 좀! 제발 사고 좀 치지 마시라고 했잖습니까! 여기 보는 눈이 몇인지는 알고 이러십니까!”
“아, 아니, 그냥 인사만…….”
“죽고 싶으면 그냥 접시 물에 코를 박으면 되지! 뭔 자살 아티스트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다채로운 방법으로 뒈지시려고 안달이세요! 왜!”
“…….”
백연홍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먼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강진호의 얼굴에도 황당함이 어렸다.
“……오늘은 이만 가지.”
팔에 매달린 곽소를 확 밀어낸 백연홍이 강진호를 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때까지 적당히 삶을 정리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린 백연홍이 미련 없다는 듯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뭐야, 저 새끼?”
최연하가 그 광경을 보며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려 강진호를 바라본다.
“괜찮아요?”
“……그거,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나야 뭐 항상 멀쩡하지. 진호 씨가 문제지.”
“…….”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는 정말 최연하의 터프함이 너무 고맙다.
“또 정신병자 하나 붙은 것 같은데, 내 남자 가만 보면 여자보다 남자한테 인기가 더 많은 것 같아.”
“……부정 못하겠다는 게 문제네요.”
최연하의 시선이 슬쩍 강진호의 표정을 살폈다.
어차피 물어봐야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강진호 나름의 대응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때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속이 썩네, 속이 썩어.’
더욱 그녀의 속을 썩게 만드는 건 저 강진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이었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즐거워하는 것도 같고…….
작게 한숨을 내쉰 최연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다를 것도 없지.’
어차피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남과 여라면 더더욱.
그저 서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묻어두고, 맞춰 나갈 수 있는 부분을 늘려 나갈 뿐이다.
“진호 씨.”
“네?”
“시럽 안 탔어요?”
“…….”
강진호가 힘없이 커피 잔을 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좀! 제발!”
백연홍이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제발 좀! 상식적으로 좀 살자구요! 안 그래도 지금 목이 반은 떨어져 있는데, 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사람들 다 보는 와중에 마왕이랑 붙었다는 말을 흑왕이 들으시면 전투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간만에 얼굴도 보고 좋겠군.”
“끄으읍, 끕!”
곽소가 숨이 넘어간다는 듯 목을 움켜잡았다.
“호들갑 떨 것 없어. 그래서 검도 두고 온 것 아닌가.”
“파리채 없으니 파리 못 잡는다는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그게!”
“도인으로서 살생은 피해야 하는 법이지.”
“그게 검공께서 할 말씀이십니까? 도인의 삶은 전생에 불과하다고 쳐 죽인 사람이 몇인데.”
백연홍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인사치레로 온 것뿐이야.”
백연홍의 시선이 뒤쪽의 카페로 향했다.
“진짜는 이다음이지.”
백연홍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본 곽소가 눈을 찌푸렸다.
“희한하네요.”
“뭐가?”
“흥미를 보이시다가도 막상 목표를 눈앞에 두면 반쯤은 식어버리던 게 검공 아니십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흥미라…….”
백연홍이 낮게 웃었다.
‘저런 자를 보고 흥미가 떨어질 수가 있나.’
가히 충격적일 정도다.
그가 마인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일 리는 없다. 지난 생을 살 때도 마인들은 종종 마주했고, 이번 생에서는 마인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나 저놈은 지금껏 그가 알던 마인과는 다르다.
“개와 늑대를 비교하는 것 같군.”
“예?”
“훈련된 사냥개는 늑대를 잡을 수 있지. 견종에 따라서는 딱히 훈련이 안 되어도 늑대를 이길 수 있는 개도 있고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하지만 개는 개고, 늑대는 늑대지. 늑대보다 강한 개가 존재한다고 해서 늑대의 흉포함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그에게 있어서 강진호란 그런 자였다.
진짜 마인.
그는 저 무표정한 얼굴 아래 얼마나 짙은 살기와 야성이 숨어있는지 능히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생각해 봐.”
“예?”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개를 사냥하는 맛과 늑대를 사냥하는 맛이 같을 수는 없지. 그렇잖은가?”
백연홍이 희게 웃었다.
“적천마존…… 과연 적천마존이야. 진짜 마인이라는 건 저런 거로군.”
백연홍이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꾹 쥐어진 주먹을 풀자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손바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그의 몸은 확실히 강진호를 대적으로 인정하고 과히 긴장했다.
‘노린내가 날 것 같은 야성이라…….’
이 평화로운 시대에 저런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나 다름없다. 제아무리 험한 과거를 지닌 이들이라고 해도 현대의 문물에 젖어 살다 보면 대부분은 그 야성을 잃어버린다.
수천을 학살한 장군이라 해도.
그 주먹으로 세상을 위진시킨 무인이라 해도.
심지어는 사상 최악이라 불릴 만한 범죄자조차 이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는 본디 가진 흉포함을 대부분 상실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니다.
“늑대가 아니지.”
늑대는 길들여 개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 위상과 그 업적을 감안한다면, 짐승의 왕이라 불러주기에 충분하다.
“돌아가지. 오래는 못 참을 것 같으니까.”
곽소가 한숨을 내쉬며 앞서가는 백연홍의 뒤를 따랐다.
“…….”
강진호가 모니터에 뜬 화면을 보며 아연한 눈을 했다.
“이놈인 것 같은데.”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군.”
“오, 사인도 받는데?”
“…….”
강진호의 힘없는 시선이 이현수에게로 돌아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너 평소에도 이렇게 감시하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스토커죠. 이번에 회주님 말씀을 듣고 빠르게 CCTV를 확보한 것뿐입니다.”
“30분 만에?”
“후후후, 간만에 제 능력에 감탄하셨군요. 칭찬은 그 정도로 됐습니다. 쑥스러우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얘는 왜 약할까?’
바토르 정도면 됐어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풀스윙으로 후려쳐 버릴 수 있을 텐데. 약해 빠져서 손가락으로 때려도 죽을까 봐 건드리지도 못하겠고.
“어땠습니까?”
“죽일까 생각 중이야.”
“그건 당연한 거고요.”
“응?”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아, 저놈 이야기로군.”
“……그럼 누굴 죽일까 생각 중이셨는데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넘어가시죠.”
괜히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게 이현수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강했습니까?”
“그렇더군.”
“얼마나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사들의 시선이 강진호의 입에 고정되었다.
“글쎄, 손도 섞어보지 않고 정확한 무위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강진호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홍왕과 승부를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최대로 잡아서요?”
“최소로 잡아서.”
이현수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최소 홍왕급?
아니, 아니다. 승부를 해볼 수 있다는 게 대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강진호의 말대로라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홍왕과 승부가 가능하다는 뜻이니까…….
“삼왕급이군요.”
“정확하지는 않아.”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쪽의 무위는 내가 파악하기 힘든 종류니까. 기본적으로 내 감각과 마기를 밀어내거든.”
“예?”
“도가 계열이다. 제대로 배웠어.”
“…….”
웬만해서는 강진호의 말에 끼어들지 않는 장민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도가 계열이면 도사 놈들이라는 건데, 그런 놈들이 왜 청마의 밑에?”
“……글쎄?”
장민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게 많이 이상한 겁니까?”
“마인의 부하가 소림승이면 이상하지 않겠나?”
“그, 그렇죠. 그건 이상하죠.”
“딱 그 꼴이로군.”
위긴스가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될 수 있으면 외국인도 알 수 있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악마 숭배자 밑에 카톨릭 주교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미쳤군.”
위긴스가 중지를 들어 올렸다.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야? 카톨릭을 모욕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라잖습니까.”
“허.”
위긴스가 복잡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이거…… 이거,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은 소식 같은데.”
“예?”
“지금 그 사람은 종교인 같아 보이지 않았어. 그 말인즉슨 전생에 그런 삶을 살았다는 뜻이겠지.”
“그렇죠.”
“그럼 혹시 흑왕의 심복이라는 놈들이 다 그런 것 아닐까?”
위긴스의 말을 이해한 이현수가 얼굴을 굳혔다.
“이전에 자네가 말했지. 아무리 청마라도 사람을 삼왕급으로 키워내는 건 불가능하다. 회주님은 청마라는 작자를 너무 고평가하고 있다.”
“그걸 왜 여기서…….”
“그런데…….”
위긴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키워낼 필요가 없다면?”
“예?”
“재능이라는 건 깨우치기 위해 필요한 요소일 뿐이지. 이미 아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단 말이야. 일 더하기 일이 몇인지 이해하는 데는 머리와 재능이 필요하지만, 그걸 알아버린 순간에는 더는 필요치 않아지는 거지. 다시 말해…….”
위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주님께서 현대에 다시 태어나며 머리가 나쁜 이의 몸으로 태어났다 해서 가진 경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 말씀은…….”
“키우는 게 아니야. 찾아내는 거지, 귀환자를. 그저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만으로 전생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회주님 같은 귀환자들을 말이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이들의 심장에 서늘한 비수가 박혀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