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책임져라
클래식 음악의 나긋한 선율이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를 가로질렀다.
도율이 넓은 로비를 가로질렀다.
정장 차림은 익숙했지만, 이런 장소에 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가.’
10년의 세월이 텅 비어 있으니, 결혼할 만한 놈들은 이미 결혼을 했거나 인연이 끊긴 탓이었다.
대현의 벨로즈 웨딩홀.
대현 그룹이 이름을 내걸고 하고 있는 사업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로비부터 으리으리할 정도로 넓었다.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있는데도 북적거린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유명한 사람들 천지군.’
도율이 슬쩍 둘러보며 입구로 다가갔다.
신랑은 입구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에 선글라스나 쓰고 다니던 남자가 젤을 잔뜩 바른 머리를 한 채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 비해 한참 얌전해 보였다.
도율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청진명 씨.”
“오!”
청진명이 쾌활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도율이 맞잡자 청진명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청진명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댁도 와 줬구만. 고마워.”
“별말씀을. 당연히 와야죠.”
사실은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금의 청진명과 도율은 이전보다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도율만 보면 대련 한 번 해 보자며 달려들었던 과거는 없어진 지 오래였으니까.
청진명은 도율을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미약한 인연이 남아 있던 덕분에 청첩장은 받아 둘 수 있었지만. 굳이 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다만 도율이 일부러 이곳을 찾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옆에 아가씨는?”
청진명의 눈동자가 도율의 옆에 비스듬이 선 금발의 아가씨에게 향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레어 컴벨이라고 합니다.”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클레어의 인사에 청진명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의 존재가 지워졌던 세상에서, 청진명은 클레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본다는 말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고개를 든 청진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어디선가 만난 적이라도?”
그 물음에는 도율과 클레어 모두가 놀랐다.
청진명은 도율이나 백우진처럼 마력이 통하지 않는 체질인 것도, 세케르와 샤디아가 가지고 있던 황금안처럼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육감에 의존해, 그런 말을 던져 본 것이었다.
사실은 클레어는 각성자였고, 청진명의 팀으로 던전을 함께 공략하던 팀원이었다는 과거가 있었지만.
“아뇨… 기분 탓이 아닐까요.”
클레어는 쓰게 웃으며 부인했다.
그러자 청진명도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핫핫. 역시 그렇겠죠? 워낙 미인분이시라 농담 한번 해 봤습니다.”
“청진명 씨…….”
“아, 미안. 임자 있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지. 용서해 달라고.”
청진명이 짓궃게 웃었지만. 도율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청진명의 등 뒤를 가리켰다.
“임자는 그쪽이 있는데요.”
“……?”
도율의 손길을 따라 청진명이 돌아보자, 그곳엔 송민아가 서 있었다.
손아귀 속의 티아라가 우그러들었다.
“다이아로 만든 티아라가……!”
그러나 가격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왜, 왜 여기에…….”
“신부 대기실은 너무 답답했거든. 너무 웃느라 뺨에 경련이 날 것 같아.”
송민아다운 말이었다. 그녀 말대로 송민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넌 아주 재밌어 보이는데 말이야.”
“아니, 나도 너무 웃느라 피곤하지…….”
“왜? 아까처럼 한 번 웃어 보시지? 입이 귀에 걸리게 생겼더만?”
청진명이 눈빛으로 도율에게 SOS를 쳤다.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어, 딱히 도울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곳에 가장 오고 싶어 했던 건 클레어였다.
“축하드립니다, 송민아 씨.”
“어, 그래. 고마워.”
“저도. 저도 축하드려요.”
클레어 역시 송민아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네, 감사…해요.”
그런 클레어의 말이 가볍게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게 분명한, 이국적인 아가씨.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왠지 모르게 그 말이 무척이나 가슴속에 와닿았다.
송민아가 도율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애, 네 지인이지?”
송민아가 도율을 간단히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그 이상의 접점은 없었다.
도율이 데려온 처음 보는 여자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어수선했다.
도율이 대답했다.
“지인 아니고 애인입니다.”
“…헐.”
송민아가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도율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런 뻔뻔한 소리를 하는 놈은 아니었다. 어쩌면 청진명에게 배운 걸지도 몰랐다.
그 말에 놀란 건 송민아뿐만이 아니었는지, 클레어도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된 시선에 도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틀린 말이라도 했냐는 듯이.
* * *
“와~ 차 더럽게 막히네.”
투덜거리며 나타난 건 도은이었다.
“왔냐.”
도은이 도율의 옆에 앉았다. 식이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들어온 것이었다.
도은은 도율의 인사를 가볍게 씹고 도율의 옆에 앉은 클레어를 향해서만 인사했다.
“언니, 안녕하세요~”
“으, 응.”
클레어가 멋쩍게 인사를 받았다.
도은을 대하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계에서 돌아오기 전후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 그건 역시 클레어와 도은의 관계였다.
이전엔 도율보다도 먼저 클레어와 알고 지냈던 도은이, 지금은 클레어를 단지 오빠의 애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모난 성격이 아니어서 갈등이 있거나 경계하는 건 아니었지만. 쌓은 추억이 없기에 무미건조한, 딱 그런 관계였다.
‘…어쩔 수 없지만.’
클레어는 남몰래 울상을 지었지만, 도은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율이 주의를 끌었다.
“그러게 일찍 좀 다니지.”
“어쩔 수 없잖아. 난 바쁜 몸이라고.”
그 말엔 도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은은 클레어의 매니저일 때부터 상당한 워커 홀릭이었다. 그게 길드의 백업 없이 홀로 헌터를 지원하기 위한 과도한 업무량을 소화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헌터 매니저가 아닌 지금. 주예린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지금이 훨씬 더 바빠 보였다.
주예린과 은근히 죽이 잘 맞을 것 같더라니. 지금 모습을 보면 그 추측이 틀린 게 아니었다.
“언니가 욕심이 좀 많잖아.”
주예린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공연히 클레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래서 언니가~”
움찔.
“저번에 언니가~”
움찔.
“아 맞다. 언니가 그러던데.”
움찔.
도율이 손을 들어 도은의 말을 제지했다.
“…너 일 얘기 좀 그만해라.”
“이건 일 얘기 아닌데? 그냥 우리 명절 선물로…….”
“아, 아무튼. 그, 뭐냐. 나 목마른데 마실 거라도 좀 사 오면 안 되냐?”
도율의 말에 도은이 오만상을 썼다.
“이런 씨. 내가 네 꼬붕이냐?”
“…….”
실패였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던 도율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보는 눈이 없는 도율이 봐도 남들에 비해 굉장히 값비싼 정장을 걸쳤다는 게 느껴지는 남자. 그것을 완벽한 맵시로 소화해 내고 있는,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업가.
로얄 로드의 길드장 최윤호였다.
“어. 야. 저기 최윤호 길드장이다.”
“뭐, 뭣?”
그 말엔 확실히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 뭔데. 저 인간이 여긴 왜 와 있는 건데?”
“왜냐니. 로얄 로드 길드장이 청진명 씨 결혼식에 안 와, 그럼?”
“…맞네.”
도은이 탄식을 내지르며 머리를 긁었다. 도율이 그 틈을 타 고개를 빼들고 말했다.
“야, 저쪽에서 너 부른다.”
“뭐… 뭐?”
뻥이었다.
“부, 부르긴 뭘 불러.”
“몰라? 할 말이라도 있나 보지.”
“하, 참 나. 부르기는……. 웃기네. 내가 뭐 부르면 쫄래쫄래 가야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은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아니. 혹시 몰라서 간다, 내가. 혹시 몰라서. 저쪽도 우리 스폰서고……. 큰손이 까라면 까야지. 어.”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중얼거리며 도은이 멀어졌다.
도율이 슬쩍 그쪽을 관찰했다.
“…왜 부르는데요?”
“불렀다니?”
“그쪽이 불렀다고…….”
“그런 적 없다만.”
최윤호가 단칼에 대답하자 도은이 도율을 바라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아, 예. 그렇군요. 거,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려는 찰나, 최윤호가 도은을 붙잡았다.
“같이 앉지.”
“…예?”
“온 김에. 할 얘기도 좀 있고.”
도은이 고개를 돌리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앉았다.
폭탄 떠넘기기는 성공한 셈이었다.
도율이 클레어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클레어는 도은과 각별한 사이였다.
지금은 일방적인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물론 괜찮죠.”
클레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도은이야 원래 어딜 가서 뭘 해도 잘할 아이니까요. 지금 새 터전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하네요…….”
억양이 가출했다.
“게다가 누굴 탓하겠어요.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저 자신인걸요. 제가… 제 손으로…….”
“시, 신랑 입장합니다.”
어느새 식이 시작되었다.
“……좋아 보이네요.”
클레어가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 * *
‘돌아왔군.’
걱정과 달리 클레어는 집중해서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현 그룹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벨로즈 웨딩홀. 게다가 오늘은 그 유명한 S급 헌터 청진명의 결혼식이었다.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크게 난 창문으로부터 실내가 햇빛을 듬뿍 머금었다. 하객들이 앉는 테이블 역시 세련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신랑과 신부가 지나가는 길 위로 화려한 꽃이 늘어섰다.
“신부 입장.”
새하얗게 늘어진 길을 따라 드레스를 입은 송민아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움직이기 불편한 옷을 입고 주목을 모으며 걷고 있다는 게 참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저 앞에서 기다리는 청진명조차 벅찬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런 때조차 감상에 빠지지 않는 송민아였다.
그것을 클레어는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막상 초대를 받았던 도율보다도 더욱 깊은 감회를 느끼고 있는 건, 두말할 것 없이 클레어였다.
각성자 센터 센터장 최강현이 주례를 보고, 청진명의 팀원인 고철민이 나와서 축가를 불렀다.
축사를 전하는 사람은 고등학교 친구라는 정세인이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클레어가 곧잘 가던 숍의 원장이었다. 그녀를 여기서 볼 줄은.
‘세상 참 좁군.’
신랑 청진명이 신부 송민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식이 마무리되었다.
“자리를 빛내 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나와 사진을…….”
도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하지만 전…….”
클레어는 도율의 덤으로 딸려 온 것뿐이니, 저 자리에 껴도 되는 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율이 클레어의 손을 잡아 끌었다.
“다시 친해지면 되죠.”
한때 동료였던 그들은 지금, 겨우 통성명을 마친 사이가 됐지만.
“지금은 잘 몰라도,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으니까.”
시간이라면 많았다.
“…그렇네요.”
이제는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까.
도율은 클레어를 가장 앞줄에 세우고 그 뒤에 섰다. 신부인 송민아와 제법 가까운 자리였다.
“자, 찍습니다.”
사진사가 이런 저런 요구를 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내고.
사회자가 송민아의 손에 작은 꽃다발을 전해 줬다. 부케였다.
원래라면 최근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을 친구도 미리 정해 놓고 약식으로 사진을 찍곤 하지만.
‘귀찮게. 받을 년은 알아서 받아라.’
아무도 받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촬영에 있어선 대형 사고겠지만. 그거야 송민아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휘익.
송민아가 무심하게 꽃다발을 던졌다. 공중을 날던 꽃다발이 떨어져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꽃다발의 주인은 아까 보았던 금발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사진사가 때를 놓치지 않고 플래시를 터뜨렸다. 주위에선 박수 소리가 퍼졌다.
“아니, 저, 이건…….”
클레어가 곤란하게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본 송민아가 카메라를 가리키며 입가를 씩 끌어당겼다.
“이거 평생 간다.”
“네……?”
“너, 책임져라?”
도율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죠.”
도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식장에 함성 소리가 가득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