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28
28화.
28화. 외전 – 결국, 하찮아지는 밤
매끈거리는 대리석 바닥 위를 달리듯이 빠르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본다. 미안해.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사과가 입속을 맴돈다. 여자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콧속으로 묻어 들어온다. 동하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보지 않으려 해도 여자의 잘록한 허리와 시원스레 긴 다리가 보인다. 머리칼에 가려져 있지만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얼마나 완벽한지 기억하고 있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 쫓아 와서도, 동하는 여자를 부르지 못한다. 너무 오랫동안 알아 온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긴 속눈썹을 적셨을 눈물을 보고 싶지 않다. 여전히 울게 할 만큼, 좋은 사람이야 물을 수가 없다. 일곱 살 세경에게도 묻지 못했다. 한번은 미끄럼틀 아래에 숨어서, 가을 언젠가는 블록 장난감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세경은 울음을 참았다. 동하는 모르는 척 미끄럼틀을 타고, 옆에 나란히 서서 블록을 차례로 줄 세웠다.
‘나도 탈 거야. 비켜.’
세경이 미끄럼틀 계단을 오를 때까지.
‘이건 여기 둬야 하는 거야. 보라와 노랑, 주황, 이 패턴이 제일 예뻐.’
세경이 동하가 일부러 엉망으로 정리한 블록을 바로 잡을 때까지.
우정이라는 이름의 줄타기는 오늘도 진행 중.
양손에 기다란 막대, 한쪽 끝은 건일, 다른 끝은 세경. 동하가 균형을 잃는 순간, 세 사람 모두 진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우정의 밧줄에 다시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어느 날은 조금 쉽고 어느 날은 좀 더 못 견디겠고, 오늘은 좀 많이 못 견디겠는 날이 되려나.
‘동하야, 동하야, 동하야, 우리이, 우리 사귄다 사귀기로 했어. 우리.’
‘응 ’
노래를 부르듯이 말하는 우, 리, 라는 두 글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지 않았다. 사랑을 말하는 세경의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복숭아같이 물든 핑크빛 뺨. 동하의 심장은 처절하게 박살난 태엽. 열 살도 더 어렸을 때, 낮이고 밤이고 피가 절절 끓고 있던 그 시절에도 들키지 않았다. 동하는 그때조차 장대의 균형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버텨냈던 트라이앵글 우정이다.
‘서프라이즈! 놀랐지 놀랐지 아우, 창피해. 그렇게 보지 마.’
세경은 손을 들어 얼굴을 반쯤 가렸다. 손가락 사이사이 가느다란 틈으로 가장 아름다운 전설을 품은 별들이 쏟아졌다. 그날은 알 수 없었다. 빛이 꺼진 눈을 보는 일이 수배는 더 고통스러우리라는 것을. 질투, 증오, 안타까움, 안도, 치사함,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건일이,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녀석,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세경이. 여전히 매일매일 지나치게 예쁜 세경이. 젠장할 이동하다.
‘말하지 마. 말하면 진짜 창피하다고.’
식어버린 돼지껍데기와 소주를 앞에 두고서, 세경은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건일이 할아버지 호출을 받고 마시던 소주잔을 팽개치고는 급히 들어간 직후였다.
헤어지고 석 달은 넘었는데, 멀쩡한 얼굴로 셋이 같이 모여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농담도 하는데, 박세경, 너.
기막혀 절로 터지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세경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나, 티슈.’
‘어어, 잠시만. 여기 티슈가 떨어졌는데.’
‘손수건이라도 줘. 아님 네 옷에다 코 풀어버린다 ’
그러지요. 나는 너의 갈대밭이 되고, 너의 휴지가 되고, 너의 샌드백이 되고, 너의 땅콩이라도.
까짓 거, 오늘은 뭘 해줘야 하나. 무엇이 되어 줘야 하나.
동하의 손이 세경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세경이 몸을 휙 돌렸다. 흠칫 동하가 긴장하며 손을 내렸다. 속눈썹은 역시나 젖어 있다. 동하는 말없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주었다. 세경은 제 것인 양 손수건을 받아서 눈도 닦고 코도 닦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왜 왔어 ”
“그러게 말이다.”
“가.”
멈춰서 있자, 한번 더 말했다.
“가아. 가라고. 이동하!”
“……소리 질러서 미안.”
세경이 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됐어. 가. 건일이 기다려.”
“기다리긴. 계산하고 갔겠지.”
못마땅한 듯 세경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니까 가라고. 구두 바꿔 줘. 봐 둔 거 있어. 주세페자노티 골든 글리터. 사이즈는 있어 디피된 거도 얼추 맞아 보이던데.”
동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가.”
“구두야 뭐. 알아서 골라 가겠지.”
“문제는, 구두가 아니라고.”
세경이 발을 가볍게 굴렀다.
“네가 지금 안 가면 내가 꼴이 뭐가 돼. 걔네, ……한테.”
“뭘.”
“고약하게 성질 피우는 거 한참을 달래는 걸로 알 거 아냐. 그냥 난 옷 고르다 지쳐서 잠깐 열 받았을 뿐이고, 마감이라 급히 갔다 그래.”
“오케이. 마감, 그리고 주세페자노티. 됐어 ”
“응.”
세경이 피식 웃더니 돌아섰다. 몇 발 걷다 말고 동하를 향해 확인하듯이 말했다.
“거짓말 아냐, 진짜 마감이야. 원고 마감 중에 나왔다고. 누가 이렇게 길게 고생시킬 줄 알았겠어. 아우, 짜증 나.”
“마감 끝내고 와. 밥 먹자.”
“술이나 마실래. 신경 피곤해 미치겠어. 마시고 푹 잘 거야.”
“뭐든.”
“오우케이.”
세경이 그제야 활짝 웃으며 손사인을 해 보였다. 동하는 슬쩍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세경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동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취기가 오른 일행들에게 애매하게 얼버무리고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였다. 겨우 원고 마감하고는 술 없이도 잠이 쏟아진다고 하더니,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느닷없는 호출이다.
12시 15분, 꾸레주 구석 자리에 온더락스 잔을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세경이 보인다. 재즈 음악에 취한 듯이 눈을 감고 입으로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다. 이마와 어깨, 가느다란 팔과, 동그란 가슴과 매끈한 다리에 쏟아지는 조명이 매혹적인 음영을 더하고 있다. 술잔을 느슨하게 감싸 쥔 손가락에서조차 관능이 뚝뚝 떨어진다. 동하는 말없이 맞은편 의자를 빼어 앉았다. 세경이 눈을 뜨고 활짝 웃었다.
“안 나와도 된다니까.”
동하는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던 빈 잔에 양주를 따랐다.
“일행 있다고 말했어.”
“응.”
“혼자 마시고 싶은데, 다른 바에 있자니 미끼도 안 매단 낚싯줄에 물고기들이 너무 많이 꼬여서.”
“자랑이구나.”
“그으럼. 그물로 쓸어올 만큼 많았는데.”
“쓸어버리지 그랬어.”
세경이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세경의 웃는 얼굴 위로 조명이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동하는 미간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취했나 보네.
“힘 딸려서 말이야……. 다 떨어내고 집으로 가다가 딱 두 잔만 마시고 가야지 하고서 들른 거야.”
“응.”
“그래도 여긴, 서빙하는 애들이 날 아니까 혼자 마셔도 덜 이상하고.”
“응.”
“취해서 잠들어도 안심이니까.”
세경이 잔을 비웠다.
“그래서 메시지 보냈어. 혹시 잠들었나 확인만 한번 하라고. 며칠 제대로 못 잤거든.”
동하는 세경의 빈 잔에 얼음과 술을 차례로 채웠다.
“그러니 가도 돼.”
그러니 가도 된다는 세경의 목소리가 ‘그러니 이만 나는 가도 되겠다’ 하면서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화사한 웃음과는 다르게, 세경은 불안한 기울기로 가라앉은 음성을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마감은 잘했어 ”
동하는 짐짓 모르는 척 대화의 주제를 옮겼다.
“그러엄. 완벽했지.”
“무슨 원곤데 ”
“말했었지 C잡지 고정으로 시작한 칼럼. 벌써 넉 달째네. 사랑, 섹스, 유혹, 뭐 그런 것들.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좋네. 남겨진 것들을 위해, 브라보.”
동하가 잔을 들자 세경이 브라보, 따라 외치면서 잔을 부딪쳤다.
“있지, 동하야.”
“응 ”
“……사랑의 흔적이 깊을까, 섹스의 흔적이 진할까.”
“당연히.”
동하는 잔을 들어 천천히 입술에 가져갔다.
“당연히 ”
“섹스.”
세경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는 묻지도 않을래. 넌, 섹스를 너무 좋아해.”
“그런 건가 ”
“난 별로야. 저 남자와 섹스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상상하는 순간까지만 최고야.”
동하가 양주병을 들자 세경이 받아서 동하 잔을 대신 채웠다.
“너어 술 마시다 온 거 아니었어 많이 마신다아 ”
“오늘 술이 좀 받는 날이네.”
“좋아아, 좋아아. 나도오.”
세경이 잔을 힘차게 내밀었다. 따라 주는 대로 홀랑 받아 마신다. 얼굴빛은 그대로지만 입술만 붉디붉다. 세경은 아무리 취해도 필름이 끊어지듯이 갑자기 잠이 들어버리는 순간까지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단어 끝 어미만 조금씩 조금씩 느려질 뿐이다. 이제 그만 마셔야 할 텐데.
“일어나자. 곧 마감하는 시간이야.”
“사장니임, 30분만 특별 연장. 안 될까요오 ”
세경이 턱을 양손으로 괴고는 동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돼.”
“아아아앙.”
동하는 미련 없이 일어서서 턱짓을 하였다.
“쳇.”
팩하니 일어서다가 비틀거리는 세경을 동하가 급히 붙잡았다.
“데려다줄게.”
세경이 동하의 팔짱을 끼고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자 차가워진 바람 때문에 세경은 어깨를 움츠리며 동하 곁을 파고들었다. 추워. 추워. 문득 생각난 듯이 세경이 물었다.
“시은이 구두는 ”
택시를 호출하려 번호를 뒤적이느라 동하는 반쯤은 건성으로 답했다.
“사이즈 있더라. 잘 어울렸어.”
모범택시 콜 번호 중 하나를 골라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나는 통화 중이어서 다른 하나를 다시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신호 네 번 만에 연결이 되었다.
“네, 여기 청담동 37에…….”
“예뻐 ”
느닷없는 물음에 동하는 주소를 말하다가 멈추고는 세경을 쳐다보았다.
“응 ”
“시은이 걔가 그렇게나 예뻐 ”
“…….”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얼빠진 바보 등신처럼 굴 만큼, 예쁘냐고!”
날카로운 새 울음 같은 소리다. 동하는 핸드폰 송신구에 대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며 호출을 취소하였다. 세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하였다.
“그래, 예쁘지. 많이.”
세경이 끄윽,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를 내었다. 동하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예뻐도 세경이 너만 할까.”
“고맙구나. 예쁘다 해 줘서.”
“진심이야. 그러니 시은 씨 미워하지 마라.”
“나도 진심으로 고마워.”
세경이 빈정거리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예뻐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동하 씨.”
여전히 팔짱을 끼고 몸을 바싹 붙인 채로, 동하를 도전적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이동하, 나 수습하느라 동분서주 바쁘구나. 왜, 내가 걔들 사랑놀이에 훼방이라도 놓을까 봐 ”
“그래.”
“진심이야 ”
“응.”
“내가, 왜 ”
세경이 밀치듯이 동하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후회해 ”
“무슨 후회 ”
“니가 시은이 자리에 서지 못해서 ”
“뭐 ”
“처음 그 아이디어는, 네 거였으니까.”
“무슨 아이디어 뭐!”
혀끝으로 미끄러지려는 말을 겨우 붙잡고 동하는 주변을 흘끗 둘러보았다. 카페에서 나서는 사람들, 발렛파킹하는 직원까지. 취했네. 대체 여기서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가라, 박세경.”
동하는 팔을 높이 들어 인사를 대신하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동하를 세경이 뒤따랐다.
“야!”
돌아보지 않는 동하를 쫓았지만 코앞에서 동하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린다. 닫히던 문을 열자 동하는 싸늘하게 세경을 넘어다보았다. 정작 문을 열었던 세경은 머뭇거리는 반면, 닫힘 버튼을 다시 누르는 동작은 망설임도 서두름도 없다. 언제나 그랬지. 저 자식은 쬐끄마할 때부터. 나보다 손도 작고 발도 작고 키도 더 작고 비리비리 말랐을 때부터. 하얀 얼굴에 차분한 갈색 머리칼에, 천사 같은 눈웃음에, 따스한 말투는 덤, 햇살반 이동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동하는 존재만으로도 슬픔을 경감시키는 축복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부터도 가끔 무서울 만큼 냉정했다. 언제나 져 주는 척 들어 주는 척, 결국 일백프로 제멋대로다. 정신을 차려 보면 늘 세경은 동하의 페이스에 말려 있었다. 알고 보면 제일 독한 놈. 이번에는 네 페이스로 가지 않을 테야.
세경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빠른 속도로 닫혀버렸다. 악, 외마디 비명이 절로 터졌다. 터엉, 엘리베이터는 둔한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엘리베이터 문에 부딪히는 순간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 때문에 세경은 저절로 몸이 구부려진다.
“괜찮아 괜찮아 ”
동하가 세경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들이고는 손을 붙잡고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무릎이 깨진 세경을 보고 제가 울어버릴 듯 눈물을 글썽이던 햇살반 이동하처럼.
“안 괜찮아. 아파.”
“손가락, 접질렸니 ”
“몰라.”
그새 동하 집이 있는 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얌전히 문을 열고 서 있다.
“들어가서 좀 보자.”
신발도 벗지 않고서 현관 불빛 아래에 서서 동하는 세경의 손을 얼굴 가까이 끌어올렸다. 손가락 하나하나 위로 드는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약지를 건드릴 때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아파.”
“구부려 봐.”
동하의 손바닥 위에서 세경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편다.
“구부려져 ”
“응. 좀 아프기만 해.”
“어디 ”
“넷째랑 새끼손가락 ”
순식간이었다. 동하의 입술이 손가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숨을 잠시 멈춘 채로 세경은 동하를 쳐다보았다. 눈을 보고 싶은데, 제 손가락만 집중해서 바라보느라 아래로 향한 속눈썹만 보인다. 손이 저절로 움찔거린다. 여섯 살, 일곱 살부터 수없이 잡아 봤던 손인데, 갑자기 맞닿은 부분이 뜨겁게 데워지기 시작한다. 세경이 손을 빼어내기 직전 동하가 힘을 더한다. 한 번 더, 손가락에 닿는 입술이 뜨겁다. 취했나 봐. 손끝부터 팔, 가슴과 목덜미까지 뜨겁게 달아오른다. 현관 센서등이 꺼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동하의 숨소리가 그림처럼 선명하다. 세경이 손을 뿌리치는 순간 센서등이 둘을 환히 비췄다. 동하의 눈동자가 세경을 완벽하게 담고 있다. 투둑, 세경의 힐이 현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서너 번 침묵을 깨고 울린다. 동하의 구두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왈츠를 추듯 여유롭게 다가와 왈츠를 추듯 허리를 감쌌다. 서두름이 없는 손길로 속눈썹을 만졌다. 젖었네. 으응 세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속눈썹.’
동하가 귓속말을 하였다.
“아아, 아까 눈물이 찔끔 났어. 너무 아팠다고. 나쁜 놈.”
관자놀이에 이마를 기대고 동하가 후후 웃었다. 웃음이 청각을 자극하고 섞여 나오는 숨이 귓바퀴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기분 좋네.”
“뭐야. 남 아프게 하고 기분이 좋아 ”
짐짓 모르는 척 자연스레 몸을 빼려는데 동하는 머리를 기댄 채로 움직임이 없다.
“야아, 무거워. 저리 가.”
밀어내는 순간 동하가 바싹 세경을 끌어당겼다.
“내가 울리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깊어진 귓속말에 귓불이 간지러워 세경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보니,”
동하가 허리를 감싼 채로 머리만 들고는 말하였다.
“너, 솜털이 있구나. 햇살반 박세경처럼.”
“응 어디 무슨 소리야, 내가 나이가 몇 갠…….”
세경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귀와 턱이 이어지는 지점, 여린 맥이 폭주하듯이 튀어 올랐다. 뜨거운 동하의 입술이 찰나처럼 닿았던 부분이 서늘하다.
“여기. 모르겠어 ”
솜털을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듯이 동하가 입술을 닿을 듯 말 듯 붙이고는 턱부터 귀 끝 방향으로 후우 바람을 불었다.
“몰라.”
“대체, 네가 아는 건 뭐야.”
세경이 한 걸음 물러서는 만큼 동하가 다가왔다. 허리를 감싼 손은 몸을 당기지도 멀어지게도 하지 않는다. 왼발을 뒤로 빼면 오른발을, 오른발을 뒤로 빼면 왼발을. 왈츠는 길지 않다. 등으로 차가운 벽이 닿는다. 뜨거워진 몸에 소스라칠 만큼 차가워 소름이 돋았다.
“이마가 예쁜 건 알아 ”
세경의 머리칼을 완전히 걷고는 한참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동하가 입술을 가볍게 이마에 대었다.
“눈이 밤하늘의 별 같다는 건 알아 ”
눈두덩을 쓰다듬고 광대뼈를 오래 어루만지고, 입술은, 하고 말하면서 동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입술은 말이야, 지나치게 붉어. 짓이기면 붉은 즙이 흘러내리는 꽃잎처럼.”
얼굴이 탈 듯이 뜨거워졌다. 뭐, 뭐야. 너. 말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동하의 갈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곤 하였다. 동하는 확인하듯 검지를 세경의 아랫입술에 꾹 눌러 보더니 제 입술로 가져가서 쓰윽 문질렀다.
“너 예쁘다고 했지 내가 수없이 말했지. 넌…… 그런데 그것도 모르지.”
동하가 세경의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하였다.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감기라도 걸린 것만 같다.
“넌 내가, 남자인 것도 모르지.”
동하의 눈동자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센서등이 완전히 꺼졌다. 빛이 사라진 공간에 세경의 구두 소리만 두어 번 울리다 이내 그 소리조차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오로지 촉각만 무섭게 커져 갔다. 느리게 느리게 느려서 더 미치게 만들고 싶은 듯이. 입술, 입술, 혓바닥, 치열, 뺨, 솜털, 귀고리, 귓불, 목덜미, 깊이 파진 네크라인, 목걸이, 지퍼가 내려간 등에 닿는 손바닥, 가슴. 세경은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려 혀를 깨물었다. 동하가 고개를 들고, 센서등이 다시 켜지는 순간 세경의 몸이 완전히 들어 올려졌다. 세경은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동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
우정의 밧줄 타기는 잠시 휴장.
장대가 부러진 밤에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으면, 너는 어설픈 우정의 가면을 쓰고 돌아가겠지. 일그러진 가면 따위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어. 하나쯤 기꺼이 빌려줄 수 있다.
열락과 후회가 번갈아 드는 눈동자를 손으로 가리고 동하야, 우리 이건……. 말하려는 입술을 입술로 덮었다. 오늘 밤을,
후회하게 될 거야. 되돌리고 싶어질 거야.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밤인걸.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거대한 중력을 이길 수 없는 밤.
시간의 무게를 어깨에 떠메고 울어야 하는 밤.
그래서 결국 하찮아지는 밤.
늘 그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