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27
27화.
27화. 에필로그
스크린은 최근 건축 동향에 대한 슬라이드를 비추고 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들 수백 개가 동시에 나의 입으로 향한다.
‘얘들아, 뭘 들어보겠다고. 졸리지도 않니. 오후 시간에.’
시답잖은 말을 삼키고 준비된 뻔한 소릴 시작하였다. 슬라이드마다, ‘다 아는 내용이지 ’ ‘이건 장 수 맞추려 넣은 거야.’ ‘나도 처음 보는 거네.’ 같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진지한 눈동자들이 도대체 몇 개냐, 세어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K건설 사장, 현건일에게 어울릴 법한 엄숙한 얼굴로 슬라이드를 설명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리모콘 버튼을 눌렀다. 강의 주제는 서양 건축물이 우리나라 건축에 미친 영향이다.
서양사학과에 급조된 특강을 하게 된 계기의 시작은 따지고 보면, 총장의 개발 정책 때문이었다. 학교 개혁과 발전에 사명을 가지고 매진하는 총장은 지난 수십 년간 그래 왔듯이 정계 재계와의 인맥의 그물을 공고하게 짜고 있다. 그물망에 현건일 역시 작은 칸을 차지함은 물론이다. 학자금에 허리가 휘는 학생들 입장에서 총장의 과도한 개발 정책은 기가 막힐 노릇일 테고, 학생회와 충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도서관 신축 공사에 난항이라나.
도서관이라니…….
비 갠 오후, 정시은을 내 사무실로 오게 했던 그 도서관,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도서관이다. 총장이 도서관 건물을 언급하는 순간,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맞물린 이 사이로 익숙한 고통이 핏물처럼 흘렀다. 처음부터 단 한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떠난 자리에 생긴 빈 공간은 채울 길이 없어 다만 고요히 뒤틀릴 뿐이다. 고작 열흘의 여름 하늘만 아는 매미가 그 여름을 다 가졌다 믿듯이, 눈을 가리고 귀가 먹도록 큰 소리로 울어대며 달콤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가질 수 있다고, 사랑할 수 있다고. 남은 것은 울음뿐인데, 울음이 빠져나간 자리뿐인데 말이다. 망설이는 마음을 읽은 총장은 허점을 포착한 복서처럼 끈질기게 잽을 날렸다. 결국 기부도 했는데 지어주는 걸 못 하랴. 다 공짜로 해내라는 것도 아닌데. 나 버리고 가버린 정시은 너 보란 듯이 도서관을 지어주마 유치한 오기까지 들끓어 어영부영 이문 없는 시공을 떠안게 되었다. 어쩌면, 최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좌표에서 혼자 길을 잃어버린 나에게 부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공간에 터를 다져 바닥을 만들고,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벽을 쌓고, 들이치는 빛을 껴안을 창을 만들어, 흔적없이 사라진 시간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시은이 부정했기에 없어져버린 시간을 말이다. 시은은 거짓으로 지어 올린 사랑의 역사에 취해 진실을 착각한다고 비난하였다. 거짓된 시간이 만든 구멍이 결국 당신과 나를 뒤틀다가 부러뜨리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사랑해요,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도 결국 비틀린 거짓, 거짓된 진실이 뿐이었던 걸까.
‘모두 잊을 겁니다. 그러니 잊으세요. 처음부터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나에게 당신도 그러합니다. 그날, 찾아가지 않았어야 했어요. 당신은 도서관 기부를 해달라는 부탁 따위 무시하고 나를 돌려보냈어야 해요. 그게 우리의 정상 항로예요. 나 때문에 잠시 이탈했을 뿐, 이제 서서히 방향을 틀어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그래야, 나도 전복되지 않고 난파되지 않고 내 길을 찾아갈 수 있어요.’
알고 보면 정시은은 고집불통 철학자였다. 그래, 정시은, 네 갈 길 잘 찾아가라. 내가 네 배를 난파시키거나 전복시키진 않을 테니. 어려운 소린 하나도 모르겠지만, 도서관이 지어지는 날, 내 몸속 어딘가에 뚫려버린 빈 공간도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 시공 건으로 학교에 한번 얽히다 보니 졸업생들 취업에 특강에 청이 끝이 없었다. 총장의 청을 몇 차례 거절했더니 학과장이 붙잡았다. 학부 시절 지도교수님이었던 분이 특강 한 번만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시는데 딱 자를 만큼 뭐 대단히 바쁘지도 않다.
‘제가 무슨 특강을. 학과 후배들과 만나는 자리 정도로 알겠습니다.’
드디어 슬라이드 마지막 장, 질문과 답변 시간이다. 불이 켜지고 나는 눈을 조금 찡그리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질문 있나요 ”
머뭇거리는 시간은 잠시, 강의 내내 야무지게 내용을 정리했음이 분명한 여학생이 포문을 열자 다음은 강의 내용부터 K건설에 대한 것까지 질문의 파도였다. 학과장님이 시각을 확인하며 자리를 마무리하자 아쉬운 한숨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피식 웃음이 나서 ‘다음에 또 봅시다’ 별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인사까지 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학과장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도서관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음이 바빴다. 다음 일정까지 움직이려면 시간이 빠듯했지만 과사무실 앞 복도에서 노교수님께 붙잡혀 또 인사를 하느라 발이 묶였다. 오가던 학생들이 꾸벅 교수님께 절을 하고 내게도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학생들의 발소리 말소리가 웡웡 울리며 복도를 채웠다. 교수님께서는 반가운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내게는 기억이 가물거리는 강의명을 언급하셨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그 시절의 기억은 대체로 희미하다.
“그러니까 벌써 몇 해 전이야. 자네가 복학하고 내 강의 들었지. 그때도 회사 다니면서도 수업은 꼭 나오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참 놀랍도록 기특했지. 요즘도 성실하게 일 잘하나 K건설은 현건일 군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싶네만.”
한눈을 팔 틈 없이 바빴던 학기였다. 차라리 군대가 열 배는 편했다. 말단 직원으로 K건설에 들어가 하루 종일 과도한 관심과 관찰을 당하며 일해야 했고, 업무를 마치면 매일 밤 회장 앞에 서서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했다. 몰라도 죄, 알아도 죄. 잠시라도 느슨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현건일이 속한 과장부터 부장, 이사까지 회장에게 무섭도록 질책당했다. 교수님 기억은 다소 미화가 있겠지만, 그 시절 정신 상태라면 수업도 군대 정신으로 임하였을 것이다. 회사 일도 바쁠 텐데 학교에도 도움을 주고 고맙다는 칭찬이 거듭되어 민망함을 감추려 흘끗 옆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앞으로 남학생 두 명이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내어 과사무실 벽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왜 자꾸 떨어지냐. 벌써 너덜거리네. 좀 여러 개 붙여 봐.”
한쪽 귀퉁이가 완전히 떨어져 반을 가리고 있던 대자보를 고정하자 커다랗게 쓴 글자가 제대로 보였다.
‘대동세건 열혈서사’
문구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자식들, 창의력이 없어. 교수님께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하고 몇 발 걷다 말고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대자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누덕누덕 테이프질을 하던 녀석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꾸벅 머리를 숙이며 특강을 들었노라 작게 설명을 덧붙였다. 대자보만 노려보고 서 있는 모양새가 어색했는지 주저주저하며 한 녀석이 다가왔다.
“이거, 방금 자판기에서 뽑았거든요. 아직 시원한데 혹시 목마르시면…….”
다가오던 학생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는 캔 음료를 보면서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계집애. 여태 입 다물고 있었다니. 느닷없는 웃음에 무안해졌는지 어린 남학생은 캔 음료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손을 내밀어 콜라 캔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신입생이야 ”
“네.”
“열심이네. 신입생이 특강도 듣고, 학과 일도 하고.”
“감사합니다.”
꾸벅 절을 하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 문구.”
“네 ”
“대동세건 열혈서사.”
“아, 네.”
“나도 선배한테 들어서 썼던 거거든.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네.”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수선스런 반응이 고스란히 들려온다.
‘와와, 봤지, 봤지 내가 준 음료수를 받았어. 오 예! 내 이름을 새겨줄 것을.’
뚫어지게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들도 느껴진다.
지워진 기억이 뭉텅뭉텅 떠오른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인문관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대동세건 열혈서사. 작고 마르고 꼭 어린아이 같은 여자애 뒷모습이 보이고, 애를 쓰며 매달고 있던 현수막이 어른거린다. 어쩐지 신경이 자꾸만 쓰여 돌아보니 여자애는 기우뚱 의자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의자에서 내려오라 내미는 손을 잡으며 목까지 발갛게 달아올랐지. 귀여워라. 잠시 속으로 웃고, 현수막을 고쳐 달아주고 실없이 질문하고 농담을 건넸다. 자그마한 여자는 웃기는커녕 바짝 얼어버렸다. 당황하며 변명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크게 웃음이 터지고, 웃는 나를 보며 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어릿한 신입생 이름을 물어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대신 내 이름을 알려주었더랬다. 이름을 듣고서도 몇 학번이세요 물어보지도 않더니, 한참 지나서야 여자애는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와서 캔커피를 내밀었다. 얼결에 먹지도 않을 캔커피를 받아들고는 고맙다 인사도 하기 전에 도망치듯 달아나는 뒷모습을 멀뚱하게 보았다. 옆에 서 있던 동하가 했던 말도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아니, 저렇게 쏜살같이 달려가다니. 예쁘던데. 누구야 ’
‘우리과 신입생.’
‘오호 이름이 뭔데 ’
‘몰라.’
‘모르는데 이걸 왜 줘 너 좋아하나 보다 ’
‘아니야, 처음 본 애야. 뭘 좀 도와줬더니.’
‘이거 안 마실 거지 나 줘. 목말라.’
‘싫어.’
가방을 벌려 캔커피를 넣어버리자, 동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왜, 예쁜 후배가 준거라서 ’
‘예쁘기는. 모자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하긴, 그래도 분위기란 게 있잖아. 예뻐. 분명해.’
동하 이 자식. 지난봄, 캔커피를 쥐어주며 주정 부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뭐야, 언제부터야. 다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거야. 따지기도 물어보기도 창피하다. 어떻게 그렇게나 까마득히 잊어버렸나.
‘어, 캔커피다.’
노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던 마지막 학기,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걸음을 옮길 때 동하가 두어 번 귓속말을 하였다.
‘응 ’
‘저기.’
비슷비슷한 여자들 틈에서 동하가 짚어내는 여자애는 캔커피가 맞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심미안을 자랑하는 동하는 확신을 했지만, 확인을 하려 두 번 쳐다볼 시간도 없을 만큼 마음이 바빴다.
인문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마주하였다.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왔던 날, 어느 여학생이 ‘선배님’ 하고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불렀다. 회사의 호출 때문에 기말고사 답안을 간신히 몰아 쓰고 나오는 길이었다. 성마르게 닦달하는 회장의 전화를 연이어 받으며,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뒤통수로 느껴지는 시선을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인문관을 다 빠져나오고 나서야 지금 이 나무 아래 멈춰 서서 혹시 캔커피인가, 잠시 갸웃거렸을 뿐이다. 다시 가서 확인해볼까,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하얗고 동그란 얼굴, 차분하고 화사한 미소가 마음을 끌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담고 있던 건 분명히 막막한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망설임이었다. 캔커피가 맞나, 혹시 날 기다렸나, 할 말이 있었던 건가. 충동적으로 인문관으로 다시 들어갔지만, 계단을 오르기 전에 한번 더 회장실 호출을 받았다. 회사로 급히 가는 동안 아무래도 그 여학생은 사람을 잘못 본 것이 분명하다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에겐 말 못 하니까요. 몇 달간 그 사람 뒤를 그림자처럼 밟은 적도 있어요. 혹시나 쳐다봐줄까, 옆을 뒤를 멀찍이서 맴돌았는데, 한 번 봐주지 않더라고요. 그 사람은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에 그런 마음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을 거예요.’
따스한 몸을 기대고서 조용조용 이어가던 시은의 안타까운 고백이 떠오른다.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얼굴도 떠오른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벤치에서 일어나 도서관 공사 현장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연애 스토리를 만들어야지. 언제 어떻게 만났다고 할까.’
‘학교 캠퍼스에서요.’
‘나랑 너랑 캠퍼스에서 만날 수가 있나. 같이 다닌 시기가 없을 텐데. 난 학교는 그 뒤로 가본 적이 없어.’
‘마지막 학기가 몇 년도세요 ’
‘회사 들어온 해니까 **년 1학기만 다녔어.’
‘저도 그해에 학교 다녔어요.’
‘잘됐군.’
도서관 신축 공사 현장에서 소장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줄곧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정시은이 맞을까, 그럼 정말 시은이가 날 좋아했던가 언제부터, 처음부터,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설마, 그럴 리가.
‘그 학기에 6학점인가 들었어. 학교 가는 날이 별로 없었어.’
‘그래서 교내에서 아무도 사귀는지 몰랐고요. 저는 그때 만나는 사람 없었고, 친구에게 시시콜콜 누굴 만난다고 연애담을 털어놓는 성격도 아니에요.’
‘완벽하네. 난 공식적으로 여자는 쭉 없었어.’
‘……네.’
‘그러면, 캠퍼스에서 내가 첫눈에 반한 걸로……. 너는, 부담스러워서 좀 피하다가 결국 사귄 걸로 해. 됐지 나머지는 대충 만들어서 보고해.’
‘아니요. 저도 첫눈에 반했어요.’
결연하게 말해 놓고선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버리던 시은이 떠오른다.
‘저는 누군지 모르고……, 우연히 선배님 보고서 반했던 거예요.’
지독한 여자. 어떻게나 이렇게 철저하게 속이나. 후우, 한숨을 쉬고, 고개를 흔들고 미간을 문지르며 자책한다.
‘난, 다정한 남자가 좋아요.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좋아.’
‘그런 모호한 기준이라니, 그게 어떤 남잔데.’
‘생전 모르는 사람인데도 길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와주는 남자요. 그렇게 다정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좋아.’
‘그러시든가.’
목덜미에 묻어나던 뜨거운 눈물이 생생하다. 시은이 말했는데, 여러 번 말해줬는데, 내가 등신이라 몰랐던 거다. 당장에라도 시은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장님.”
“네, 사장님.”
설계도면을 들고서 열심히 설명하는 소장의 말을 자르면서 물었다.
“다 좋은데, 이 정도쯤에 벤치를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
“아, 어디 말씀이신지. 건물 뒤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네, 도서관 뒤쪽으로 은행나무도 심고, 아래에 벤치도 두면 좋겠습니다.”
예산에야 없지만, 물주가 비용을 댄다는데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원하게 답을 하는 소장에게 덧붙였다.
“꼭 노란색 벤치로 해주십시오.”
“네 ”
소장은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표정을 수습하는 소장에게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내놓았다.
“노란색이 학업 능률을 올리는 데 좋다고 합니다. 외관을 노란색으로 못 하지만 벤치 정도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
소장은 내 얼굴과 벤치가 설치될 장소, 지어 올리기 시작하는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노란색 벤치를 배치한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느라 심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소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나는요, 당신을 사랑, 해요.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깊이. 처음부터 줄곧, 그랬어요. 당신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가지고 싶었어. 아마 당신을 조금만 덜 좋아한다면 난 이대로 얼마든지 지낼 거예요. 구두를 닦아주고 밥만 해줘도 좋아. 하지만 이렇게 다 엉망으로 만든 건 내 욕심이에요. 더 망치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은 내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아아, 나 표현력이 너무 나빠요. 알죠 ’
시은의 목소리가 가슴을 친다. 내 잘못이다. 알아보지 못하고 알려줘도 알지 못하고 내내 사랑을 의심했더랬다. 거짓 결혼을 하고, 돈을 주고,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수를 훼손했다.
집 앞 정원에서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는 아마릴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시은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려 몇 번이나 엎어버릴까 마음먹었지만, 결국 나는 내 정원에서 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너를 찾아갈 것이다. 어떤 철학을 내세워도, 내겐 단순하고 강력한 답이 있다. 사랑의 역사는 거짓이 아니다. 나의 부표를 향해, 정시은, 그저 곧바로 달려오면 그만이다.
*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섯!”
다섯 번째다. 처음부터 끝까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며 세어보기 놀이가. 시은은 나를 닮아 우리 아들이 다리도 길고 팔도 길다며 좋아했지만, 아직 영 짧은 다리다. 시험 기간이 지나 그런지 주말 캠퍼스는 한산하다.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응, 잘했어.”
여섯 번째로 엄지를 척 올려주었다. 엄지를 올려줄 때마다 아이는 까르르 소리내어 웃는다.
“노랑, 노랑, 노랑, 노랑, 노오랑!”
이번에는 색깔이구나. 애들은 모두 이렇게 단순 반복을 사랑하는 걸까. 눈이 마주치자 시은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맞아, 노랑. 우리 이제 좀 앉을까 ”
달랑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뒤뚱거리는 걸음에 넘어질까 맘 졸이며 따라다니는 일이 쉽지 않다.
“어머, 어머. 저 아기 좀 봐. 귀여워라.”
지나던 여학생들을 향해 우진이 생긋 웃어준다. 사내자식이 웃음이 헤프기도 하지.
“이리 와, 아빠 힘들어.”
시은이 팔을 벌렸지만, 일이 주 사이 부쩍 불러온 배 때문에 혼자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인다.
“괜찮아.”
내 다리 위에 앉아서도 아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누운, 코오, 입.”
침 묻힌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그림 삼아 쿡쿡 찔러 댄다.
“맞아. 우진이 눈, 우진이 코, 우진이 입. 우진이 귀. 그리고 우진이 목!”
목에 손을 대자 자지러지게 간지럼을 탄다.
“아빠, 아빠.”
“응.”
“아빠, 이건 뭐예요 ”
“흙.”
“이건 뭐예요 ”
“은행나무.”
“아빠, 아빠. 저건 뭐예요 ”
“도서관. 책도 빌려주고, 공부도 하는 곳. 멋지지 아빠가 지었어.”
잘난 척도 한번 해본다. 저 도서관 덕분에 네가 있는 거야, 그 말은 좀 더 컸을 때 해줄 테다.
“이건 뭐예요 ”
“개미네.”
아이는 통통하고 작은 손가락으로 개미를 잡으려 애를 쓴다. 그렇게 해서 잡힐 개미라면 멸종했을 테지. 나는 노란 벤치 위를 기어 다니는 까만색 개미를 손바닥에 올렸다.
“봐봐.”
개미는 재빠르게 손바닥을 벗어났지만, 그래 봤자 손등이다. 손등을 내밀자 시은이 미간을 찡그렸다.
“엄마는 싫대. 우리끼리 놀자.”
떨어진 은행나뭇잎으로 개미를 슬쩍 옮겨 놓았다.
“초록.”
아이가 은행나뭇잎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맞아. 가을 되면 노란색으로 바뀔 거야. 이 벤치 색깔처럼.”
시은을 슬쩍 옆눈으로 쳐다보자 무안한 미소를 짓는다.
“암만 봐도 촌스럽지.”
툭툭 벤치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왜요, 우진이도 좋아하는데.”
“놀이터 같으니까.”
“학생들도 좋아할 거예요. 놀이터 같아서.”
시은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답하였다.
“불편해 일어날까 ”
“조금, 걷고 싶어요.”
“응, 응. 그러자.”
아이를 한 팔로 안고 일어서서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일어나.”
“네.”
시은이 일어서며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어지러워 괜찮아 ”
“잠시. 괜찮아요. 이제.”
“차로 갈까 ”
“아니요, 좀 움직여야 좋대요.”
“이 녀석 때문에 하루 종일 움직일 텐데 뭘.”
산달이 되어가는데 아내는 배만 볼록 나왔지 얼굴과 팔다리는 야위었다 싶을 만큼 살이 오르지 않았다. 노르스름한 안색을 보니 괜스레 미안하다.
“다리는 좀 어때 ”
“이번 아로마 오일이 훨씬 잘 들어요. 붓기가 한결 나아졌어요.”
“그래, 집에 들어가서 또 마사지 해줄게.”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아내는 기대듯 내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겼다. 은행나무 아래 도서관 뒷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한 번씩 아내가 나를 불렀다.
“건일 씨.”
“응.”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내 이름을 다시 부른다.
“건일 씨.”
“응.”
“나, 정말 좋아요.”
“내가 ”
“……네.”
“새삼스레 뭘.”
“나는 매일 새삼스레 좋아요.”
“그래.”
“정말 좋아요.”
“응.”
잠시 멈춰 서서 아내의 옷깃을 여며주고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건일 씨.”
“응.”
손을 잡아 입을 맞추며 아내가 수줍게 고백한다.
나는 정말 현건일 당신이 좋아.
매일매일.
새롭게.
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