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6
#2015.
협의하다 (5)
“흐음?”
흑왕이 걸어 나오는 이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 사람이 없는 모양이로군.”
“이상한 일도 아니지. 여덟은 적은 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너무도 많은 수다.”
흑왕 쪽에 남은 십이비도의 수는 모두 여덟.
어떤 상황에서든 여덟이란 결코 많은 수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여덟이라는 숫자 앞에 초인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그 수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놓기에 충분할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과할 정도의 전력.
그들을 상대할 만한 전력을 모아 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전 세계 연합군?’
물론 그 이점은 있겠지.
하지만 이쪽은 무려 백 년에 걸쳐 모인 전력이다. 단기간에 모은 전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특히나 동수로는 말이다.
“버리는 카드로군.”
십이비도들이 영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승리란 좋은 것이다. 하지만 허무한 승리는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치열함 끝에 오는 패배보다 더 무가치했다.
“버리는 카드라…….”
그 말을 들은 흑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명환을 바라보았다.
“글쎄, 모르겠군.”
걸어 나오는 이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악취미군.’
흑왕에게 있어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만약 강진호가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강진호조차 그에게는 추억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과거란 그저 지금의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렇기에 흑왕은 굳이 마교를 다시 재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마교란 그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 그때는 마교였고, 지금은 흑왕계와 십이비도일 뿐이다.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쓸 수 있는 도구.
철저하게 몰락한 마교를 보고도 딱히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그가 인연을 맺은 이들은 이미 과거에 모두 죽었으니까.
하지만…….
흑왕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한다.
‘의외였지.’
마교라는 곳에 그보다 더 미련을 두지 않은 이가 강진호다. 흑왕에게 있어서 마교가 도구였다면, 강진호에게 있어서 마교란 그저 환경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강진호는 굳이 중국에 남은 마교의 잔당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 마교를 재건했다.
누구보다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면서도 때로는 누구보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인간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은 이들이 끊어져 버린 인연을 굳이 다시 이어 대다니.
그 마교가 강진호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모를까. 장민이면 몰라도 마교 자체는 강진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을 텐데.
흑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명환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기운.
과거, 강진호의 친위대들이 흘리던 기운을 이명환이 흘리고 있다.
철저하게 강진호만 따르던 이들. 심지어 그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강진호만을 맹목적으로 쫓던 이들의.
“흐음.”
흑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악취미군.”
이미 끝난 것에 미련을 가지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다. 인간은 과거를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 법이니까.
저자의 존재가 지금 강진호와 흑왕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귀편(鬼鞭).”
“예.”
“네가 상대해 줘라.”
“…….”
단천귀편(斷天鬼鞭) 악중산(岳中山)의 눈썹이 꿈틀댄다.
하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분부대로.”
“미안하군.”
“아닙니다, 흑왕이시여.”
검은 흑의를 입은 사내가 몸을 돌려 중앙으로 향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외모의 사내다. 그런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왼팔을 뱀처럼 친친 감은 검은 채찍의 존재였다.
저벅저벅.
중앙으로 걸어 나간 귀편이 이명환과 마주 선다.
그의 눈이 가만히 이명환을 응시했다.
솔직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저자가 버리는 카드라는 건 명확한 일이었으니까. 혼신의 힘을 다한 승부를 기대하던 와중에 적수가 되지 않는 이를 처리하고 돌아오란 명을 받았으니 힘이 빠질 만도 하다.
하지만 귀편은 이내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얼간이인가? 아니면…….’
저자도 자신의 힘이 이곳에 설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이곳의 수준이 과도하게 높을 뿐, 저자 역시 나이를 감안한다면 굉장한 수준의 무력을 보유했으니까.
‘어쩌면…….’
그들의 세상이 끝나고 나면 다음 대를 지배할 이는 이 젊은 무인일지도 모른다. 저 마왕이 굳이 이곳까지 데려온 젊은 무인이라면 분명 특별한 것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
지금 이곳에서 이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짐승들의 발밑에서 앞발을 세운 사마귀에 불과하다.
그래. 본인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저리도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가.
“악중산. 과거에는 단천귀편이라 불렸다. 흔히 귀편이라 부르지.”
“…….”
“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그게 마주 선 자에 대한 예의다.”
“……총회의 이명환.”
케케묵은 예의.
그 예의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낡은 게 자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하나 묻지.”
“얼마든지.”
“죽어도 상관없나?”
“…….”
귀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바로 이 점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다.
이 사내에게 무인계의 미래에 대한 의무감이 있을 리 없다.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설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저 마존이 명하니까 제 목숨을 걸고 이곳에 걸어 나왔을 터.
그런데도 이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십이비도 중 하나인 자신을 앞에다 두고도 말이다.
이명환이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귀편을 바라보았다.
“그쪽이야 워낙 오래 살았을 테니 사는 데 별 미련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하게 생각하면 죽어도 상관없는 인간 같은 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가라. 나는 적을 살려두는 사람이 아니다. 손을 섞기 전이라면 보내주겠다.”
“…….”
“여기까지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너는 네 용기를 증명했다. 아무도 너를 비겁하다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귀편이 싸늘한 눈으로 일갈했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돌아가라.”
그 말을 들은 이명환이 낮게 웃었다.
이명환이 짓는 웃음을 본 귀편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뭐가 우습지?”
“아니요……. 비웃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나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걸 실감해서 말입니다.”
“다르다?”
“예.”
이명환이 진득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렇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군.”
“그럴 겁니다, 분명히.”
이명환이 귀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이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알 필요도 없다. 저 몸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느껴지니까. 이 사람은 태생적인 강자다. 강해지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사람.
“한 번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뒤처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
“지금 당장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일 뿐, 스스로의 재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겠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명환이 낮게 웃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신에게는 이 자리에 서는 것조차 당연하디당연한 일이니까요. 지금 이곳에서 돌아 들어가도 언젠가는 이곳에 다시 설 수 있는 이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귀편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이명환의 사고방식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당신들에게 강해진다는 건 숨 쉬듯 당연한 거겠죠. 그러니 강함 그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명환의 웃음이 더욱 진득해졌다.
“내게 강함이라는 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 단번에 익혀내는 것도 나는 천 번을 반복하고, 만 번을 고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늘을 날 때, 바닥을 기어 따라가는 이도 있는 법이죠.”
“…….”
“그렇게 아득바득 기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 자리에 설 기회를 손에 넣은 겁니다. 분에 넘치는…… 너무 과분해서 몸이 떨릴 기회를.”
강해지고 싶었다.
최고가 되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시작할 때는 최고를 꿈꾼다. 하지만 재능과 현실이라는 벽 앞에 막히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속이게 된다.
애초부터 최고의 자리는 노린 적도 없다고, 자신은 현실주의자라고 말이다.
이명환은, 그리고 마염들은…….
자신을 속이기를 포기한 이들이다.
기어서라도, 물어뜯어서라도, 어떤 굴욕을 겪더라도 더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온 이들.
“죽는 게 두렵냐고 했습니까?”
이명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미치도록 두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는 게 그보다 백 배는 더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배려는 그쯤 해주시죠. 제게 해줄 수 있는 진짜 배려는 나를 무시하지 않고 싸우는 겁니다.”
“……마존이 네게 그런 존재라는 건가?”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제가 지금 이곳에서 항복하고 내려가도 회주님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되레 어깨를 두드려 주시겠죠.”
“…….”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는 무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요?”
귀편의 입에서 낮은 숨이 흘러나온다.
모르겠다.
이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군.’
왜 저 강진호가 다른 이들을 두고 굳이 이자를 불러왔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기억해라, 악중산이라는 이름을.”
“…….”
“저승에 가 염왕에게 내 이름을 댄다면, 적어도 억울하지 않았다는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거…… 꽤 영광이군요.”
촤르르륵.
귀편의 팔을 감고 있던 채찍이 단숨에 풀려 나온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장편(長鞭).
길이가 5미터는 될 듯한 긴 채찍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머리를 들고 요동친다.
그 광경을 본 이명환이 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그의 두 눈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고,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스스로를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실낱같은 이성을 남기는 이유는 정교함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 승부의 순간을 반드시 기억하기 위함이다.
‘지켜봐라.’
중계가 되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쯤 총회의 다른 동기들도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우려할 것이고, 누군가는 걱정하겠지.
안다.
그는 마염 중 가장 강한 이는 아니다. 그러니 그도 자신이 이곳에 설 자격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적어도 그가 다른 이들을 대표해 이곳에 섰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미련 한 점 남기지 않는다.’
두 눈에서 혈광을 줄기줄기 뿜어낸 이명환이 한 줄기 검은 유성이 되어 귀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커다란 격납고를 쩌렁쩌렁 울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