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544
#543.
응집하다 (3)
서울에서 조금 벗어나 외각지로 접어들다 보면 인적이 드문 국도가 꽤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살지도 않고, 오가는 차도 많지 않은 이런 곳에 꽤 고급스런 건물들이 몇몇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모임을 가지고 싶은 고위층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각지의 음식점을 이용하고는 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간임에도 인적 드문 국도가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이루어진 강은 아래로 향하지 않고 역류하듯 산 위로, 또 위로 향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강이 향한 곳은 국도에서도 한참 올라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고풍스러운 기와집이었다. 아니, 기와집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대궐’이라는 표현이 적당해 보이는 곳이다.
그 커다란 대문 앞으로 검은색 세단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들이 눈치 빠르게 주차를 도와주었고, 상석에 앉은 이들은 차량에서 내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 작게 나 있는 돌길을 따라 안쪽으로, 또 안쪽으로 향한 이들이 가장 안쪽에 있는 별채로 접어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문을 열어주자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오느라 고생하셨소이다.”
“음…….”
이중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는 이미 거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고, 그 술상에 많은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쪽으로.”
비워져 있는 상석으로 유도하는 손길이 있었다.
거부할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이중걸은 안내하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상석으로 향했다. 상석에 앉으니 도착해 있던 이들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많군.’
그가 총회의 회주로 있던 시절, 회의를 하면 항상 이런 시야였다. 그를 올려다보는 이들, 그리고 살짝 어려 있는 경계와 존경의 시선.
이제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중걸이 살짝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도 속속들이 사람들이 도착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비어 있던 자리가 모두 채워지고 조금 시간이 더 흐르고 나자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올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습니다.”
이중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를 뭐라 칭해야 할지 모르겠군.”
어색한 웃음이 흘렀다.
과거였다면 이 자리는 총회의 정기 회합이나 회의라고 칭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총회라는 이름으로 회의를 소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가 여기에는 없었다.
“무슨 자리인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간만에 이렇게 다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지요.”
이중걸은 쓰게 웃었다.
다들 친목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 의도는 그게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중걸은 이 회합을 칭할 수 있는 꽤나 적절한 단어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역적모의겠지.’
입가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밀어 삼켰다.
말이 거의 돌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저 얼굴을 보고 친분을 나누기 위한 자리라면 지금쯤 수도 없는 말이 오갔어야 할 텐데, 다들 서로의 시선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일단은 좀 듭시다. 시장하실 텐데.”
말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은 분위기였다. 적당히 술과 음식을 먹다 보면 긴장이 풀리기 마련이고, 그때부터는 말이 술술 나올 것이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술자리에 빠질 수 없는 옛이야기가 몇 차레나 나오고 나서야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본디 하고픈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
살짝 달뜬 분위기가 어색함을 씻어주었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침묵이 제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술기운이 그 위를 뒤덮는다.
“그랬지요. 예전에는 그래도 다들 정이 있고, 대의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영남회만 해도 그래요. 우리가 그놈들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습니까? 제 친구도 그놈들 손에 죽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 몸이니 어쩌니 하면서 그놈들이 총회를 누비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열불이 터져서 못 살겠습니다.”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꾹꾹 눌러놓은 불만은 봇물이 터진 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저들이 총회를 위해서 한 게 무엇이 있습니까!”
“일이야 우리가 다 했죠. 그 서슬 퍼런 시대를 누가 이끌어왔는데!”
“방 회주야 그렇다 칩시다. 젊은 피 좋다, 이거예요. 누가 뭐랍니까. 그런데 오른팔이랍시고 끼고 있는 놈이 영남회 놈이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 영남회 놈이 뭘 안다고 총회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전체 회의가 없어진 지가 한참 됐습니다. 아무리 총회가 회주를 믿고 가는 곳이라고는 해도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적어도 이사들과 장로들의 의견을 수렴하려는 의지가 있었단 말입니다. 방 회주가 이사 시절에 그리 날뛸 수 있던 이유도 전 회주께서 그 권한을 인정해 주셨기 때문 아닙니까!”
“암요! 그렇고 말구요!”
이중걸은 얼굴 위로 떠오른 쓴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양로원 같군.’
과거에는 이들이 총회를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이중걸이 보기에도 이들은 늙었다. 이미 과거를 논하기 시작했으니까. 젊은이는 과거를 논하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이 취한 자는 이미 죽은 자다.
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이런 늙은이들이라는 것이 영 껄끄럽지만, 이 늙은이들이 아니면 그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었다.
‘방진훈이 내 예상 이상이었어.’
그 독불장군과 같은 성격이라면 곧 문제가 크게 생길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회주가 된 방진훈은 지금까지의 강경 노선을 버리고 유화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토록 적대적이던 영남회를 총회와 다름없이 대했고, 이현수를 중용하면서 영남회와 총회의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말이 그저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
덕분에 초반에는 서로 적의를 보이던 영남부와 총회가 서로 융화되고 있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말이다.
‘의외로 잘 이끌어가고 있지.’
경험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문제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세대 교체는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지.’
지금처럼 급진적으로 세대 교체를 단행해 버리면 반드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된다.
더구나 이들은 무인이다.
무인은 일반인들보다 수명이 길고, 전성기가 길기 마련이다. 일반인이라면 은퇴해야 할 일흔의 나이에도 쌩쌩하기 짝이 없다. 그런 이들을 적당한 당근도 없이 뒷방으로 밀어내려 했으니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게 당연한 것이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사 중 하나가 얼굴을 붉힌 채 토해내듯 말했다.
“총회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 외국인들은 뭡니까? 언제부터 총회가 이런 잡탕찌개가 되었냐, 이 말입니다!”
“여긴 한국 무도 총회예요. 한국 무도 총회라구요! 여기가 언제부터 국제 무도 총회가 되었습니까. 좋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외국인들도 들락거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럼 그걸로 끝내야지. 뭐 어쩐다구요? 가르쳐? 그런 이들이 애들을 가르친다고 돌아다니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외국인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총회 내에서 마공이 전파되고 있지 않습니까?”
“뭐라구요?”
“모르셨습니까? 마공입니다. 지금 방 회주의 승인하에 젊은 무인들에게 마공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저주받은 무학을 애들에게 가르친다구요? 방 회주가 미친 겁니까?”
“……뭐, 그래도 머리가 있는 사람인데, 그런 마공이기야 하겠습니까. 뭔가 다른 게 있겠지요.”
“이게 그냥 다르다고 끝날 일입니까! 마공입니다! 마공이라구요!”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중걸은 알고 있었다.
‘입만 산 것들.’
이들이 정말 방 회주에게 반기를 들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곳에서 쑥덕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이미 일을 벌였겠지.
그게 안 되니까 쥐새끼처럼 이곳으로 모여든 것이다. 개는 아무리 모여도 개다. 절대 늑대가 될 수 없다. 이들이 늑대 무리였다면, 이미 느슨해진 총회를 모조리 물어뜯었을 것이다.
‘개는 개일 뿐이지.’
개와 늑대의 차이는 극명하다. 늑대는 자기들끼리도 무리를 지어 살아남을 줄 알지만, 개는 지시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설프게 뭉친 들개 무리 따위는 늑대 한 마리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흠…….”
이중걸이 가만히 목소리를 내자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직 자신의 위엄이 통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이중걸이지만, 굳이 그런 티를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불만이 많다는 건 알겠소이다. 다들 그렇다는 것도.”
“예, 전 회주님.”
“왜 안 그렇겠습니까.”
이중걸의 호칭이 이사에서 전 회주로 은근슬쩍 격상되어 있었다. 이중걸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전 회주’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불편함을 보인 이들이 누군지도 말이다.
정치의 기본은 아군과 적군을 가르는 것이다. 그리고 노련한 정치가는 지금은 아군이지만 나중에는 적군이 될 사람도 구분한다.
그리고 최고의 정치가는 아군을 만들지 않는다.
모두가 적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도 지금이야 이유가 있어서 그를 따르는 것일 뿐, 이중걸에게 힘이 없다고 판단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방 회주에게 알려 점수를 따려 할 것이다.
이중걸이 혀를 내밀어 말라 버린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뭐 어찌하겠습니까?”
“회주님?”
“결국 그 강진호를 꺾지 못하면 방법이 없는 것을요.”
강진호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장내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여기저기서 사레라도 걸린 듯한 헛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못난 것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를 자랑하던 이들이 꼬리 내린 개처럼 다른 이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지만, 이중걸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적어도 욕할 일은 아니다.
그날.
강진호가 단신으로 영남회로 뛰어든 그날, 그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여기 있는 모두가 보았다.
이중걸조차 생각하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크흐흐흠.”
어색한 헛기침 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상대가 방진훈이었다면 이야기가 급진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방진훈이 아닌 강진호로 가정하는 순간, 이야기는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알기로 방진훈은 강진호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였다. 다시 말하자면 방진훈은 강진호의 비호 아래 있다는 것이다. 방진훈을 몰아내고 그들의 위상을 되찾으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강진호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을 깨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말해줬으면 하는 그 말이 결국은 흘러나오고 말았다.
“우리가 강진호를 상대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