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avior of a Perish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아포피스 (4)
정세림의 사무실은 B동 21층에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1층의 절반 정도가 정세림과 그녀의 직원들이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한참 청영 길드를 키울 때, 세림이 덕을 많이 보긴 했지.]‘그걸 자랑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치만 화양 그룹인데? 이 건물 정 회장이 지어 준 거란 말이다.]‘와, 통도 크다.’
김도진의 제자가 됐다고 옆에 건물을 하나 지어 줘? 와, 이건 못 참긴 한다. 확실히 B동이 A동에 비해 세련된 것도 화양 그룹의 손을 타서 그런 듯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안타깝게도 21층 안쪽에까지 들어갈 순 없었다. 복도 한가운데 커다랗게 막혀 있는 문을 두고, 옆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그 응접실도 더럽게 넓었다. 차우재 사무실의 두세 배는 되는 넓이에 벽에는 딱 봐도 고가의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고급스러운 원목 탁자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세림이 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데다가, 동안이었다.
뉴스에 찍혀 있는 사진보다 더 동안이다. 아무튼 차림새도 생각보다 훨씬 더 평범했다.
“그냥 편하게 있어.”
내가 일어나려 하자 정세림이 신경 쓰지 말라며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나랑 똑같은 길드 카페에서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밖에서 봤다면, 지나가다가 봤을 법한 대학생 1처럼 생겼다.
[말했잖냐, 그냥 애라니까? …잘 지내는 모양이다만.]스승님이 다소 씁쓸한 얼굴로 정세림을 보았다. 차우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하기야, 제자들 중에서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별개로 얼마나 반갑겠는가.
지금의 차우재는, 정세림은 스승님이 모르는 제자들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언젠가 만나게 해 드릴게요.
유령 따위로 엿보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속마음을 뒤로한 채 정세림을 보았다. 정세림이 아메리카노를 쭈욱쭈욱 빨아 마셨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얼마면 돼?”
“……네?”
이게 뭔 돈으로 뺨싸대기 때리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멍하니 있자 정세림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긴말 안 해. 얼마면 돼?”
이게 뭔 쌍팔년도 드라마 같은 소리지? 내가 멍하니 있자 정세림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희 말야, 같은 팀 하자고 또 달라붙었겠지.”
“맞아요.”
“근데 걘 뭘 하는데 술값으로 백오십을 쓴다니?”
“…….”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정서희가 맘껏 먹으라며 시켜 준 걸 먹은 죄밖에 없다구.
걔가 그렇게 대식가일 줄 알았나, 중간부터는 양주도 시켜서 마셨다. 짬뽕으로 마셔 대니 머리가 아프지.
정서희는 그걸 고스란히 정세림의 카드로 긁었고, 정세림에게 알림이 갔다.
“하아, 잘못 키웠어. 오냐오냐 받아 주는게 아니었는데…….”
정세림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 숨을 내 쉬었다. 생긴 건 직장 생활도 안 해 봤을 법한 순둥순둥한 얼굴로 저러니까 좀 어색하긴 했다.
“웬만하면 손 떼.”
“왜요?”
“그건 네가 알 거 없어. 그냥 적당히 핑계 대. 모의전에서 생각보다 실력이 별로다, 우린 안 맞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알아봐라…… 이런 거 있잖아.”
“정서희를 쫓아내는 대가로 원하는 만큼 돈을 주시겠다는 뜻인 거죠?”
“이해가 빨라서 좋네.”
“거절하겠습니다.”
솔직히 좀 끌리긴 한다. 정세림의 공수표라니? 어쩌면 굳이 개고생하면서 무기를 안 만들어도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기 대신 다른 뭔가를 얻을 수도 있겠지. 근데 좀 그렇거든.
나는 정서희가 나에게 했던 ‘정세림이 자신의 앞길을 막으려 한다.’라는 말이 뭔지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정서희와 팀을 하려는 녀석들을 매수한 모양이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거, 누가 재벌 집 공주님 아니랄까 봐 시작부터 사람을 돈으로 매수합니까? 그야 제가 돈이 궁한 사람이 맞긴 한데.”
“그럼 왜 거절하는 건데? 혹시 그사이에 서희에게 호감이라도 생겼어? 분명히 말하는데, 너 걔랑 만나면 머리에 총 박을 거야. 진짜로.”
정서희가 살벌한 눈을 하며 나를 노려봤다. 사촌인 건 알겠는데 너무 챙기잖아. 일단 이건 오해다.
“걔가 제 옷에 얼마나 토하고 난리 쳤는지 알면 호감이 생긴다는 소리 하면 안 되죠. 그건 그냥 민폐지.”
진짜 민폐였다니까? 내가 걔 택시 태워서 집에 보내는데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호감은 무슨.
정세림의 제안에 끌리지 않으면 바보다. 근데 반대로 정서희도 그렇거든.
“4성. 걔가 그러더라구요. 사촌 언니가 자신에게 그어 놓은 한계라고.”
“그만큼 했으면 알아먹어야지.”
“왜 남의 한계를 세림 씨가 함부로 결정합니까?”
반복 회귀를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19레벨.
내가 20레벨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반복 회귀에서 벗어나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근데 넘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되묻자, 정세림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이지 말아 줄래?”
“그게 중요하진 않은 거 같은데요.”
정세림과 정서희의 사연? 관심 없다. 다만, 정세림이 나를 왜 불러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정서희에게 달라붙었던 녀석들을 일일이 다 정세림이 만났을까?’
답은 당연히 NO다.
그중에서도 좀 위험하거나, 이놈은 내가 만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되겠구나 싶은 녀석들만 부른 거다.
대부분은 부하 선에서 해결됐겠지. 해결의 방법이야 안 봐도 뻔하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대뜸 가서, 백지 수표 건네면서 ‘정서희와 팀을 하지 않으면 이 돈을 주겠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흔한 협박이 먹히는구나 싶긴 하지만 의외로 돈은 만능이다.
그리고 대부분 처음에는 점잔을 빼다가도, 액수를 들으면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며 입을 싹 닫았을 거다.
나?
아마 정세림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 찾아와서 그런 짓을 했으면 무시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정세림이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불러낸 건 현명하다. 적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는 거니까.
근데 딱 거기까지.
“절 따로 불렀다는 건, 제가 누구 줄 잡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백지 수표가 아니라 더 좋은 걸 가지고 와야 하지 않겠어요?”
정세림이 컵 뚜껑을 열어 얼음을 입에 넣었다. 으득으득 씹어 먹는 소리가 왜 이렇게 살벌한지 모르겠다.
내가 정세림 앞에서 배짱을 부리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오연수.’
정서희가 나를 찌른 건 오연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 오연수를 찌른 게 누군지는 알 만하지.
정세림이 바보가 아니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우우웅.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정서희였다. 일단 수신 거부를 하자, 곧장 어디냐는 연락이 날아왔다.
약속 시각도 안 지킨 놈이 나한테 뭐래.
“그리고 저도 아직 정서희 씨랑 팀 할지 말지 고민 중입니다. 실력이 별로면 말 안 해도 팀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세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가 이내 닫혔다. 컵 안에 얼음이 없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오라는 거지?”
“네.”
“하, 나한테 그런 소릴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인걸?”
“……그 발언 좀 위험한 것 같은데.”
뭐야, 무서워.
나한테 이러는 건 네가 처음이야! 하면서 호감을 보일 것만 같잖아. 그럴 린 없긴 하지만.
정세림은 내 쪽에서도 절대 사양이다. 세기의 사랑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하는 거고!
“방금 그 전화 서희지?”
“맞아요.”
“가 봐, 기다리고 있는 거 알면 걔 또 뒤집어질걸.”
“자기가 늦은 건 생각 안 하고 말이죠. 어쨌든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응접실을 나왔다. 너무 들이받았나 싶긴 한데, 어쩌겠는가.
‘근데 정서희도 성인이잖아.’
만약 문제가 생기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너도 참 무대포다. 밉보이면 어쩌려고 그러냐?]‘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근데 저 진짜 정서희 실력 별로면 팀 안 할 거예요.’
[그 반대는 생각 안 하지?]‘네?’
[정세림이 싸고도는 이유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재능이 많아서일 가능성도 있지.]‘스승님은 정서희에 대해 아는 거 없어요?’
[고등학교 때 세림이 뒤 졸졸 따라다닌 것밖에 못 봤는데?]‘젠장.’
[…걔 부모가 세림이 실수로 죽었다는 거랑.]A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구름다리를 건너던 내 걸음이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 같은데?
[그러니까 정세림이 서희를 싸도는 건 죄책감 때문인 거지.]‘뭔가 막을 수 있었던 일 아닙니까?’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회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스승님의 삶이 다 똑같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스승님의 제자는 늘 일곱 명이었던 것처럼.
내 기억상 단 한 번도 여섯 명이었던 적이 없다. 그 일처럼 정서희의 부모는 어떤 식으로든 죽었다고 한다.
‘씁쓸하네요.’
오늘따라 유독 스승님의 말이 마음속에 와닿았다.
일어날 일은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기 마련이라면, 그건 나에게도 해당이 될까?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필연적으로 그런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야! 빨리 오라고 재촉할 때는 언제고 혼자 뭐 하는 짓이야!”
구름다리 건너편에서 나를 발견한 정서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화가 난 건 그렇다 치고, 마치 내가 정세림에게 불려갔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지각한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나, 난 분명 깨워 달라고 했어…!”
“똑바로 말한 거 맞아? 내가 전화했을 때 받은 사람은 모르는 눈치였는데.”
“술기운에 말한 거라 잘……. 아무튼.”
정서희가 구름다리 건너편을 흘끔흘끔 바라봤다.
“저녁 사.”
“갑자기?”
“누구 때문에 이거 끝나면 저녁이잖냐? 아쉬우면 친구비라도 내라고.”
“친구라니…….”
“정세림이 나 부르더라.”
내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자 정서희가 움찔거렸다.
“얼마 받았어? 하아, 그럴 줄 알았어. 대체 왜……”
“안 받았으니까 진정하고.”
“진짜로?”
“혹시 몰라,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을 주면 생각해 볼지도… 농담이다.”
장난치려고 했는데 더 말하면 울 것 같아 보여 그만뒀다.
“좀 그렇잖냐.”
“……뭐가?”
“스스로가 여기까지라며 한계를 짓는 거랑, 나는 더 올라갈 수 있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앞길이 막히는 거랑은 다르잖아. 전자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후자는 그렇지. 그래서 거절한 거뿐이고.”
“너 진짜 이상하다. 내가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정서희가 정말 4성짜리 각성자였으면, 4성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