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652
#651.
질주하다 (1)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조규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에 앉는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이현수를 볼 때마다 조규민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진호의 주변을 채운 이들 중 조규민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바로 이현수였다. 하는 일도 그렇고, 스타일도 그렇고.
처음 봤을 때부터 같은 부류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맡고 있는 일이 달라서 그동안은 왕래가 없었지만, 이번 강진호의 중국행을 두고 처음으로 따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자리를 만들었다.
“언제 한 번은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연락을 주셨네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서로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예의는 접어둡시다.”
“하하…….”
이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
빤한 관용어구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현수는 나름 무인이다. 체력에 있어서는 일반인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정말 과로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일을 했다.
‘뼈저리게 느꼈지.’
이번 일을 하면서 깨달았다. 과거, 그와 김석일이 함께 일을 할 때는 견제를 해주는 이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일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그 견제가 지금은 그립기까지 하다.
‘내가 알았나.’
강진호와 이현수의 시너지는 엄청났다. 이현수가 계획을 입안하면, 강진호가 불도저처럼 들이밀어서 모든 일을 해결해 버린다. 문제는 그 속도가 이현수의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는 거다.
시원시원하게 일을 해결할 때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뒷수습과 모든 일처리가 이현수에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영남회의 두뇌라 불리던 시절,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일감에도 단 한 번도 과부하가 걸렸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이현수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지옥을 봤다.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한 이현수는 지금 총회에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제동장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멈추질 않는 그와 강진호를 막을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면 적어도 그가 지금 과한 일을 하고 있는지 상담을 할 사람이라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적임자다.’
이현수의 시선이 조규민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여기 적임자가 있다.
이현수가 파악하기로 강진호의 주변은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강진호에게 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총회 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총회와 관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가 강진호에게 억눌려 있었다.
강진호가 다짜고짜 액셀을 밟았을 때, ‘아이고, 기사님. 그렇게 과속하시면 다 죽습니다!’를 외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현수가 찾아야 할 사람의 조건은 간단했다.
총회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면서 강진호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적임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기이한 포지션이지.’
조규민은 강진호에게 빚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되레 강진호를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딱히 강진호에게 크게 받은 게 없는 사람이다. 강진호와 엮여서 인생이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그걸 은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유일하게 강진호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안 그래도 먼저 연락을 해서 접촉을 가져 볼까 했는데, 조규민 쪽에서 먼저 찾아줄 줄이야.
“커피부터 시킬까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뭘 드실까요?”
“아뇨, 아뇨. 제가 사야죠.”
별 필요 없는 실랑이가 오가고 나서야 이현수가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왔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서 진한 커피향이 흘러나오자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본론으로 갈까요?”
“좋습니다.”
이현수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시원시원한 느낌이 참 좋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했을 텐데, 핵심부터 찔러 들어오는 것이 바쁜 실무자라는 느낌이 났다.
“바쁘실 테니까요.”
이현수의 추임새에 조규민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좀 살 만합니다. 제일 바쁜 시기는 지나갔거든요.”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집에 들어가니까 뭔가 낯설더라구요.”
“키우던 화초가 말라 죽었습니다.”
“관리비가 이렇게 아까운 줄 몰랐어요. 집이라기보다는 의류 보관함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
“저는 집에 옷을 가져다놓으면 찾아 입지를 못해서 세탁소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생각보다 간편합니다.”
“아, 그래요?”
천하제일 노예 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보통의 노예 자랑은 내가 이만큼이나 힘들다는 허세가 섞이기 마련이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정말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강진호를 노동청에 고소한다면, 민사가 아니라 형사재판을 해야 할 것이다.
“일이 힘든 것까지는 참겠는데…….”
“중국…….”
“그렇죠.”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악덕 고용주 같으니.
일을 시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람에게 이만한 일을 떠넘겨 놓고는 태연하게 중국으로 여행을 가다니.
물론 강진호가 한국에 남아 있다고 해서 실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같이 일을 한다는 인상을 줘야 할 것 아닌가.
“요즘 느끼는 건데, 자기 개발서 하나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개발서요?”
조규민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 이렇게만 안 하면 성공한다’라는 제목으로.”
“……그거 꼭 읽고 싶네요. 될 수 있으면 공저하고 싶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조규민의 입에서 영혼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리더십의 기준이 같이 뛰는 리더십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이 옛날 사람 같으니!
그래도 눈앞에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 앉아 있으니 뭔가 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전우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쪽 일은 좀 어떻습니까?”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혼란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텐데……. 하나하나 잡아 나가고 있는 중이죠.”
“음…….”
조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모시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만약 불쾌하시지 않다면 저도 이제 그쪽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쪽 일만 처리하다 보니 이번 중국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확실히 그런 면이 있죠.”
조규민은 강진호를 일반 비자로 입국시키려 했다. 그것을 중간에 차단한 게 이현수였다. 조규민이 하려던 일을 이현수가 막았다고 해서 불만을 가지는 게 아니다. 강진호가 중국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조규민의 실책이니까.
앞으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사실 강진호 씨가 이런저런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건 알았지만…….”
조규민이 고소를 머금었다.
단순히 이런저런으로 퉁 치기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 크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 여파가 중국에도 미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은 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저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봐야 한국에서 권력 다툼이나 할 줄 알았지.
홍왕계고, 일본이고, 거기에 유럽까지 얽히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현수가 총회에 합류할 시점에는 그저 가능성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완벽한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딱히 뭔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모든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이현수는 강진호를 따랐을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르는 등산가처럼 말이다. 길이 이것 하나뿐인데, 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는가. 초야에 묻혀서 무인계 쪽은 쳐다도 안 보고 살 게 아니라면, 강진호를 피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는데, 일이 꼬여서 죽게 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냐 싶었지만, 지금은…….
“조심성을 조금만 가져 주시면 참 좋을 텐데.”
“그거 안 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봤는데, 그게 안 돼요.”
“…….”
“일단 눈에 뭐가 들어오면 해결부터 하고 봐야 해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양반이 말수가 좀 적어서 신중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당장 처리할 것 같은 일을 미뤄두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지독하게 처리할 방법을 찾는 거예요. 인간으로 따지자면, 뭐랄까…….”
“말종이죠.”
“네, 그거죠. 차마 말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원래 상사 욕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법 아니던가.
이대로 강진호에 대한 욕을 늘어놓으라고 하면 삼박 사일 동안 쉬지도 않을 자신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이현수의 살짝 어눌한 어투에 조규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했지만, 이제부터는 서로 교류를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보면 총회 내부 정보를 요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저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싶어서 먼저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민감한 문제였다.
“강진호 씨를 통해서 요구하면 되지 않나요?”
“제일 간편하고, 제일 바보 같은 방법이죠. 강진호 씨와 저 이외에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역시.”
이현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은 말이 통한다.
일을 너무 간단하게 처리하려다 보면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조규민은 적어도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의 공론화는 해드릴 수 있죠. 필요성을 납득한다면 다들 이해할 겁니다.”
“그렇게만 해주셔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조규민이 고개를 숙이려 하자 이현수가 만류했다.
“인사는 일단 제 이야기부터 듣고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조규민 씨에게 바라는 게, 조규민 씨가 제게 바라는 것보다 더 클 테니까요.”
“네?”
조규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현수가 딱히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없었다.
‘입장 차이가 있으니까.’
총회라는 곳은 알면 알수록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그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도 이 정도이니, 실제로는 그 몇 배는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준비 중인 재경이지만, 총회라는 어마어마한 단체에 감히 비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재경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의 수준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상장을 한 기업이 아니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가진바 영향력에서 재경은 감히 총회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현수는 총회의 서열을 따져도 최소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자다. 재경 내 서열 백 위권 안에도 들기 힘든 조규민이 감히 비벼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현수가 대체 자신에게 뭘 바란단 말인가.
조규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에 제게 바랄 게 있다구요?”
이현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