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55
#754.
결착하다 (4)
홍왕의 말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그는 위대한 무인이다. 그리고 위대한 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질이 말해주고 있다.
명문에서 태어나 상승의 무공을 익힌 자.
그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세상에 우뚝 선 자.
스스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강진호가 보기에 홍왕이 자란 곳은 온실일 뿐이다.
물론 온실 안에서 자랐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온실에서든 척박한 들판에서든, 드높고 넓게 자라났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온실 안에서 자란 자가 온실 밖의 일을 논하는 건 오만이다.
그가 사는 세상과 강진호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
다만 한 가지, 홍왕의 말이 강진호를 일깨워 준 점은 있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전투의 흥분 탓에 잊어버린 사실을 강진호는 다시 깨달았다. 적천마존이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홍왕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제 적천마존이 아니다.
강진호와 적천마존이 다른 점?
강진호는 고개를 돌렸다.
홍왕 같은 상대를 대적자로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린다는 건 위험하기 쩍이 없는 일이지만, 강진호는 마치 홍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장민.”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는 장민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예! 마존이시여!”
“움직여라.”
장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강진호는 그 말로 모든 명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홍왕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명령은 필요하지 않다.
애초에 그들이 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뿐이니까. 그가 해야 할 것은 이제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싸우는 것이다.
철걱.
적루와 청루가 맞부딪치며 묵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시작하자.”
“흠.”
홍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의 제안을 했다. 너무도 아깝고 아쉬워서. 그의 자존심과 원칙마저 꺾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도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이곳에서 마존의 숨을 끊어 혹시 모를 변수를 모두 차단하는 것이다.
“후회하게…… 아니, 아니다. 너는 후회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겠지. 그래, 내 손으로 네 명을 끊어주는 것이 네게 영광이 될 것이다.”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홍왕은 강진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강자의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아는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당당한 대장부인 홍왕에 비한다면, 강진호는 소인배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걸로 족하다, 그걸로.
“모두 달려라!”
장민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 위로 비 같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해했다.
왜 바토르가 그가 마존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말했는지. 그들이 홍왕의 발목을 잡는다는 계책이 왜 아무런 쓸모가 없는지.
마존의 눈빛을 보는 순간 이해했다.
마존은 그저 움직이라 명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명을 내리는 마존의 눈은 여전히 짐승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바토르의 말이 맞았다.
마존은 도망치지 않으신다. 그들이 피로 길을 열어도 그는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달아나야 한다.
애초에 목적이 그랬다. 무슨 고난이 있더라도 그들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 수많은 문제가 쌓이고 터져 휘몰아치는 전장 속에서 그들은 처음의 목적을 되찾았다.
“달려라!”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존의 명을 들은 장민이 단번에 마존의 명이 무엇인지 이해했듯이, 장민의 명을 들은 이들은 단번에 장민의 명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마존에 대한 충심.
홍왕에 대한 두려움.
생전 처음 보는 지옥 같은 전투에서 오는 황망함.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마인들을 이끈 것은 단 하나였다.
생존.
마인들의 욕망과 명령이 합치됐다. 그렇다면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헤~ 벌어진 입이 앙다물어진다.
부러진 팔로 바닥을 누르고, 무릎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킨다. 채 일어서지 못한 이들은 두 팔과 두 다리로 허우적대듯 앞으로 전진했다.
시작은 앞부터. 하지만 일순 그것은 물결이 되고, 흐름이 되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깨달은 마인들이 일순 들이친다.
바다로, 바다로.
누구도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여전히 넋이 빠져 있는 홍왕계의 무인들은 삶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전진하는 이들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그저 당황하여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
기세를 타고 달리기 시작한 마인들을 막을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을 들고 창을 들어 뛰어든다면, 저 광포한 기세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다.
“달려라! 달려! 바다로 가라! 모든 것은 마존의 뜻대로!”
장민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혼이 실려 있었다. 높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간절히 외치고 있는지는 모두에게 똑똑히 전해졌다. 그렇기에 달린다.
아군을 잡아끌고 머뭇대는 자를 짓밟으며 바다로 달린다. 선두에 선 자들이 다리가 부러져라 달리다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마존과 홍왕.
살아남는 것에 모든 것을 건 자들은 죽을 곳으로 들이치지 못했다. 광포하기 짝이 없어 결코 비틀 수 없을 것 같은 인(人)의 물결이 급격히 방향을 틀며 좌우로 갈라진다.
그러고는 뛰어든다. 바다로!
찢어진 상처로 소금물이 파고든다. 육체의 피로와 정신의 피로가 순식간에 체력을 앗아갔지만, 그들은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도 간다!”
장민이 바토르의 몸을 움켜잡았다.
“놔, 놔라! 영감!”
하지만 바토르는 자신을 잡는 장민을 밀어냈다.
간다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주인이 저곳에서 홍왕과 싸우고 있는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생의 난적을 맞아 강진호가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 바토르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주인과 적의 충돌에 부상을 입어 이리 신음하고 있다.
무인으로서, 초원의 전사로서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놔라! 영감! 나는 안 간다!”
“이 빌어먹을 놈이!”
장민이 바토르의 거대한 허리를 휘감았다. 그의 두 팔로 감히 모두 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그뿐, 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바토르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지경이다.
“간다!”
“놓으라고, 이 개자식아!”
바토르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 절절한 외침을 장민은 외면했다. 속이 썩어 들어가기로는 장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두를 죽일 수는 없다.
‘발목 잡기밖에 안 된다.’
홍왕은 사람이 아니다.
처음 품은 꿈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뒤였다. 이제는 안다. 장로들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달려들어도 홍왕을 잠시도 잡아 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방해가 되지 않는 게 마존을 돕는 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장민은 피눈물을 뿌리며 바토르를 들쳐 업고 바다를 향해 달렸다.
“주인이여!”
바토르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막아라!”
차이커창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의 외침에 어벙벙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무인들도 우르르 달려들어 마인들의 발목을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이미 이곳에서 마인들이 탈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치 않다. 차이커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 명을 내려야 한다면 강진호가 탈출하지 못하게 홍왕과 강진호의 주변을 둘러싸라는 명을 내렸어야 한다.
하지만 차이커창은 마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유?
알지 못한다.
어쩌면 두 거인의 충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반동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니!’
차이커창은 격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연이어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니, 이제 머리가 미쳐 버린 모양이다. 홍왕께서 직접 저 마왕을 잡겠다고 나서신 판에 강진호가 탈출하여 저들을 조련한다는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미쳤구나.’
차이커창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내린 명령을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몇 번이고 명을 바꾸려던 차이커창은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홍왕과 강진호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설사 이곳에서 화산이 폭발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사내는 그 어떤 일보다 그들에게 중요하고 위협적이었으니까.
강진호의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수많은 마인들이 바다로 뛰어들고 있지만, 강진호는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배경이 일그러진다.
그의 뇌는 눈앞의 홍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뒤로 미뤄 버렸다.
그와 반대로 홍왕의 모습은 너무도 또렷해지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그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완벽히 강진호의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붉은 피가 묻어 있는 홍왕의 목덜미의 잔털마저 보이고 있었다.
강진호가 적루와 청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눈앞에 있는 적의 목을 가르고, 뼈를 부수는 일. 그리고 그의 적은 오직 하나.
“홍와아아아아아아앙!”
강진호가 홍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도가 역류하고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다.
솟구친 물보라가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그 환상과도 같은 광경 속에서 홍왕도 양손을 떨치며 강진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우우웅!
검과 권이 맞부딪친다.
적루가 튕겨 나가는 순간, 청루가 홍왕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청루마저 튕겨 나가자 마기를 머금은 강진호의 발이 홍왕의 목을 걷어찼다.
하지만 홍왕의 방어는 철벽.
내려친 주먹에 얻어맞은 강진호의 육신이 순식간에 바닷물을 밀어내며 땅에 처박힌다. 하지만 강진호는 바닥에 처박히는 그 순간에도 청루를 휘둘러 홍왕의 다리를 갈랐다.
“큭!”
생채기.
그저 생채기라 말해야 할 만한 상처를 낸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바닥에 처박힌 강진호가 낮은 자세 그대로 몸을 앞으로 튕기며 홍왕의 복부를 찔러온다.
“이, 이놈이!”
홍왕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강진호는 벗어던졌다.
마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검수로서의 체면도 모조리 집어던지고 그저 싸우고 있었다.
이건 무학도 아니고, 비무도 아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난잡한 싸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난잡한 싸움이 홍왕을 당황시키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이 빌어먹을 놈!”
순식간에 쏘아낸 권강이 강진호를 향해 날아든다.
당연히 피해낼 것이라 생각한 권강, 잠시의 숨을 돌리기 위해 발출한 권강이다.
하지만 홍왕은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강진호가 발출된 권강을 보고도 피하지 않으며, 악귀 같은 웃음을 얼굴에 매단 채, 앞으로 또 앞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