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773
#772.
발전하다 (2)
“그 썩을 놈이.”
이현수의 손이 내려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 무릎 위로 향한 손이 들썩이며 가슴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차이커창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었다.
“좋은 일이지.”
“물론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이기는 한데…….”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는 제가 싫어집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인데, 머릿속에서는 이득을 계산하거든요.”
“차라리 거기서 죽었다면?”
“…….”
위긴스가 가볍게 웃으며 홍차를 마셨다.
“그리 자괴감을 가질 일은 아니야. 당연히 생각해야 하는 일이지. 우리는 그런 인종이고,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가장 위에 설 수 없는 걸세.”
위긴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을 이끌어가는 존재는 머리만으로 되는 게 아냐. 때로는 이득을 무시할 때도 있어야 하지. 사람은 복잡한 존재거든. 그저 숫자로는 표현되지 않는 존재들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손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얻을 것을 얻었잖아.”
위긴스가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원탁의 한계 역시 그렇지.’
원탁은 나이트들 중에서 마스터를 뽑는다. 그 말인즉슨, 마스터가 되는 이는 나이트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원탁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탁은 이익의 각축장이다.
각국의 입장을 대표하는 나이트들은 사안 하나를 두고도 자국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와중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나이트가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방법 자체는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게 된 마스터는 작은 이익에 민감해지고, 각국의 입장을 과도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파격적인 결정은 사라지고, 안전한 선택만이 남는다.
큰 이익이 아니더라도 작은 이익을 끊임없이 굴린다.
‘그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어.’
원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관이 달라 원탁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위긴스는 원탁의 방식을 존중했다. 그 오랜 시간 원탁이 유럽을 지배할 수 있던 이유는 힘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는 시스템의 덕이 컸으니까.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만약 총회가 원탁과 같은 시스템으로 움직였다면 지금과 같은 급격한 성장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명령 체계가 강진호에게 일원화되고, 모두가 강진호의 방향에 맞추어 움직였기에 지금의 총회가 있다.
부작용도 크고, 위험도도 높은 방식이지만, 급격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방식이 최적이다.
“그래서 아쉬운가?”
“조금은요.”
“거짓말을 하는군.”
“예?”
위긴스가 이현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만약 로드께서 그들을 버리라 명했다면, 가장 실망했을 사람은 바로 자네일 텐데?”
“…….”
이현수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은 이율배반적인 거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에겐 없는 판단을 바라거든.”
이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긴스의 말이 맞다. 만약 강진호가 그들을 버리거나, 그들을 데려옴으로써 총회가 입을 손해를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현수는 그 결정을 칭찬할지언정 마음속으로는 실망했을 것이다. 그가 강진호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니까.
“로드는 당연한 선택을 한 거지. 그게 로드니까. 저들이 그 아이들에게 이쪽과 연락을 할 방법을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론이 난 문제지. 다만, 대단한 건…….”
위긴스가 턱을 문질렀다.
“차이커창이라고 했던가? 보통이 아니로군.”
저들을 살려두는 게 누구의 판단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홍왕의 판단이었을 수도 있고, 차이커창의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위긴스는 강진호와 함께 텔레포트하던 순간, 홍왕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 끓어오르던 증오를 억누르고 저들을 살려둘 수 있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게 홍왕의 의지였다 해도 대단하고, 홍왕의 분노를 차이커창이 잠재웠다 해도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 일을 해낸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돌아가는 게 맞다.
그 대가를 이쪽에서 지불해야 한다는 건 뼈아프지만 말이다.
“타이밍이 정말…….”
“그것도 우리가 당한 거겠지.”
만약 저들의 생존을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면, 계획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차이커창은 저들의 존재를 숨긴 채 협상을 진행했다. 밀고 당기기를 통해서 최대한 내줄 것을 줄인 채 협상에 임하고는, 마지막에 저들을 꺼냈다.
넉넉하게 이겨놓은 상황에서 얼마나 얻어내는가에 그리 큰 목을 맬 필요가 없던 이현수는 한 방에 뒤집히는 판을 보면 이제 저들에게 무엇을 내어줘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홍왕계의 머리라…….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내 머리 위에서 놀 줄이야.”
위긴스는 매우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원탁에서 겪는 치열한 머리싸움을 일상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그였다. 총회에 투신한 이후로는 그런 장기를 살릴 일이 없어 아쉬워하던 차였는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패배라고 할 만한 일을 여기에서 당할 줄이야.
피해가 크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커창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이 위긴스를 흥미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측할 수 없는 패가 차이커창에게 들려 있었다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 패는 총회가 준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낸 패였으니까.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면, 위긴스는 저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꽁꽁 숨겨놓을 수 있었을까?
‘무서운 자로군.’
아마 처음 연락을 했을 때부터 차이커창은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른 연락을 한 건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강진호의 성향, 총회의 입장, 그리고 자신들의 상황…….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 후, 원하는 대로 협상을 이끈 다음에 마지막 패를 내서 판을 뒤집어 버렸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차이커창이 원하는 대로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일뿐이다. 총회의 입장에서 이득과 손해를 계산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위긴스와 이현수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성하자.”
“예.”
“어설픈 승리에 취했지. 로드가 이긴 거지, 우리가 이긴 게 아님에도 우리가 이긴 것처럼 굴었어.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미지의 상대를 제 손안에 잡은 것처럼 군 대가다. 이건 로드의 실패가 아니야. 우리의 실패다.”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줘야겠지. 하지만 다음에는 내주지 않을 거다. 그거면 되겠지.”
“예.”
위긴스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주했군.’
새로운 삶과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총회에 합류했다. 강진호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사실 때문에 마치 무언가를 이룬 것처럼 긴장이 풀려 버렸다.
‘세상은 전장이다.’
전쟁터에서 안도하는 자는 총알의 표적이 된다. 이곳이 원탁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가 긴장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위긴스는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겠지?”
“물론입니다.”
“갚아주기 위해서는 총회를 다시 정비해야 한다. 요행으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예.”
“로드께서 만들어주신 기회를 살리는 건 우리의 몫이다. 일어서라. 쉴 시간이 없다.”
이현수는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뛰듯이 밖으로 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더 성장하겠지.’
하늘 위에도 하늘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 * *
“그럼 그렇게 하지.”
뚝.
차이커창은 전화를 끊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는 그의 입가에 간만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빌어먹을, 처음으로 한 방 먹였군.”
깔끔한 승리다. 총회와 얽히면서 그가 처음으로 얻어낸 승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커창의 마음은 개운할 수가 없었다.
홍왕은 그에게 더없는 자비를 내려주었다.
하지만 윗사람이 마음을 편케 해준다 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아버리는 이는 진정한 수하라고 할 수 없다. 위에서 내려주는 자비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살을 도려내서라도 얻어내는 게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홍왕께 이 사실을 보고한다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나무라시겠지만, 이게 옳은 방향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겨우 얻어낸 승리니까.
다만…….
‘겨우 이딴 걸 승리라고 부를 수 있나?’
전신을 흠씬 두들겨 맡은 대가로 다리를 한 번 걷어찼다고 해서 만족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총회를 상대로 금전적 이득을 얻어내는 것은 그가 원한 바가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총회의 철저한 파멸이다.
총회, 그러니까 강진호는 자신이 원한 것을 모두 얻어냈다. 그 대가로 필요치 않은 자금을 조금 뱉어냈다. 누가 봐도 강진호가 남는 장사다.
그 밑에 있는 놈들이야 속이 좀 쓰리겠지만, 차이커창은 애초에 이현수를 자신의 상대라 여기지 않았다. 개가 날뛰어봐야 개다. 그가 노리는 것은 개가 아니라 범이었다.
“후우…….”
어쨌든 이제 원점이다.
한동안 총회와 홍왕계는 서로를 간섭할 수 없다. 협정이 맺어진 순간, 적어도 드러내 놓고는 서로를 적대할 수 없었다. 이제는 드러난 칼이 아니라 숨겨진 칼로 싸워야 한다.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고 조직을 정비해 짧은 시간 안에 누가 서로를 제거할 수 있는 전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싸움이었다. 지금이야 홍왕계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그 강진호라면 말이다.
총회는 그가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궤도에 올라 버린 홍왕계가 그에 맞춰 성장하며 격차를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승부는 이 협정이 깨지는 날까지 얼마만큼의 격차가 유지되는가에 달려 있다.
방법은 두 가지.
홍왕계를 성장시키거나, 총회의 성장을 가로막거나.
어느 쪽이 옳은 길인가.
“후우…….”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뱉어낸 차이커창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택할 필요가 없지.’
둘 다 해버리면 되니까.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적을 아는 것,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
차이커창은 홍왕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총회와 강진호에 대해 아는 것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번 전쟁으로 그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돈 따위가 아니었다. 총회와 강진호가 자신들의 모든 전력을 노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실력을 안다면 그에 맞춰 전략을 짤 수 있다.
어둠 속에 있는 적은 노리기가 힘들지만, 드러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손에 검이 들렸을 때는 강하다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할 거야.”
차이커창이 주먹을 움켜쥐고 걸었다.
가슴속 가득한 굴욕이 그의 투쟁심에 불을 피워낸다.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