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able Age Wuli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549
제124장 인연을 담아 (4)
“이번 생은 즐거웠나?”
꿈틀.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빛에 도사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보며, 초운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였군….”
일사도. 아니,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삶을 사는 광기의 존재.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생각했는데…. 철무혼을 잡아먹은 건가?”
바짝 마르고 갈라진 입술로 쌕쌕 숨소리만 내뱉었지만, 용케 그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흐흐. 이제야 눈치를 챈 모양이군.]“왕묘의 일은… 나를 나락으로… 보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군.”
[괜찮은 육체를 찾기 위함이었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내가 몇 번이나 육체를 바꿔왔다고 생각하느냐?]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삶을 살아온 녀석답게 육신을 갈아타며 기생하는 방식이 있던 모양이다.
“골동품…. 개새끼….”
수없는 환생에 지쳐, 결국 죽음을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는 숨겨진 진실을 설명하지만, 초운휘는 관심을 거두었다.
정말이지. 더는 눈 하나 깜짝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하니까.
“졸려….”
그저 이면의 진실 따위야 어찌 되었든 딱 누워 잠을 자고 싶을 따름이었다.
[네놈의 목숨을 친히 거둬주마.]기이하게 일렁이는 검을 들어 올리며, 철무혼, 아니 일사도는 말했다.
“경천신마! 이 몸이 합공까지 하게 만든 무서운 실력은 인정하마.”
[잘 가라. 너의 육신은 내가….]“너의 무위를 찬양하며, 내 손수 지옥으로 보내 주겠다.”
[새로운 몸으로 잘 써주마. 크핫핫핫!]막 그가 치켜든 검을 뚝 떨어트리려 할 때였다.
사라락.
미풍이 불었다.
겨울의 삭풍이 아닌, 무척이나 따뜻한 봄바람이.
동시에.
“교관니이이이임!”
허공에서 장막이 걷히며 뚝 떨어지는 이가 있었다.
“흠?!”
바람의 가속도에 몸을 싣고 전신을 내던지듯 지면으로 떨어지는 검격에 차가운 눈송이가 맺혔다.
상대를 확인한 철무혼이, 아니 철무혼에 빙의한 일사도가 대경하며 손을 물렸을 때.
– 표설천봉공(飄雪天峯功).
전생의 마지막. 자신을 위해 등을 내어주던 여인의 환영과 겹쳐지며, 진설향의 낭랑한 외침이 이어졌다.
– 빙설(氷雪)!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순식간에 철무혼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어째서 이제야 왔을까?
“교관님. 교관님!”
품에 무너지듯 쓰러진 얼굴을 보듬고 울먹이며 외쳤다.
“정신 차려요! 제발!”
갑작스러운 난입에 황망한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하. 직접 찾아와준다니 더할 나위가 없군.”
철무혼은 도리어 껄껄 웃으며, 비열한 비소를 떠올렸다.
“마침 너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귀한 변수거든. 나를 따라와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변수? 잘은 모르겠지만, 반사적으로 진설향은 외쳤다.
“물러나세요!”
“꽤 앙칼진 녀석이로군. 나름 교육하는 재미가 있겠지.”
다시 검을 들어 올리던 찰나, 한줄기 미풍이 그와 진설향을 갈라놓았다.
“풍객인가? 역시 배신했군.”
“나름대로 친분이 있어서 말이오.”
“네 선택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손아귀를 펼쳐 허공을 잡자, 바람이 사정없이 찢어지며 허공에서 풍객이 훌쩍 뛰어내렸다.
“아이야. 나로서는 이자를 막을 수가 없다. 풍신결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 상성이 좋지 않아.”
“교관님을 지켜주세요.”
눈가를 훔치며 일어선 진설향의 머리카락 끝이 파랗게 변하더니, 이내 하얀 백설로 물들었다.
‘이제 내가 지켜드릴 때야.’
처음으로 남겨진 자가 아닌, 구원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 표설천봉공. 난설(亂雪).
진눈깨비 같은 눈보라가 일어나자, 철무혼은 꽤 즐거운지 입꼬리를 달싹였다.
“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공이구나. 꽤 구미가 당기는군.”
챙! 채챙!
눈보라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서리검은 철무혼을 열 걸음이나 물러나게 만들었다.
“멈추게! 무슨 짓인가!”
맹주 이준호를 비롯한 정파의 고수들은 갑작스럽게 누군가 난입한 상황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무학관의 관도인가? 어린아이가 끼어들 때가 아니다!”
허나, 그의 외침은 채 이어지지 못했으니.
“이익! 너무 굼뜨잖아요! 이 바보 아버지가!”
엄중히 단속하던 한쪽 구석을 가르며, 백리세가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온 것이다.
선두에는 백리설이 있었다.
그들뿐이 아니었다.
“너무 늦어 미안하네.”
“교관. 죽었어?”
진주언가의 무사들도 한쪽의 인해장막을 뚫고서 달려왔다.
“미안하지만, 더는 못 해 먹겠습니다. 맹주.”
묵영호, 묵연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명천광명전의 병법자들도.
“…….”
사박사박 걸어와 막아서는 아미파의 여승들을 본 순간, 이준호는 뒷목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복마신니. 마를 증오하는 아미의 신녀가 어찌 본주를 막아서는 것이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말이지요.”
그녀가 뒷덜미를 잡고 끌고 온 귀타염을 던지며, 철무혼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역시 아는 이보다, 사파 쪽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또한, 말년에 거둔 아이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답니다.”
“오늘의 결정이 얼마나 후회가 될지 알고는 계시오? 아미파가 마도에 협력하는 부끄러운 일이요!”
“…결정하기 전에 심사숙고했으니, 결정을 한 지금은, 감당을 해야겠지요. 사제들은 검을 들어라!”
그리고!
“초운휘 교관을 지켜라!”
“네! 사백님!”
아미파의 여승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리자.
“하.”
갑작스러운 이들의 난입이 재미있다는 듯이 철무혼이 장법을 쏘아 진설향을 튕겨 내었다.
“큭.”
맹랑한 표정으로 밀려나 다시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에 콧방귀를 뀐 그가 말했다.
“맹주. 지금 이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오?”
“그, 그건….”
난입에 당황한 것은 이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백리세가나 진주언가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무림맹을 위해 진법을 펼친 직속 전대 명천광명전이 돌변한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맹도 완전 콩가루로군. 맹주의 면전 앞에서 반기를 드는 꼴이 영 위신이 서지 않는구나.”
울컥한 이준호가 백의정의각의 각원들을 윽박지르려 할 때였다.
철무혼에게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일단의 흑의인들이 그를 포위하고 선 것이다.
“뭐냐? 뇌호문인가? 배신이냐?”
“그에게는 은혜를 입은 바가 있어서요.”
“기가 차군.”
“모두! 광폭아장을 지켜욧!”
광폭아장?
수군대기 시작하는 철사련의 무인들을 향해 바락바락 외치는 소녀를 본 철무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들은 즉결처분이다.”
잔혹한 그림자가, 뇌호문을 뒤덮었다.
***
철무혼이 직접 수하를 징벌하자, 맹주 이준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심상무극검!
손을 들어 허공에 수십 개의 무영검을 만들어내며, 뇌까렸다.
‘경천신마부터 처리하는 것이 먼저다.’
그가 손을 까딱거리자, 어느새 허공에 만들어진 수백 개의 무영검이 소녀의 품에 안긴 경천신마에게로 향했다.
“익!”
당황한 진설향이 정신을 잃은 초운휘를 몸으로 덮어 웅크렸다.
그 작은 등을 보며, 이준호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살아 돌아가면 후환이 될 자다. 지금 죽이는 것이 유일한 기회야.’
그러나,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쐐애액!
강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등 뒤를 노리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익숙한 지척에서 다가온지라, 아군으로 생각했지만, 파공성이 살벌하다.
‘암습인가?’
하나의 무영검을 움직여 날아오는 것을 향해 쏘았다.
펑!
“꺄악!”
허공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데굴데굴 구른 여아가 울먹이며 외쳤다.
“소혜야!”
황망한 얼굴로 한쪽에 있던 모용주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모용소혜?’
데구르 구른 여아는 순식간에 백리세가 쪽으로 굴러가더니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나 어떻게 해요. 맹주님을 노린 암살미수범이 되어버렸어요.”
“괜찮아. 늦든 빠르든 악당이 될 운명이었어.”
“너무해요.”
‘관도복?’
신무학관의 관도가 자신을 노렸다고?
노기에 살수를 마음먹은 순간, 모용주가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시오. 맹주. 본가의 여식이올시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모두 이들을 제압해라! 한 놈도 빠짐없이!”
초유의 사태에 얼어붙었던 고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달려온 남궁윤호는 진설향의 품에 안긴 교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교관님은요?”
“정신을 잃으셨어요.”
“제가 안고 있을게요. 가서 일 봐요.”
투닥거리는 백리설을 향해 제갈탄이 빽 소리 질렀다.
“지금 누가 안고 있느냐로 싸울 때입니까? 죽게 생긴 마당에!”
“아, 진짜. 연애 사업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울면서 몸을 일으킨 백리설이 달려드는 무림명숙들을 향해 화려한 검무를 펼쳐냈다.
챙! 채채채챙!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던지며 날아오른 그녀는, 그들 사이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봉황승천!”
긴 소맷자락을 날개처럼 휘저으며.
챙! 채채챙! 펑펑펑!
어지러운 난전 속을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움직이며, 공격을 받아내고, 흘려내고, 때로는 역공한다.
쉬쉬쉭!
검 끝의 검기로 허공에 빠르게 그림을 그린, 제갈탄이 외쳤다.
“윤호! 버티는 것도 고작일 거야!”
“그것으로 충분해.”
우우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강력한 고수들. 각자 일문에서, 일가에서 손꼽히는 이들인지라, 산악처럼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성난 황소떼가 달려드는 것과 같다.
일제히 터트리는 기파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았지만, 의외로 남궁윤호는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쿵.
검집으로 바닥을 찍으며, 인생에서 처음으로 남궁윤호는 우렁차게 외쳤다.
“교관님께는 닿을 수 없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순식간에 다가오는 검의 궤적을 읽어냈다.
지끈.
수십 명이 일제히 검을 내리치는 궤적이 시야에서 어지럽게 펼쳐지고, 뭉치고, 흘러갔지만, 기어코 생로를 계산해 냈다.
짜우!
강호의 초고수들이 함께 펼치는 수많은 일격의 맥을 꿰뚫은 남궁윤호가 전력을 다한 검을 뿌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초식.
펼친 것은 가장 손에 익은, 신무학관의 입관생들이 배우는 일합거도. 단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검을 내려그을 뿐인 동작이었으나.
– 걸인들의 왕.
나름대로 깨달은 제왕검형.
허름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을 그림자를 떠올리며, 마음에 심상이 담기자 가공할 기세를 만들어냈다.
“!!!”
한순간에 검이 몇 배나 증식하는 환상을 마주한 이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일합(一合)!”
쿠아앙-.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검이 지면과 맞닿으며,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하아. 하아.”
한 번의 일격으로 달려들던 삼십여 명을 멈춰 세운 일격.
개중에 절반은 부러진 검을 잡고,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남궁윤호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아둔한 둔재. 동천관의 지박령. 할 줄 아는 것은 하나. 숙달된 일 초식을 펼쳐내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쿠앙!
다시 전심전력을 담아 교관을 노리는 이들을 향해 내리꽂으며, 철벽처럼 두 발을 딛고, 일합거도의 기수식을 취했다.
***
“으아앙! 미안해요. 미안해요!”
울먹이는 모용소혜는 눈이 뱅글뱅글 돌 것 같았다.
“미안해요. 삼촌.”
“아. 소협 미안해요. 우리 어디서 봤죠?”
“으앙. 이런 재회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잽싸게 움직이며 걸리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철권을 날리는 그녀의 주변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무했다.
“히끅. 히끅.”
그녀와 등을 맞대며 언호승이 철갑으로 입가를 슥 닦았다.
“제법이잖아! 피박쥐!”
“내가 왜 피박쥐예욧!”
“무림파천황?”
“실례잖아요!”
잽싸게 때리고 튀며 날아다니는, 이 정체불명의 존재에 당황하던 이들 중에서, 안되겠다 싶은 적혈사군이 검을 들어 올렸다.
“쥐새끼 같은 놈들. 두 쪽으로 갈라주마.”
하지만, 그는 이내, 한쪽에서 날아오는 살기를 느껴야 했으니.
저벅. 저벅.
묵직한 걸음으로 장내를 곧장 가로지르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반듯하게 정복을 입은 이들이었는데, 그들 앞에는 숱이 옅은 백미를 흔드는 이가 있었다.
“그럴 수는 없소.”
“너희들은 누구냐?”
“신무학관 은천관 상급교관 장철심. 청성파의 문하였으나, 이제는 일개 교관들의 인솔자라오.”
적혈사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일개 학관의 교관들 따위까지 본 군을 막아서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군.”
“관도를 지키는 것이 교관의 책무인 탓이오. 목숨은 고려사항이 아니지.”
나아가-.
정신을 잃고 진설향의 품에 안긴 넝마가 된 초운휘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아직 초운휘 교관의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서 말이지. 동료를 지키는 것 또한 본관의 책무라오.”
“살(殺)!”
성격이 급한 적혈사군이 검을 뽑아 쇄도했지만, 장철심은 느긋하게 진기를 일으키며 외쳤다.
“교관들은 뭣들 하는가! 귀중한 미래를 이어 나갈 관도와 동료를 엄중히 지켜라!”
“네! 상급교관!”
능풍운이, 모용선야가, 여매홍을 비롯한 동천관과 은천관의 동료 교관들이.
“배식소에서 쏘겠다면 가만 안 둬!”
“핫하. 살아 돌아가서 술잔을 기울이세나!”
“젠장. 나는 왜!”
일제히 자리를 박치고 막아서며, 검과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