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18
제118화 –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양 관주는 마당이 아니라 지하미로를 통해 소운당에 들어왔다. 내 도래를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나는 다실에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놀랐다. 아르만큼은 아니지만 양 관주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천민촌의 아이들처럼 바싹 야윈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간의 마음고생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일어서서 맞이하는 나를 보며 양 관주가 짐짓 나를 힐난했다.
“다른 사람을 말려 죽이면서도 본인은 신수가 훤하네요.”
“미안하오.”
내가 받아치지 않고 싹싹하게 사과하자 양 관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 공자는 많이 변했군요.”
“어떻게 말이오?”
“처음 보았을 때 오 공자는 능청스러움을 넘어 장난기도 다분했어요. 낯빛도 청천의 태양처럼 밝았고요. 마치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소년 같았죠. 그런데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고 진중해진 노회한 장년인 같은 느낌이에요. 너무 심했나요? 하지만 요 몇 달 새 오 공자의 인상이 사뭇 달라진 건 사실이에요. 하긴 그 짧은 기간에 범인은 상상조차 못 할 난관들을 헤쳐 나왔으니 이전과 똑같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겠죠. 칭찬은 아니지만 비난은 더더욱 아니니 언짢아하지 말아요. 그저 나이 든 여자의 쓸데없는 감상 정도로 생각해줘요.”
“개의치 않소.”
“다행이네요. 변하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심정이랄까. 실은 용궁의 공주에게서 봉화산 건을 전해 듣고는 모든 게 끝났다고 자포자기했어요. 도제와 검제가 친히 나설 테니 제아무리 오 공자라도 횡액을 면하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했던 거죠. 우리도 무사하기 어려울 테고요.”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석진과 한월노모의 안부를 물었다. 양 관주는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도산에서 보양으로 귀환하다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십자무련의 문상이 보낸 전갈을 받고 도산의 도객들이 덮치기 전에 모처로 피신했기를 바랐다.
양 관주가 새삼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도 되나요? 내내 간을 졸이고 있던 차에 오 공자가 지난달 말 마원에 출현해 대변혁을 일으켰다는 풍문을 접하고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마원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땅이지만 도제나 검제 같은 이들은 예외잖아요. 그들에게 걸리는 건 시간문제라 예단하고는 애를 태우고 있던 차에 용왕이 오 공자의 무사함을 알려서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나는 오 공자가 신창문의 영역 어딘가에서 은신해 있으리라 여겼어요. 아무리 도검의 제왕들이라도 거기는 함부로 침입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들에 맞설 힘을 기를 때까지 잘 숨어있지 왜 왔나요?”
양 관주의 힐책은 내 안위에 대한 염려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따뜻함을 느꼈다. 전날 그녀에게 모정을 느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양 관주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소. 참! 도제는 이미 만났소. 불과 엿새 전에. 제대로 한판 붙었더랬지.”
내가 덧붙인 말에 양 관주의 왕방울 눈이 쏟아질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야위었으면서도 큼직한 눈과 두툼한 입술은 그대로였다. 그런 얼굴로 놀란 양 관주를 보니 문득 서역의 소녀가 떠올랐다.
나우.
잘 있을까.
단순히 실각한 데 그치지 않고 변까지 당했을까 봐 못내 불안했다. 그녀에게 탈이 난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나우를 생각하며 그녀의 안전을 좀 더 확실히 해두지 않고 떠났던 처사를 후회하고 있는데 잔뜩 흥분한 양 관주의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그러고도 이렇게 건재하다는 것은 오 공자의 무력이 최소한 그 노물과 비등해졌다는 뜻이겠죠?”
나는 아르에게 주었던 것과 동일한 답을 꺼냈다.
“아직은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 하지만 그를 잡을 날도 머지않았소.”
늘 차가운 빛을 유지하던 양 관주의 동공에 불길이 타올랐다.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나는 앞서나가는 양 관주를 진정시켰다.
“아직은 아니라니까. 아무튼 도제 얘긴 나중에 합시다. 내가 양 관주를 보러 온 건 그 노물이 아니라 다른 용건 때문이니까.”
양 관주가 그제야 본론으로 돌아왔다.
“내게 무슨 부탁이 있다는 거죠?”
나는 단도직입했다.
“마원에 가 줄 수 없겠소?”
내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양 관주가 큰 눈을 끔벅거렸다.
***
나는 양 관주에게 마원의 상황을 설명했다.
연신 한숨을 내쉬면서도 주의 깊게 들은 양 관주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쉽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솔직히 말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마원은 워낙 정보조직의 무덤 같은 곳인지라 정확한 인구를 추산할 순 없지만 못해도 이백만은 넘을 거예요. 그만한 입을 먹여 살리려면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해요. 현실적으로 그만한 자금을 조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불가능이란 단어를 두 번이나 썼다는 것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양 관주의 거절을 인정하기로 했다.
“알겠소.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소.”
“대안이 있나요?”
“당장은 없소.”
양 관주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내가 하겠어요.”
나는 반색했다.
“그래 주겠소?”
“방법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역량은 한참 딸리지만 내가 해 볼밖에.”
“고맙소.”
“하지만 동지들을 설득하려면 우선적으로 두 가지를 보장해야 해요.”
“말해보구려.”
“첫째는 안전보장이고 둘째는 추후의 보상이에요. 둘 중 하나만 빠져도 추진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리하겠소. 전자는 이미 조치를 취해두었소. 다만 현재 마원은 통제권에서 벗어난 잡마류 마인들로 인해 극히 혼란스러우니 당분간은 안전이 확보된 지역만 이용하길 바라오. 보상 건과 관련해서는 양 관주가 알아서 정하구려. 모든 걸 일임할 테니.”
***
나는 양 관주와 논의를 이어갔다. 대략적인 협의를 마친 후 그녀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수락해주어서 고맙소.”
양 관주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마워요. 그분의 염원을 이룰 기회를 주었으니.”
나는 흠칫했다.
양 관주가 말하는 ‘그분’은 상계의 신이라 불렸던 진덕근을 의미했다. 그는 무일푼으로 시작해 불혹의 나이에 명실상부한 중원제일거부가 되었으며 그 이후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빈민구휼에 쏟아 부인 일대 호인이었다. 마흔네 살에 도제에게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바꾸었을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은 걸물이기도 했다.
“그분은 당신의 꿈의 완성이 마원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라 했어요. 지난 일천 년간 아무도 손대지 못한 그 지옥에 인간의 도리와 삶을 전할 수만 있다면 당신 목숨을 백 개쯤 바쳐도 좋다고 했지요. 그래서 마원과 이웃한 도산과 신창문에 그들이 요구하는 상납금 외에 따로 비자금을 바쳤던 거예요. 도제와 창제에겐 마인들을 소탕할 힘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받아먹고도 그 악적은…….”
분노로 인해 양 관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추태를 보였네요.”
“괜찮소.”
“아무튼 어떻게든 해 볼게요. 아깐 엄살을 부렸지만 그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뭉친 동지들은 결코 이 과업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비축분에 한 달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했죠? 우리가 힘을 합하면 그 기간을 두 배로 연장할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보다 안정적인 식량 수급 방안을 마련해 볼게요.”
“기대하겠소.”
이렇게 해서 나는 큰 짐을 덜었다.
용무를 끝냈지만 나는 바로 자리를 파하지 않고 양 관주와 잠시 사담을 나눴다.
“혹시 후계자를 키울 생각은 없소? 이번 일처럼 돌발적으로 보양을 떠나야 할 사정이 생기면 양 관주의 사업을 돌볼 이가 필요하지 않겠소?”
서역의 나우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오 공자를 만난 이후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손을 봐뒀어요.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실은 보름 전부터 은밀히 교육을 시작한 아이가 있어요. 거창하게 후계자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그 아이가 차차 내 사업을 이어받을 거예요.”
“아이? 똘똘한 동기(童妓)를 후인으로 키우고 있단 말이오?”
“그렇게 어린아이는 아니에요. 그리 똘똘하지도 않고요. 그렇지만 내 뒤를 잇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을 갖고 있어요.”
나를 보는 양 관주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실은 오 공자도 아는 아이예요. 아직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오 공자한테까지 굳이 감출 필요는 없겠죠.”
일순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예월 소저를 말하는 거요?”
양 관주가 빙긋 웃었다.
“그래요.”
허어, 완전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주근깨를 본 지도 석 달이나 지나있었다.
그녀는 안진이 있을 무렵엔 뻔질나게 소운당을 드나들었지만 한 달여 전에 왔을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부터 별채에 들르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그녀와의 만남이 중단되었다.
명랑하고 맹랑한 주근깨의 말투와 얼굴을 떠올리자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에겐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내게 봉야를 청하며 청화를 피워 올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벌써 넉 달여 전의 일이었음에도.
내 웃음을 고소로 착각했는지 양 관주가 주근깨를 변호하고 나섰다.
“물론 유달리 영민한 아이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둔하지도 않고요. 어쨌거나 그 방면의 부족함은 얼마든지 주위의 도움으로 상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가여워하는 마음과 정의감, 그리고 역경을 견디는 의지력은 남들이 보완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에요. 그 아이는 이 셋 모두에서 최상의 자질을 갖췄어요.”
“전적으로 동의하오. 훌륭한 후인을 골랐구려. 적극 지지하고 응원하겠소. 양 관주와 주근깨, 아니 예월 소저 둘 다.”
“그 아이에게 오 공자의 말을 전해주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할 거예요. 오 공자가 비웃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그럴 리가 있겠소? 예월 소저도 내게 소중한 벗인데.”
“그리 말해주니 내가 다 고맙네요. 오 공자에겐 다소 철없는 언행을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월인 여간 야무진 아이가 아니에요. 빈농의 장녀로 태어난 그 아이가 부모는 물론이고 아래로 아홉 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먹여 살린 걸 아나요? 열한 살부터 말이에요. 이제 고작 열일곱이지만 그 아이가 감당해야 했던 풍파는 어지간한 노파들이 평생 겪었을 고초들보다 훨씬 험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여전히 구김살 없는 성정을 유지하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에요.”
“맞소. 대단하오. 대단하고말고.”
주근깨에 대한 칭찬을 공유하며 나와 양 관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교환했다.
양 관주와 작별을 고하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려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더 할 말이 있소?”
머뭇거리던 양 관주가 짧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쓸데없는 얘기임을 알지만 그리 물어보니 말할게요. 요 얼마 전에 하도 불안해서 한 노야를 뵈었어요.”
“점을 기가 막히게 본다는 이 말이오?”
“기억하는군요. 오 공자의 운명에 대해 여쭈었더니 그 어른이 ‘암운이 자욱하니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어쩌겠는가? 승천하려면 여의주를 버려야 할 것을.’이라고 하시더군요.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오 공자가 당사자이니 알려주는 게 나을 성싶네요. 한 노야의 점괘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기분이 묘했다. 내가 이제 가려는 곳이 용궁이기 때문이었다. 용궁엔 여의주가 있었다. 노인이 말한 여의주가 그 기물을 가리키는 지는 불명확하나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나는 아르가 써준 서신에 한 문장을 추가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