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39
제139화 – 어디를?
“빚을 갚아줄 아이가 없다네. 이 세상에 말일세.”
뒷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오늘의 행사를 나에게 일임하기로 했던 용왕이 끼어들었다.
“당신 제자가 죽었단 말이오?”
일순 검제의 눈에 청광이 번득였다.
“그렇소, 용왕.”
언뜻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근저엔 비통함이 깔려있었다. 나는 그의 심사를 헤아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검룡에게 나를 암습했던 일을 들었소?”
“그렇다네. 그래서 나 혼자 자네를 맞이한 걸세.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말일세. 여러 사람이 말을 섞다가 돌발적인 충돌이 일어날 우려가 있지 않은가. 자네에게 중아의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음을, 하여 이곳을 찾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네. 그 아이의 사부로서 대신 사과하이.”
의외의 연속이었다.
검룡이 검제에게 봉화산에서의 일을 털어놓은 것도 의외지만 검제가 자발적으로 제자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까지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는 좀 더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다.
“그날의 일에 관해서 그에게 뭐라고 들었소?”
검제가 백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노기를 표출하지 않고 순순히 답을 주었다.
“세 아이가 자네를 제거하기로 뜻을 모으고는 중아에게 동참해달라고 간청했다더군. 중아는…….”
검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듣고 있던 용왕이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검제. 누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그 일은 전부 그…….”
“그만!”
용왕의 입에서 ‘여우새끼’나 ‘쥐새끼’, 혹은 ‘난쟁이’ 같은 단어가 나오기 전에 나는 얼른 그의 말을 차단했다. 그런 험언(險言)을 방치했다간 수습 불가의 상황으로 치달을 터였다.
“나한테 맡기기로 하지 않았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용왕은 지켜만 보시구려.”
앞을 가로막고 선 내 제지가 마땅치 않은지 나를 노려보며 씩씩거렸으나 용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자중을 당부하는 눈빛을 쏘아 보낸 나는 검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듣고 싶소.”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했던 용왕의 기세에 대응해 가공스러운 예기를 피워 올렸던 검제가 내기를 갈무리했다.
“중아는 고민했지만 끝내 그 아이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고 했네. 세 아이가 집요하게 매달려서만이 아니라 자네가 공주 양가의 아이를 상대로 현시했던 무력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네. 내심 자네보다 반의반 수라도 위일 거라 자부했던 터라 자괴감이 들었다더군. 평생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두려움도 느끼고. 그래서 고심 끝에 자네를 암습하는 데 동의하고 검을 들었다더군.”
의심스러웠다. 검룡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그랬다면 검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검제의 음성과 표정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
“중아는 그날의 처사를 두고두고 후회했다네. 그러면서 언젠가 자네가 찾아올 것에 대비하여 폐관수련에 들었다네. 자기가 저지른 과오이니 스스로 책임지겠다면서 말일세. 우리더러 자신이 설혹 자네에게 패해 목숨을 잃더라도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네. 그것이 내가 자네를 침략군으로 간주하지 않고 손님으로 대하는 한 가지 이유일세.”
다른 이유는 뭔지 궁금했지만 일단 이 문제부터 매듭짓기로 했다.
“폐관수련에 들었다면서 검룡이 왜 이승을 하직했다는 거요?”
검제의 눈에 회한이 서렸다.
“자네를 너무 의식한 탓인지 중아는 무리에 무리를 거듭했던 듯하네. 같이 운공에 들었던 양가의 아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련장을 달려 나와서 변고를 알렸을 때는 이미 늦었네. 가뜩이나 마른 아이가 뼈밖에 남지 않았더군. 전신의 혈맥도 터져있었고. 숨은 붙어있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네. 그렇게 중아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났네.”
안 그래도 양천의 근황을 알고 싶었던 나는 검제의 상심을 무시하고 그에 관해 물었다.
“십전공자는 어찌 됐소? 아직도 여기에 있소?”
검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 보이지 않더군. 중아의 일로 망연자실했던 터라 언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했다네. 아마도 본가로 돌아갔을 테지.”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더라도 양천은 인사도 하지 않고 초상집을 빠져나갈 이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아니, 의혹 쪽이 몇 배는 더 컸다.
검룡이 폐관수련 중에 비명횡사했다는 말도 황당하거니와 제자의 죽음을 두고 나를 원망해야 할 검제가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검룡은 언제 죽었소?”
너무 직설적인 언사였으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제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더니 동문서답했다.
“믿지 않는구먼. 하긴 나조차 아직도 현실이라 받아들일 수 없으니.”
허공으로 시선을 올린 검제가 뜻밖의 소리를 내뱉었다.
“중아를 데리고 오게, 자운.”
검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선력을 끌어올려 임전태세를 갖췄다.
잠시 후 검제 못지않게 비대한 체구의 노인이 어깨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서 장내로 날아왔다.
그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관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설마.
검제가 손을 내젓자 관을 갖고 온 노인은 원한이 서린 눈초리로 나를 일별한 후 다시 담장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검제가 관 뚜껑을 열었다.
“보게나.”
나는 관 쪽으로 다가갔다. 용왕이 내 뒤를 따랐다.
검제가 워낙 가까이 있었기에 다섯 걸음 만에 관 속의 내용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더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관에 반듯이 누운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검룡이었다. 검제의 말마따나 살점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아 해골과 진배없는 상태였으나 그임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혹시 몰라 투시안까지 동원해 시신의 내부를 살펴본 나는 검룡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용왕도 그런 모양이었다.
“유감이오, 검제.”
용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검제가 나를 보았다.
“만져보겠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소.”
허탈했다. 내 또래 중엔 유일하게 호적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던 자가 이토록 어이없는 결말을 맞이하다니.
***
뚜껑을 덮어 비참한 몰골을 한 제자를 가리며 검제가 뒤늦은 대답을 주었다.
“여드레 전이었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해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고 있구먼.”
뭐라 할 말이 없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용왕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두툼한 손으로 관을 쓰다듬던 검제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는가?”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나는 이만 끝내기로 했다. 주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위험수위였다. 여기서 더 자극했다간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질 공산이 컸다. 검룡의 사망을 확인했으니 구태여 검림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작별 인사를 고하려는데 검제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용왕에게 전한 내 뜻은 협박이 아니라 권고였네. 기실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도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전서구를 보내오는 통에 그냥 그러라고 했네.”
“용왕더러 이달 말까지 중원을 나가라며, 그러지 않을 시엔 손을 쓰겠다는 서신을 보낸 게 도제였단 말이오?”
“그렇다네. 솔직히 나도 용왕의 잦은 중원 출입과 장기 체류가 썩 달갑지는 않으나 강제로 쫓아버리거나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네. 다만 용왕이 지속적으로 중원의 일에 개입한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네.”
얼굴이 굳은 용왕을 힐끔 쳐다본 검제가 말을 이었다.
“기실 지난번 자네의 도산 침공 건을 두고 몹시 갈등했더랬네. 하지만 도제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외세를 끌어들인 자네를 징치하러 출림하지 않았네. 중아의 일로 자네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거니와 자네가 마원에서 행하는 놀라운 개혁이 계속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네. 그 훌륭한 사업을 지지는 못할망정 방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디까지 진심일까. 딱히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빈말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그럼 검림은 앞으로 우리와 적대시하지 않을 거요?”
“우리라 함은 자네와 용왕을 이르는 겐가?”
“그렇소.”
“자네는 몰라도 용왕에 관해서는 확답하기 어렵네. 당사자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나 자네와 대립각을 세운 도산이 아니더라도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인사들이 적지 않네. 충고하건대 이쯤에서 떨어지게나. 자네는 이미 스스로 도산을 감당할 수 있는 무력과 세력을 가졌지 않은가. 그에 더해 용왕이 자네에게 붙어있으면 창제나 무후 같은 이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걸세. 나 역시도 아주 강 건너 불구경할 입장은 아닐세. 그들이 외세 축출에 합의하고 내게 동참을 요청하면 거부하기 어려울 걸세.”
검제가 검룡의 시체가 든 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 달 열흘 전 그의 제자가 지금의 그와 비슷한 심경이었을지 헤아려보는 걸까.
나는 서둘러 대화를 종결지었다.
“알겠소. 그럼 우린 이만 가보겠소.”
어정쩡한 마무리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검제와 더 말을 섞어봤자 매듭이 풀리기는커녕 더 꼬일 우려가 큰 데다 용왕이 발작이라도 하면 곤란해질 터였다.
내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출발을 재촉했지만 용왕은 검제를 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서 갑시다.”
아르를 들먹일까 하다가 역효과를 초래할지도 몰라 나는 다만 용왕의 등을 세게 떠밀었다. 잠시 버티던 용왕이 돌연 훌쩍 날아올랐다. 그가 갑자기 몸을 빼는 바람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던 나는 겨우 신형을 추스르고는 그를 따라 비상했다. 검림의 검호들이 흘린 신음성들이 우리를 배웅했다.
***
검제에 대해 분기를 표출할 줄 알았는데 용왕은 찬사를 늘어놓았다.
“일후삼제 중에 가장 점잖긴 하나 그이가 그토록 공명정대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 나 같았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랑하는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네를 용서하지 못했을 걸세. 입장을 바꿔 아르가 그 꼴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으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구먼.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외려 그 애송이의 과오를 대신 사과했으니 참으로 대인일세그려. 나로서는 흉내도 못 낼 듯싶으이.”
나도 검제의 처신이 이해난망이었다.
무림의 지존들 가운데 유일하게 정파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하나 애제자의 주검 앞에서도 전후 사정의 옳고 그름을 감안해 언행을 삼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 애송이가 뒈졌으니 물증 확보는 완전히 물 건너간 셈이구먼. 보아하니 검제는 전혀 내막을 알지 못하는 것 같던데.”
동감이었다. 검룡의 죽음과 함께 그날의 진상은 영원히 알 길이 없게 되었다. 그의 소지품 중에 환상환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검제도 더는 참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하간 다행일세. 오늘부로 중원 무림과 원수지간이 될 거라 각오했는데 별 탈 없이 해결되어 한시름 놓았네. 한편으로는 맥이 빠지는구먼. 오랜만에 제대로 한바탕 치고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지 않았는데 너무 싱겁게 끝나지 않았는가.”
“조금만 기다리구려. 머지않아 기회가 올 테니.”
용왕이 심각해졌다.
“그 문제 말인데, 검제의 지적을 가벼이 흘려 넘길 수 없을 것 같네만. 그이의 말처럼 창제나 무후가 나서면 큰일 아닌가. 그들 중 하나만 도제와 합세해도 대책이 전무할 성싶은데.”
“그러니 선제 조치에 나선 것 아니오? 검제는 당분간 중립을 지킬 터이니 우선 도제부터 처치합시다. 그런 연후 창제를 처리하면 되오. 무후는 걱정할 것 없소. 죽었다 깨어나도 창제와 연수하려 들지 않을 테니.”
“그럼 이 길로 곧장 도산으로 쳐들어갈 작정인가?”
“아니오. 도중에 들를 데가 있소.”
“어디를?”
나는 용왕에게 예정에 없던 행선지를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