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40
제140화 – 만나보겠소.
나는 이번에도 용왕의 신세를 졌다.
또 한 번 시종 노릇을 하게 되어 구시렁거렸지만 용왕은 탈것을 머리에 이고 날아올랐다. 나는 그가 수고하는 동안 운공에 들어 덜 체화한 청화를 건곤기로 부지런히 전환했다.
용왕이 도착을 알렸을 때는 아직 해가 동천에 떠 있었다. 정오가 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터였다. 나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용왕은 검림에서 일천팔백 리가 넘는 장도를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주파한 것이었다.
공주 외곽에서 반 식경가량 휴식을 취한 우리는 경신으로 공주 상공을 가로지르지 않고 저자로 들어섰다.
용왕은 대번에 중인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러고는 소요가 일어났다. 도처에서 내 예전 별호인 절대천룡이 난무했다. 공주의 민초들이 한눈에 나를 알아본 것은 당연지사였다. 근래 온 대륙에 나와 용왕이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으니 몰라보는 게 이상한 일일 터였다.
양가의 터전인 서동(西洞)으로 향하는 대로를 오가던 행인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넉 달 보름 전 안진과 함께 이 거리를 지날 때는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더랬다.
“대접이 다르군. 전에 내가 왔을 때는 벌벌 떨며 도망가기 바쁘더니. 그러면서도 언제 다시 보랴 하며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고. 외인이라 차별하는 건가?”
나는 용왕의 투덜거림을 받아주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동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저자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양가의 무인들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두를 점한 이들은 원로들이었고 그 중앙에 전대 가주이자 현재도 막후에서 양가의 실질적인 일인자로 군림하는 보화선 양원이 보였다.
양원의 신호에 따라 나와 용왕의 이십여 보 앞에서 경신을 멈춘 양가 무인들이 일제히 상체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이가 다 빠져 합죽이가 된 양원이 홀로 삼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용왕이 아니라 나를 향해 포권했다.
“양가 비조의 이십사대 손, 원이 가문을 대표해 절대천룡과 용왕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이다.”
나는 다시금 근래 폭등한 내 위상을 실감했다. 전날 양원은 나를 하대했을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그런데 지금은 어려운 상전을 대하듯 깍듯한 태도였다. 그의 좌측 뒤에 선 꺽다리 노인의 태도도 사뭇 달라졌다. 도끼눈을 부라리며 나를 윽박지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나와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잔뜩 긴장한 양이 손가락만 살짝 갖다 대도 새된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양원이 내 이름을 앞세운 게 불만인지 용왕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합죽이 노인을 으르기 전에 나는 얼른 용건을 밝혔다.
“양천을 만나러 왔소만.”
양원이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왜? 이번에도 막을 참이오?”
“아, 아닙니다, 절대천룡. 저희들이 어찌 감히. 다만 천아는 지금 본가에 없습니다. 몇 달 전 검림에 갔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절대천룡의 청을 들어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장 검림에 기별을 보내 천아를 부르겠습니다. 사흘만 기다려주시면 그 아이를 절대천룡께 대령하겠습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양원은 자신의 말투가 바뀐 것도 알지 못한 듯했다.
“그럴 것 없소. 검림에 다녀오는 길이니. 검제가 이르길 벌써 팔 일 전에 거길 떠났다던데. 정말 여기 안 왔소?”
양원은 물론이고 양가 무인들 전체가 경직되었다. 검제를 언급한 효과였다.
공식적으로 정파 무림을 접수하진 않았지만 검제는 사실상 그들의 주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실 중원 전체를 주무르던 과거의 위세를 상실한 지 오래인 오대세가가 십자무련이나 도산에 먹히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검제와 검림 덕분이었다.
“오지 않았습니다. 맹세코 진실입니다. 저희는…….”
나는 양원의 말을 잘랐다. 양천이 없다면 양가엔 더 볼 일이 없었다.
“알겠소. 그가 돌아오면 할 얘기가 있으니 나를 찾아오라고 해 주시오.”
나는 노인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용왕의 ‘여보게, 같이 가세.’와 양원의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는 말들이 동시에 나를 따라왔다.
***
검림과 공주에서 연달아 허탕을 친 나는 도산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예상했다.
지금쯤이면 내가 용왕과 치렀던 비무가 도산에 전해졌을 터였다. 그 소식을 접한 도제는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는 나와 용왕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도봉도 그와 운신을 같이 할 터임은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내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서천 최고의 대도인 서경을 목전에 두었을 때 서산에 지는 해가 하늘에 붉은 노을을 아낌없이 뿌렸다.
지상으로 하강한 용왕이 내가 든 탈것을 팽개치듯 내려놓으며 신경질을 냈다.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이렇게 나를 부려 먹고도 입을 싹 씻으면 묵과하지 않을 걸세. 자네는 무조건 내 사위가 되어야 하네. 그러지 않고 아르를 나 몰라라 하면…….”
적당한 협박을 찾지 못해 말끝을 흐리는 용왕을 보며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아무리 천하제일 경공대가라지만 만 하루도 안 돼 일만 리가 넘는 대장정을 완수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허파가 터진 건 물론이고 근골들도 찢어지거나 으스러지지 않았을까. 그로서는 그 대가를 받아내고 싶을 터였다.
용왕의 가쁜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나는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수고 많으셨소. 이제부터는 내 발로 가리다.”
“그게 단가?”
“뭘 더 바라시오?”
“말했잖은가? 아르와의 관계를 확실히 해달라고.”
“미안하오만, 지금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소.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오. 그냥 두고 봅시다.”
“두고 보다니? 자네가 마음만 내면 간단히 정해질 일이 아닌가? 혹시 내 딸아이가 성에 차지 않는 겐가? 아니면 아직도 전날의 일로 앙금이 남은 겐가? 우리가 이만큼 했으면 자네도 얼마간은 성의를 보여야 할 거 아닌가? 공치사하긴 싫지만 나와 내 딸아이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자네를 도왔네. 이를 부인할 순 없을 걸세. 이와 같은 헌신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받고 싶네만. 딱 말 한마디면 된단 말일세. 그게 그렇게 어렵나? 내가 너무 염치가 없는 겐가?”
“…….”
나는 끝끝내 용왕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에게 누가 칼을 쥐고 있는지 상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와 아르가 어떤 미래를 맞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오마(五魔)를 부리며 상공으로 지나갔던 스무날 전과 달리 이번엔 공주에서처럼 저자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때와 대동소이한 소동이 벌어졌다.
곰을 방불케 하는 거한의 정체를 깨달은 행인들은 그의 옆에서 걷고 있는 나도 단박에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다음 반응도 흡사했다. 당연히 비명들을 질러대며 도망갈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공주의 백성들처럼 하나둘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파로 붐비던 거리는 곧 사람들의 등짝으로 덮였다.
내게서 아르와의 관계에 대한 확약을 얻지 못해 심사가 꼬여있던 용왕이 감상을 밝혔다.
“흠, 신기하구먼. 자네를 두려워하면서도 자기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어.”
과연 그러했다. 전날 도산을 침공해 도제를 물리치고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처사 때문일 터였다. 그날 다친 이들은 뇌옥의 간수(看守)들뿐이었다.
“자네가 중원의 민초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었는지를 웅변하는 광경이구먼. 따지고 보면 적의 수장이나 다름없는데도 공포에 떨며 달아나기는커녕 저렇듯 극상의 예를 표하다니. 어쩌면 저들은 자네가 도산을 무너뜨리고 이곳의 지배자가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구먼. 여기만 그런 게 아니라 중원 전체가 그러지 않을까. 양가가 수백 년이나 다스렸던 공주에서도 자네를 경원시하기보단 경외하는 분위기가 더욱 크지 않았던가. 자네는 이미 정사 무림을 초월해 이 대륙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듯하이. 참으로 대단하구먼. 그거야말로 역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 아닌가.”
민중의 지지라. 예전 같으면 콧방귀를 뀌었을 테지만 왠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이 또한 근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일환일까. 나는 내가 낯설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
도보로 서경을 횡단했기에 도산의 상징 중 하나인 인공호수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두웠다. 나와 용왕은 면적이 일만 평에 달한다는 정방형의 호수를 단숨에 건너뛰었다.
호수 너머의 너른 광장엔 도제를 필두로 이백여 명의 도호가 총출동했던 전날과 달리 달랑 한 명만 나와 있었다. 나와 일면식이 있는 자였다.
소살도 최필.
도제의 오른팔이자 도산 무력 서열 이 위로 평가받는 거물이었다. 강호 초출 시의 나였다면 그의 일도(一刀)도 받아내기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내 일 초도 감당치 못할 것이었다.
나는 넉 달 전 우장평에서 도봉의 호위무사로 왔다가 나와 말을 섞었던 대머리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십 보로 줄어들자 노인이 포권하며 꺾인 수숫대처럼 상체를 깊이 구부렸다.
“도산의 총호법 소살도가 마선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기실 이십일 전 이곳에 왔을 때 소살도도 있었으나 그날은 그와 알은체를 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넉 달 전 우장평에서의 만남을 기준으로 했다. 내가 답례하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소살도의 뺨이 다소 풀렸다.
그러나 금방 다시 경직되었다. 용왕 때문이었다.
“이젠 죄다 나를 뒷전으로 밀어내는군. 나는 눈에 안 보이는 겐가? 내가 우스워?”
용왕이 압기를 발하지 않았음에도 소살도는 백만 근의 바위에 짓눌린 듯 우그러졌다. 개세팔천 개개인이 무림의 고수들에게 지니는 위압감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강호들일수록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괴물들인지를 절감하고 있었다. 일후삼제를 제외하면 중원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자부할 소살도이기에 용왕의 무서움을 더더욱 잘 알 터였다.
“죄송합니다, 용왕, 마선과는 사사로운 인연이 있기에 먼저 인사를…….”
용왕이 혀를 차며 소살도의 변명을 막았다.
“쯧쯧, 농담 한마디 한 것 갖고 뭘 그리 벌벌 떠나? 파주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희대의 살성답지 않게.”
바짝 얼어붙은 소살도가 내 눈치를 봤다. 나에 대한 일반의 인식 중에는 협객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소살도는 이를 의식한 것이었다.
“도제는 안에 있소?”
내 질문에 소살도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내가 그의 과거 악행을 문제 삼지 않아 안도하는 한편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상기한 탓일 터였다.
“주군께선 부재중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짓궂게 물었다.
“언제 튀었소?”
면상이 벌게진 소살도가 우물쭈물했다. 용왕이 대신 답을 주었다.
“빤하지 않은가? 보나마나 우리가 서경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테지. 수하들과 식솔들은 나 몰라라 하고. 치졸하고도 비겁한 위인 같으니. 칼의 제왕이라는 이름이 아깝군.”
면전에서 주군을 모욕하는 데도 소살도는 찍소리도 못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한때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던 위명에 걸맞지 않은 소심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하지만 소주는 천전(天殿)에 있습니다. 실은 마선을 뵙고 싶다며 저더러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뜻밖이었다. 도봉이 도제와 함께 도주하지 않았더니.
웬일인지 용왕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 계집이 어째서 천룡을 보고자 한다는 겐가?”
소살도가 쩔쩔맸다.
“저도 모릅니다. 저는 다만 소주의 명을 받고…….”
용왕이 소살도의 말을 끊었다.
“무시하게나, 천룡. 그 앙큼한 것이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니…….”
나는 용왕의 말을 잘랐다.
“아니오. 만나보겠소.”
용왕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나를 붙잡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