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52
제152화 – 분부만 하십시오.
“말해봐, 선. 왜 아르를 그냥 내버려 둔 거야? 용왕도 전혀 반대하는 기색이 아니던데. 그러기는커녕 너하고 어서 합치라고 아르의 등을 떠미는 눈치던데. 아르 역시 네가 손만 내밀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낚아채서는 냉큼 먹어 치웠을걸.”
안진의 말본새에 기가 막혔다.
“내가 음식이냐? 먹어 치우긴 뭘 먹어 치워?”
“왜 열을 내? 그냥 비유잖아? 그보다 어서 이실직고해봐. 왜 그렇게 비싸게 굴었어? 너도 아르에게 마음이 있는 게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보름달처럼 훤히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아르를 애태우다니, 너무 치사한 수법 아냐?”
“남의 일에 쓸데없는 참견하지 말고…….”
“내가 왜 남이야? 네 누이잖아?”
내 말문을 닫아버린 안진이 기세를 올렸다.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너하고 아르가 맺어지는 데 찬성이야. 좀 답답한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썩 괜찮은 여자야. 심성 반듯하지, 아는 것도 많지, 무공도 끝내주지, 배경도 그만하면 최고잖아. 약간 코가 들린 것만 빼면 얼굴도 그럭저럭 봐 줄만 하고. 그 칼잡이 년처럼 껍질만 반드르르한 것들보다는 천만 배는 나은데. 그러니 군소리하지 말고 다음에 용궁에 가거들랑…….”
“됐다. 그만해라.”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제 막 시작했는데. 네게 확답을 받을 때까진…….”
“너, 아르하고 작당이라도 한 거냐?”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된 권고야.”
“…….”
“실은 네가 용왕하고 신창문에 간 동안 아르하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눴어, 선. 아르는 솔직하게 털어놓더라고. 너를 연모하지만 끝내 연분을 맺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좀 딱하지 뭐야. 그래서 팍팍 밀어주기로 했어. 아르는 철석같이 나를 믿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너는 반드시 그녀하고 이루어져야 해, 선. 만약 다른 여자한테 집적거리면 가만 안 둘 테야.”
잠자코 우리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우가 끼어들었다.
“그건 나한테 맡겨요, 언니. 서역 전역에 파리나의 눈과 귀가 깔려있으니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오 공자는 내 이목을 벗어날 수 없어요. 딴짓하는 기미가 보이면 곧장 언니한테 이를게요.”
“그래, 나우. 내 오라비지만 자고로 사내란 족속은 믿을 게 못 되니 한눈팔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 해.”
“물론이에요.”
죽이 착착 맞는 안진과 나우를 골리기 위해 나는 느닷없이 가속했다. 둘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끼야호, 안진은 환호성을 지르고 나우는 으악, 비명을 토해냈다.
해가 뜨기 전에 삼천리 사막을 횡단한 나는 천벽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내게서 떨어진 안진이 나우가 건네준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마치 제가 고생한 것처럼 땅에 드러누웠다. 그러면서 내 운기조식을 방해했다.
“아르 말인데, 선.”
“또 그 얘기냐? 경고하는데 이쯤에서 닫아라. 수틀리면 버리고 가는 수가 있어.”
“그게 도움을 청하는 자의 자세야?”
“네가 자꾸 잡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그렇게 역정 내지 말고 좀 들어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아르 말이야, 누구하고 닮지 않았어?”
내가 묵묵부답하자 나우가 호기심을 보였다.
“공주가 누구하고 닮았는데요, 언니?”
나우는 안진과 달리 아르에겐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호칭도 여전히 공주였다. 첫 만남 때의 오해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했다.
“너는 모르는 사람이야, 나우.”
“그래도 말해줘요. 이래 봬도 파리나의 수장이라고요. 중원의 어지간한 명사들은 다 꿰고 있다고요.”
“그래? 그럼 공주 양가의 십전공자라고 알아?”
“당연히 알죠. 근데 언니가 말하는 사람이 그이라면 이해가 안 되네요.”
“뭐가?”
“그이의 용모화를 본 적이 있어요. 대충 그린 게 아니에요.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특급 인물화에요. 그나저나 참 잘생겼더군요. 헌데 공주하고는 닮은 데가 전혀 없던데. 이목구비가 다 딴판이었다고요.”
“용모화로는 담을 수 없는 게 있어.”
“그게 뭔데요? 설마 눈빛이라든가 분위기 따위의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주관적인 인상을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콧잔등에 주름을 잡은 안진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러면 안 돼?”
한 달간의 동고동락으로 안진의 성질머리를 익히 알게 된 나우가 잽싸게 목을 움츠리며 항복을 알렸다.
신기했다. 나만이 아니라 안진도 아르의 눈에서 양천을 떠올렸다니.
하지만 안진은 나를 키운 노인네도 같은 범주에 들어있음은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들 남녀에게 끌린 진짜 이유였다.
새삼스레 양천을 그리워하며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데 안진이 답을 채근했다.
“빨리 말해 봐, 선. 실은 나 그날 아르를 보자마자 웬일인지 그가 생각났어. 그때는 느긋하게 감상을 밝힐 상황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나중에 목구멍의 가시처럼 신경이 쓰이는 거야. 아르한테 그 얘길 했더니 자기는 전혀 몰랐다면서 고개를 갸웃하던걸. 그래서 내 일방적인 느낌인가 싶어 묻어두었는데 불현듯 기억이 나네. 여하간 너는 어땠어?”
“나도 그랬다.”
누워있던 안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내 착각이 아니었다고.”
나우에게 고개를 돌린 안진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들었지, 나우? 이래도 귀걸이, 코걸이 운운할 테야?”
“미안해요, 언니. 내 식견이 짧았어요. 그런데 나도 그이의 실물이 보고 싶네요. 대체 어디 있을까요?”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건만 안진의 이마에 그늘이 내렸다.
“그러게 말이야. 어디에 처박혀서 이렇게 감감무소식인지 몰라. 사내면서도 선하고는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너는 어떠냐?”
“뭐가?”
“양천하고 어떤 사이냔 말이다.”
“사이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아르에게 그에 대해 따로 들은 게 없냐?”
“뭐를?”
설마 얘기하지 않았단 말인가?
“감질나게 굴지 말고 어서 토해놔, 선. 대체 아르가 뭐라고 했는데?”
“양천이 너를 연모한다더구나.”
안진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뭐? 그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너도 알잖냐. 아르는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안진의 콧잔등 양편에 세 가닥씩의 가로 주름이 잡혔다.
“그가 아르한테 그렇게 말했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더라.”
“근데 그녀가 어떻게 알아?”
“둘은 오래된 벗들처럼 아주 마음이 잘 통하는 부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의 속을 헤아릴 수 있었던 듯싶다. 나는 아르의 감을 신뢰한다.”
안진은 작은 입술을 깨물 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양천은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당시엔 네가 내 연인인 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친구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안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긍정적인 징조였다.
“흥,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그러니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동생아.”
“생각은 무슨 생각. 떡 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헛물켜지 말라고 그래.”
“정말 관심이 없냐?”
“흥,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야 관심을 갖든 말든 할 거 아냐. 지은 죄도 있으면서 코빼기도 안 비치는 주제에 언감생심 누구를 넘봐. 뭐, 궁상떨지 않고 사내답게 너한테 사과하고 나한테도 고백하면 받아줄지 말지 아주 약간 고려는 해 볼게.”
“그래라.”
“그런데 선, 살아있겠지?”
“…….”
그래야 할 텐데.
***
충분한 휴식으로 원기를 회복한 나는 다시 두 여인을 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수천 장 높이의 대산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연이 만든 최고의 장관이란 평을 가진 천벽 위를 비행하며 안진이 줄기차게 탄성을 내질렀다.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들은 하늘에 닿아있었고 산세는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장엄했다.
나는 훗날 인세에 질려 은거하는 날이 온다면 천벽에 들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안진이 이런 소리를 해서 놀랐다.
“언젠가 궁극의 도에 이르고 세상과 도원이 지긋지긋해지면 나는 여기서 독야청청할 거야, 선.”
남매라서 통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고르는 천벽에서 ‘고작’ 일천이백 리 거리였기에 우리는 정오가 되기 전에 그곳에 당도했다.
나는 저자에 들어가며 안진과 나우를 내려놓았다. 안진은 촌뜨기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국적인 풍물을 감상했고 나우는 그녀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질문들에 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곧 주목을 받았다. 이역의 복색 때문이 아니었다. 고르엔 우리보다 더 튀는 옷차림을 한 이인들이 수두룩했다. 두 여자의 미모도 원인이 아니었다. 도봉이라면 모를까 그들 정도의 미태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붙잡아두기 어려웠다.
행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누군가가 뱉어낸 단어였다. 그 단어는 이리저리 옮겨지며 수군거림이 되었고 그것은 이내 술렁거림으로 번졌다.
안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다들 우리를 쳐다보지? 그리고 ‘두나 까만’이 뭐야?”
나우가 대답했다.
“두나는 신화에 나오는 용맹스러운 무장이에요. 그리고 까만은 동쪽이란 뜻이고요. 해석하자면 ‘동방의 용장(勇將)’쯤 되겠네요.”
안진이 나를 보았다.
“너더러 그러는 거야, 선?”
“나도 금시초문이다.”
나우가 설명했다.
“전에 오 공자가 파리나 본부에서 위용을 뽐낸 적이 있어요, 언니.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나 봐요.”
“너도 몰랐어?”
“그날 이후 오 공자를 따라 대륙을 돌다가 곧장 중원에 갔으니까요.”
“그래? 어쨌거나 멋진데. 마선보다는 훨씬 낫네. 입에도 착 감기고. 이제부터 네 명호를 그걸로 하자, 선.”
나는 안진의 말을 무시했다. 그랬더니 금방 그녀의 볼이 탱탱 부었다.
“흥, 잘난 척하긴. 오만 데 다니면서 힘자랑이나 하는 주제에. 창피한 줄 알아야지.”
나우가 나를 변호했다.
“괜한 힘자랑이 아니었어요, 언니. 꼭 필요한…….”
“너, 지금 선한테 꼬리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그렇게 살랑거리며 비위를 맞춘다고…….”
안진도 말을 도중에 끊어야 했다. 거리 저편에서 한 무리의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
전날 행했던 ‘힘자랑’의 효과는 여전했다.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에 들어서자 파리나의 원로들이 모두 입구에 도열해서는 우리, 정확하게는 나를 맞이했다. 총 스물두 명이었고 다들 한 파벌의 우두머리였다. 나우에 따르면 그들 중 열셋은 그녀에게 적대적이었고 다섯은 그녀를 마땅치 않아 했다. 오직 네 명만이 그녀에게 우호적인 인사들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입지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달 보름 전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네 개의 뱀 대가리가 달린 거대한 석상을 박살 낸 뒤로 상황이 바뀌었다. 아무도 나를 등에 업은 나우에게 각을 세우지 못했다. 나우는 자신의 위상이 아직까지 전대 대모에게 비할 수는 없으나 머지않아 파리나를 완벽히 장악할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나도 적극적으로 응원할 참이었다. 그래야 내 일이 수월하게 풀릴 터이니.
나는 원로들이 급조한 환영 행사를 마다하고 그들을 한군데 모은 후 본론으로 직행했다.
“밀왕의 압제로부터 이 땅을 해방시키러 왔소.”
나우가 통역하기 전임에도 실내에 조용한 소요가 일었다. 대다수의 원로들이 중원어를 알아듣는다는 반증이었다.
“당신들 중 밀궁과 직통하는 이가 있을 거요.”
흉기에 베인 듯 뺨부터 턱까지 기다란 흉터가 난 노인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난번처럼 밀왕에게 알리시오.”
흉터 노인이 비 맞은 참새처럼 발발 떨었다. 그러더니 나우가 서역어로 그에게 뭐라 이르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방을 나갔다.
“밀왕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분에게 몇 가지 부탁하고자 하오.”
노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접었다.
“분부만 하십시오.”
만사형통을 예감한 나는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섣부른 전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