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39
249. 반격의 칼날(3)
시계가 오전 10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구인혁은 미국 현지 시각을 가늠해봤다. 뉴욕에는 썸머타임 기간이니 저녁 9시 30분일 거다. 이 시각이면 이제 막 술자리를 벌였으려나. 아직은 다소 시간이 있음을 의미했다.
“내가 요구하는 사항을 처리해주면 오늘 저들은 무사할 거야. 아니면 곧바로 전화해서 술에 약을 타라고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구인혁은 알았다. 그는 은서와 세라가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뭘 원하나?”
다시 감정을 추스른 구인혁이 차분하게 물었다.
박성한이 품에서 작은 소형 수첩 하나를 꺼냈다.
“이 수첩을 과거로 보내줘.”
평범한 수첩이었다. 표지가 가죽으로 덮여 튼튼하게 생겼다는 점을 빼면 들고 다니다가 메모하기에 딱 좋은 수첩이었다.
“이것 때문에 감옥에서 아버지를 면회하면서 엄청 고민했다고. 메모리칩을 보내고 싶었는데 과거에는 컴퓨터가 그런 걸 인식 못 하니까 방법이 없더군. 기껏 인식 가능한 메모리는 5.25 플로피디스크, 3.5 플로피디스켓 이런 종류인데 이런 건 요즘 없잖아? 하드 디스크를 보내려니 요즘 흔한 테라바이트 디스크는 그 당시에 무용지물이라더라. 메인보드가 인식 불가라네. 어쩌겠어? 가장 원시 시대로 돌아가야지.”
아마 예전의 구인혁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결국 유서준의 다이어리였겠지.
박강수도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그게 작은 수첩으로 결정 났을 테고.
박성한이 수첩을 빙글 돌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구인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만류했다.
“자신 있어? 미래를 바꾸려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야.”
“당신도 했잖아? 그래서 유서준이 부자가 된 거고.”
물론 그렇긴 하다.
구인혁이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자칫하면 당신의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어. 그 수첩 때문에 박강수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김현아랑 결혼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박성한이 멈칫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이란 남의 위험에는 둔감하더라도 자신의 위험에는 민감한 법이다.
박성한이 그에게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구인혁이 타임머신에 의해 펼쳐질 과거와 현재 미래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투더퓨처란 영화 본 적 있어? 본 적 없다고? 아, 그 세대가 아니군. 하여튼 거기 보면 미래에서 가족사진을 들고 과거로 갔어. 과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지 못하게 되자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이 흐려지면서 존재가 사라지기 시작해. 이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박성한이 의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럼 과거가 바뀌면 내 존재가 없어질 수도 있는 건가?”
“당연하지 않겠나? 알려나 모르겠지만 당신 아버지 박강수는 김현아란 여인을 좋아했었어. 만일 과거가 달라져서 김현아가 유서준을 싫어하고 당신 아버지를 좋아해 봐. 그럼 둘이 결혼할 거 아냐? 당연히 이 자리에는 너 말고 다른 자가 존재하게 되겠지.”
구인혁은 설명하며 상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박성한의 안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흠흠, 이건 이미 입증된 이론이라네. 원래 서하나는 유서준의 아내가 될 운명이 아니었거든.”
박성한은 그 말 역시 들은 바 있었다. 박강수가 면회하면서 다이어리에 관한 모든 일을 털어놓았으니까. 원래대로라면 유서준은 결혼하지 못한 홀아비 신세였다고 했던가.
“젠장, 어떡하든 김현아를 떼놓아야 해.”
박성한이 투덜거리며 손에 든 작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고민하던 박성한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펜을 들었다.
박성한이 테이블 위에서 작은 수첩을 펼쳤다.
구인혁을 목을 빼고 수첩 안에 적힌 글을 확인했다.
*
이 필체를 보면 내가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지금 유서준은 1987년부터 2016년까지의 모든 정보가 담긴 다이어리 세 권을 갖고 있다. 그 보관장소는 기숙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다이어리를 없애라. 그렇지않으면 먼 미래에 당신은 파산할 것이다. 파산에서 벗어날 오직 하나의 방법이니 반드시 명심하기 바란다.
만일 실패하면 최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하라.
2027년 12월 9일, 절대 송예은을 믿지 말라.
*
짧은 글이었다. 어쩌면 다이어리로 미래를 바꾸려는 유서준을 막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저 작은 수첩이 과거의 박강수에게 도달하고 다이어리가 사라지면 애초에 전개되었던 LTCM 완승의 미래는 변경되지 않는다. 김현아는 자살할 것이고 유서준 역시 파산하여 자살을 시도할 것이다. 한국은 외환위기에 빠져들 것이고.
구인혁은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딸만 위험하지 않았어도…….
박성한이 한참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용이 적혀 있는 면 앞쪽 페이지에 굵은 사인펜으로 글을 적었다.
*
절대 김현아를 가까이하면 안 된다. 김현아와 사귀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
구인혁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은 정말로 싫었나 보다. 그런데 저런 정도로 과연 효과가 있을까.
비장한 표정으로 사인펜을 내려놓은 박성한이 다시 구인혁을 위협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쩔 거야? 해줄 거야 말 거야?”
구인혁은 노트북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네 남녀가 어울려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부모 입장이라서 그럴까. 곧 남녀 간 뭔가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큭큭, 저렇게 술을 마시다간 약물 안 써도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박성한이 빈정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해주겠다.”
구인혁이 수락했다. 일단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빨리 처리한 다음 구은서에게 연락하여 저 장소에서 벗어나라고 연락을 해야 했다. 술을 더 마시면 점점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미래가 바뀌면 어떻게 되지?
우웅-
타임머신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컨트롤 타워에 불이 들어오고 타임머신 주변에 붙은 모니터 창이 복잡한 그래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구인혁은 번쩍거리는 타임머신의 장엄한 모습을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역시 타임머신을 가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대로 만들어지긴 했나 보다.”
여기저기 상태를 체크하니 일단 정상이었다.
박성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아직 테스트도 안 해본 거야?”
“완성하고 이제야 에너지를 충전했으니까 당연히 작동도 처음이지.”
“응? 그럼 믿을 수 있나?”
박성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구인혁이 어깨를 으쓱하자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짓던 박성한이 말했다.
“그럼 일단 테스트부터 해봐.”
구인혁 역시 바라던 바였다.
그는 방금 박성한이 사용한 사인펜을 들어 타임머신의 중간쯤에 있는 평평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일명 타겟베드로 불리는 곳이다.
박성한이 질문했다.
“목표한 장소와 시간은 어떻게 입력하는 거지?”
그는 생각보다 철두철미했다. 구인혁이 꼼수를 써서 방해할 여지를 없애려 했다. 구인혁이 과거로 보낸다고 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
구인혁이 컨트롤 타워에 있는 숫자를 가리켰다.
“이것이 목표 시간, 이것이 목표 장소 좌표. 이동물건은 타겟베드 위에 있는 것이야. 목표 시간이 현재에서 멀수록 에너지가 많이 들어. 이동물건의 질량이 커도 마찬가지. 시간은 1분 간격, 장소는 최소 1센티미터 정확도로 설정 가능해.”
구인혁은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설명하면서도 노트북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트북 화면 내 상황이 다소 변해있었다. 네 남녀가 거실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마 파티를 하는 모양이었다. 유세라는 오준영과 몸을 부대끼고, 구은서는 아론과 몸을 비비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의 청춘남녀가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젠장.”
구인혁은 속으로 딸을 잘 교육해야겠다고 욕을 하며 박성한에게 눈을 돌렸다.
“테스트해 봐.”
“좋아, 그럼 가장 단순한 것으로 하자고. 저곳에서 이쪽 테이블로 5분 뒤의 미래로 보내볼게.”
구인혁은 시간과 장소의 좌표를 입력했다.
박성한이 좌표를 확인한 다음 시계를 보며 시간을 쟀다.
우우웅-
타임머신의 소음이 높아졌다.
잠시 후 빛이 번쩍거리면서 타겟베드 주위로 긴장감이 폭발했다.
구인혁과 박성한은 눈을 고정하고 변화를 주시했다.
번쩍!
타임머신 주변에 번개가 내리치듯 갑자기 주위가 확 밝아졌다. 타겟베드 주위의 시공간이 엉키며 사인펜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타겟베드 위의 사인펜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박성한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인펜이 사라졌어!”
천천히 주위의 사물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타임머신의 측면 모니터에는 복잡한 그래프가 출렁이고 컨트롤 타워에 복잡한 숫자가 표시됐다.
계속 움직이던 숫자가 1분가량 지나자 안정화되며 고정되었다.
“성공이야. 정확히 목표지점에 도착했어.”
박성한이 테이블 위를 살피며 인상을 찡그렸다.
“사인펜이 없는데? 언제 나타나지?”
“5분! 아니 이제 4분 남았군. 4분 후에 테이블 위에 사인펜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구인혁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이미 테스트의 성공을 직감하고 있었다.
4분 후.
테이블 위의 시공간이 일렁거리더니 사인펜이 형체를 갖추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사인펜은 5분 뒤의 미래에 도착해있었다.
이론대로 정확하게 작동하는 타임머신에 환호성을 터트려야 했지만 구인혁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노트북 화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화면에선 네 남녀가 어울려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은서 이 녀석, 외간남자한테 왜 저리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거야? 세라는 또 왜 저래? 평소 남자한테 눈길도 안 준다더니 거짓말이었나?’
구인혁은 불안감 속에 화면을 보며 연신 투덜거렸다.
박성한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딸이 걱정되나 본데 잘생긴 오준영을 거부할 여자는 없어. 내가 오준영과 이 계획을 세우느라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 알아? 의심 못 하게 납치할 수 있도록 아는 사람 찾느라 정말 애먹었어. 크크, 내 전화 한 방이면 약을 탈 거야.”
박성한은 테이블 위의 사인펜을 조사했다. 시공간을 여행하는 동안 물건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자, 이제 수첩을 과거로 보내줘.”
박성한이 수첩을 타겟베드 위에 올렸다.
다시 구인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지?”
박성한이 주머니에서 종이쪽지 하나를 꺼냈다.
구인혁은 쪽지에 적힌 글을 읽었다.
1987년 8월 29일 오후 3시. 기숙사 축구장에서 구관 기숙사로 넘어가는 길목.
구인혁은 금방 그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했다.
박성한이 킥킥거리며 설명했다.
“여기에서 우리 아버지가 유서준의 그 네 번째 다이어리를 주웠다고 하더라고. 다이어리를 주워 보관했으니 당연히 이 수첩도 주워 보관할 거 아냐?”
생각해보니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네 번째 다이어리가 박강수의 손에 들어갔으니 그 다이어리와 같은 장소에 있다면 당연히 같은 운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구인혁은 수첩이 과거로 돌아갈 목표지점을 설정했다. 컨트롤 타워에 표시된 숫자가 그날의 시간과 장소를 가리켰다.
박성한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며 만전을 기했다.
구인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타임머신을 작동시켰다.
우우웅-
조금 전과 같이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불빛이 어지럽게 번쩍거리다가 타겟베드 주위가 확 밝아졌다.
번쩍!
타겟베드 주변의 시공간이 엉클어졌다.
스르르르-
작은 수첩의 형체가 점차 흐리해졌다. 수첩이 시공간을 흘러 과거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250. 부의 정점(완결)
작은 수첩이 과거로 이동하면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장 최초로 보내졌던 LTCM의 메모리칩은 LTCM을 부흥시켰다. 공룡 투기자본인 LTCM은 전 세계 경제를 교란했고 한국에도 마침내 외환위기를 발생시켰다. 김현아를 자살로 몰아넣었고 서하나의 인생을 망치게 만들었으며 유서준의 SJ 투자금융을 파산시켰다. 결과는 유서준의 자살로 치달았다.
두 번째 보내졌던 다이어리는 유서준을 죽음에서 구해냈다. SJ 증권을 탄생시키며 김현아를 위기에서 구했다. 서하나는 유서준과 결혼했고 딸 유세라를 낳았다. 유서준의 힘은 SJ 금융그룹을 이끌고 LTCM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오도욱과 박강수는 감옥으로 갔다.
세 번째 보내진 작은 수첩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서준에게서 다이어리를 앗아가면 다시 원상으로 복귀하게 될까. 김현아와 서하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고 SJ 금융그룹의 존재는 사라질까. LTCM이 다시 승승장구할까. 오도욱과 박강수는 감옥이 아니라 호의호식하며 살게 되나?
문득 구인혁은 유세라가 생각났다. 유서준과 서하나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유세라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눈길이 다시 노트북 모니터로 옮겨갔다.
“끝났나?”
박성한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컨트롤 타워 모니터의 숫자는 아직도 어지럽게 변화하고 있었다.
첫 테스트에 비해 다소 긴 시간. 아직 공간이동 중이란 의미였다.
타임머신에 축적된 에너지를 나타내는 숫자가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100%로 가득 차 있었는데 첫 테스트 후 95%를 가리키더니 지금은 30%대로 뚝 떨어졌다.
역시 이 타임머신은 이론 확인용으로 제작되어 그 규모가 작았다. 이 정도의 에너지 크기라면 가득 채워도 예전처럼 다이어리 네 권을 동시에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기껏 한 권 정도나 가능할까.
새삼 구인혁은 예전에 자신이 만들었을 타임머신의 규모를 상상하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LTCM의 도움으로 제작했을 그 타임머신은 가히 괴물이었던 모양이다.
복잡하게 움직이던 컨트롤 모니터의 수치가 하나로 수렴됐다.
수첩이 예상대로 시공간을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숫자가 표시됐다. 남은 에너지 역시 23%. 지금 남은 에너지로는 가까운 과거나 미래가 아닌 먼 시간대라면 시공간 여행이 불가능할 수준이다.
“끝났다.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구인혁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끝났음을 알렸다.
박성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시도로 과거가 바뀐다면 지금 현재는 언제 바뀌지?”
시공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물론 그 답을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구인혁밖에 없다.
“빠를 때는 지금 당장, 느리면 24시간. 그 영향을 받아 천천히 바뀔 거다.”
의문을 표하는 그에게 구인혁이 재차 설명했다.
“아마 지금 이곳에서 밖으로 나가면 뭔가가 바뀌어 있겠지. 어쩌면 이곳도 바뀔 수 있고. 여기도 천천히 사라질지도 몰라. 만일 박강수가 김현아랑 잘 되었다면 네 존재도 24시간 안에 사라질 거다. 그리고 유세라도…….”
“크크,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유세라의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 아버지와 오도욱은 감옥에서 집으로 와 있겠군. 와하하.”
박성한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이 모니터 화면을 향했다.
여전히 춤을 추며 몸을 부대끼는 네 남녀가 보였다.
“좋아, 난 이만 가지. 특별히 약물을 타라고 전화하진 않을 거지만 청춘남녀가 자기끼리 마음이 맞아 어떤 짓을 하는 건 나도 몰라.”
박성한이 흥에 겨워 컨테이너 밖으로 나갔다.
구인혁은 노트북을 가져가라고 소리치려다 멈추었다.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일단 구은서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휴대폰으로 구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휴대폰이 꺼져있음이 분명했다.
고민하던 구인혁은 재빨리 유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유세라 위험. 현재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아론의 집에 오도욱 아들과 함께 있음.
*
일단 과거로 보낸 수첩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것은 구은서를 위험에서 구한 다음에 해결할 문제였다.
구인혁은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 화면을 지켜봤다.
화면에 보이는 네 남녀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춤을 추고 즐기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지친 모습으로 네 사람이 소파에 다시 앉았다.
오준영이 일어나 싱크대 부근으로 가더니 포도주를 네 잔 마련했다. 그리고 그중 두 개의 잔에 하얀 가루를 타는 것이 보였다. 박성한이 말한 그 약물이었다.
구인혁은 깜짝 놀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구은서와 유세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론과 대화하며 웃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남자는 다 늑대라고 당부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어떻게 알까.
손에 땀이 배었다. 자칫하면 은서와 세라가 몹쓸 짓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게 될 판이었다.
오준영이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잔을 들고 왔다.
화면에 비친 오준영은 역시 잘 생기긴 했다. 구인혁은 그 녀석의 잘 생긴 상판대기를 날릴 수 없어 이를 갈았다.
포도주잔을 받아든 구은서와 유세라가 두 사내와 함께 건배를 외쳤다.
그때 갑자기 화면에 변화가 일었다.
과거로 보낸 수첩의 효과? 아니면?
실내로 누군가가 들이닥쳤다. 보안관 복장을 한 네 명의 카운티 경찰이었다.
그가 유서준에게 문자를 보내고 14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1987년 8월 29일]오후 3시경. 서울대 기숙사 운동장.
박강수는 주말을 맞아 기숙사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경제학과와 경영학과의 정기 학과 대항전.
점심시간 직후에 시작된 축구는 경제학과의 3 대 2 승리로 끝났다.
과대표인 그는 축구공과 유니폼을 비롯한 각종 장비를 챙기고 친구들을 사전 예고한 모임 장소로 안내했다.
대충 마무리를 지었을 즈음 같은 과의 친한 녀석이 뛰어왔다.
“어이, 강수야!”
박강수가 안경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시선을 돌렸다.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 이게 떨어져 있더라. 네가 주인 찾아 줘.”
박강수는 별생각 없이 친구로부터 물건을 받았다. 바로 유서준의 다이어리 네 번째 권과 박성한이 보낸 작은 수첩이었다.
그는 맨 끝에서 친구를 따라 이동하며 다이어리를 폈다.
누군가의 일기인 모양이었다. 겉가죽이 낡은 것이 시간이 꽤 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2017년 1월 1일?”
일기를 쓴 날짜가 이상했다. 순간 그는 미친놈이 쓴 일기장이란 생각을 했다.
마침 눈앞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에 다시 다이어리를 훑었다. 일기 내용 중에 김현아라는 이름이 보였다.
“이게 뭐야?”
글을 쓴 사람이 그가 아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학과 친구이거나 아니면 동아리 친구이거나.
반쯤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려다 포기했다. 김현아란 이름이 눈에 띈 이상 나중에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박강수는 다이어리는 접어두고 작은 수첩을 펼쳤다. 수첩에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다.
굵은 사인펜으로 삐뚤삐뚤 적은 글씨가 보였다.
*
절대 김현아를 가까이하면 안 된다. 김현아와 사귀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
“어느 미친놈이야?”
박강수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잖아도 김현아가 유서준과 잘되고 있는 것 같아 분해 죽을 지경인데 어느 놈이 이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미친놈.”
박강수는 미련 없이 작은 수첩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다.
그리고!
미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
[2028년 8월 1일]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바하마 섬.
휴양지로 유명한 이곳의 한 섬에 어둠이 진하게 깔려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야자수가 군데군데 서 있어 한가로운 풍경을 자아냈다.
어느 한 야자수 아래 튼튼한 그물로 짜인 해먹이 걸려있었다.
해먹 위에 한 쌍의 남녀가 몸을 포개고 누워 있었다.
바로 유서준과 서하나였다.
두 사람은 여름 휴가를 맞아 이곳 바하마 섬으로 온 것이다.
“아, 다 끝났나요? 수고하셨습니다.”
유서준이 휴대폰을 끊었다.
서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래요?”
“다행히 금방 찾아서 집안을 수색했다고 하네. 싱크대에서 데이트 사고에 쓰이는 약물인 아티반을 발견했다는데? 큰일 날 뻔했어. 상대 남자는 오도욱의 아들인 오준영이라 하고. 현재 조사 중이래.”
모두 무사하다는 말에 서하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금권력이란 게 대단해. 전화 한 방에 지역 경찰이 총출동 하네.”
유서준은 구인혁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로드아일랜드 지역 경찰서로 전화했었다. 그가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워낙 유명인사다 보니 곧바로 해당 지역에 비상이 걸리고 아론의 집을 찾았다.
대기했던 경찰이 순식간에 아론의 집을 습격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십 분여. 일반 사람이 신고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을 속도였다. 유서준이 부의 정점에 올랐음을 입증해주는 증거였다.
“세라 녀석, 평소에는 남자에게 관심 없다더니 그거 다 거짓말이었어. 바하마 섬으로 휴가 가자고 했더니 공부하느라 시간 없다고 박박 우기더니만.”
유서준이 투덜댔다. 곧바로 그의 불평이 서하나에게 전달 됐다.
“이건 전부 당신이 딸 교육을 잘못시켜서 그래. 세라가 아무 남자나 막 따라다니잖아?”
“내가 무슨 교육을 잘못시켜요?”
“그럼 당신을 닮아서 그렇든가.”
“아니, 이이가 정말?”
서하나가 발끈하며 몸을 일으켰다.
해먹을 올라타고 있는 두 사람은 현재 수영복 차림이었다. 유서준은 수영복 팬티만 입고 상의는 벗은 채였고 서하나는 조그만 하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서하나가 몸을 움직이자 해먹이 좌우로 흔들흔들 움직였다.
서하나가 도끼눈을 하며 유서준을 째려봤다.
“내가 어때서요?”
유서준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나랑 사귀기도 전에 내 앞에서 술 마시고 떡이 됐잖아?”
“그야 당신 앞이었으니 그랬잖아요.”
“내가 나쁜 사람이었어 봐. 그날 당신 가만히 안 두었다고.”
서하나가 눈을 흘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푸하하, 나쁜 사람 아니래. 그날 볼 것 다 봤다고 했으면서.”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 아냐. 마누라나 딸이나 남자 앞에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어디…….”
유서준의 핀잔에 서하나가 정색했다.
“그래서요? 정말 제대로 밝혀봐요. 그날 어디까지 봤어요?”
공세를 외치던 유서준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한발 물러섰다.
“아, 그…… 그게.”
“그래서요?”
서하나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를 노려보았다.
유서준이 찔끔 몸을 움츠렸다.
“예전에 말했잖아? 택시 안에 있을 때 블라우스 단추가 뜯겨나가서 브래지어가 보였고 치마가 걷혀서 팬티만 봤었다고.”
“정말? 아닐 것 같은데? 나쁜 사람이라며?”
서하나가 수상쩍은 눈초리로 해명을 요구했다.
유서준이 눈치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서하나가 묘한 눈초리로 째려봤다.
“그런데 볼 것 다 봤다는 말은 또 뭐야?”
“아, 그게…….”
유서준이 금방 꼬리를 내렸다.
서하나가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날 봤어? 안 봤어?”
허리가 꼬집히는 고통에 유서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봐…… 봤어.”
“어디까지?”
“쪼…… 쪼금 벗겨봤어. 당신 같은 미녀가 그렇게 노출하고 있는데 어떻게 참아.”
“만졌어? 안 만졌어?”
“쪼…… 쪼금…….”
“거봐, 나쁜 사람 맞잖아. 흑흑, 난 속았어. 늑대였어.”
서하나가 투덜대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어? 그럼 이상하다. 현아도 나랑 똑같이 술에 떡이 되어 서준 씨가 데려온 적 있었잖아?”
“응, 911 테러 때?”
서하나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그럼 현아는 어디까지 봤어? 현아도 속옷까지만 봤다고 했는데 그거 거짓말이지?”
“응?”
유서준은 이상한 쪽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화들짝 놀랐다.
서하나가 다시 맹렬하게 허리를 꼬집었다.
“진실을 말해. 현아는 어디까지?”
유서준이 그녀의 손을 피하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혀…… 현아도…….”
“전부다?”
“으…… 으응.”
“이 늑대야!”
서하나가 유서준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유서준이 웃으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도망치려는 그녀를 유서준이 해먹 아래로 옭아맸다.
해먹이 한차례 크게 출렁였다.
해먹 아래로 하얀 비키니 수영복 두 조각이 떨어졌다.
잠시 후.
“끄악!”
두 사람의 비명이 울렸다.
해먹 줄이 유서준의 과다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카리브해를 비추는 반짝이는 별빛이 두 사람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작가의 말
지금까지 애독해 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산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