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4
제164화 – 시작함세.
나는 아르와 처음 만났던 방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그녀는 따뜻한 눈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노인네를 본 듯 가슴이 뭉클했다. 여전히 깊고 그윽한 눈이었다.
큼직한 전용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용왕이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은 오치나 퍼즈 같은 장치가 없으니 안심하고 앉게나. 물론 자네가 원하면 퍼즈를 심어줌세. 어디에 있든 우리 딸이 달려가 만날 수 있도록.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바람이라도 피우면…….”
“아버지, 제발.”
그녀로서는 꽤 인내심을 발휘했던 아르가 더 참지 못하고 용왕의 주접을 끊었다.
움찔한 용왕이 말의 줄기를 바꾸었다.
“그건 그렇고 왔으면 조용히 나를 부를 것이지 어째서 그렇게 요란하게 문을 두드린 겐가?”
“용궁이 정말로 철옹성인지 보고 싶었소.”
“그래? 어떻던가?”
“확실히 딴딴하긴 합디다. 하지만 삼제(三帝)가 검과 도와 창으로 같은 곳을 공략하면 쪼개질 듯싶소.”
용왕이 즉시 반박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손가락만 빨고 있게? 바다 아래로 잠수하면 그치들이 어쩔 건가? 물속에서는 강기의 위력이 반감되는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거기에 우리에겐 막강한 무기들이 있다네. 해저에서는 우리가 천하무적이란 말일세.”
아르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니 용왕의 큰소리에 근거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까는 왜 나온 거요? 만약 그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소? 용궁 안에서 바깥이 보이는 건 아닐 텐데.”
“형체를 분간할 순 없으나 몇 명이 왔는지는 알 수 있네. 딱 하나더군. 그러니 내가 겁먹을 게 무어야. 창제든, 검제든, 도제든 일대일로는 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네. 뭐, 아르가 불청객이 자네 같다고 하긴 했지만.”
그제야 나는 수긍했다. 용왕의 장담처럼 용궁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요새였다.
웬일인지 용왕이 되도 않는 설사 핑계를 대며 일찌감치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르가 나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도록 배려한 듯싶었다.
둘만 남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아르가 속삭이듯 조곤조곤 물었다.
“벌써 목표를 달성했나요?”
“그렇지는 않소. 실은 아직 한참 남았소.”
전날 용궁 부녀와 헤어지며 나는 개세팔천 중 둘을 상대할 수 있는 무위에 도달하면 그들을 찾겠다고 했다. 즉, 서역에서 천지조화지경에 들고 천마의 마정에 깃든 마력도 완전히 취한 연후 후사를 도모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인가요?”
아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설마 용왕과 같은 답을 기대하는 건가.
나는 에둘러가지 않고 용건을 밝혔다.
“용왕의 힘이 필요해서 왔소.”
아르의 눈빛에 언뜻 실망감이 어렸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중원이나 서역에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요?”
“변고까지는 아니고 좀 신중하게 대비해야 할 일이 있소.”
“그게 뭔가요?”
나는 이제 이레 앞으로 다가온 검제와의 비무에 관해 아르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즉각 상황을 파악했다.
“그이가 창제와 도제를 끌어들일 거라 보는군요? 그러면 아버지가 견제하더라도 한 명이 부족한데, 무후와는 협의가 됐나요?”
나는 감탄했다. 문상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아르도 하나를 들으면 열을 헤아리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일단은 그렇소.”
아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변수가 있나요?”
“밀왕이 그들에게 가세할지도 모르오.”
아르의 갸름한 눈이 동그래졌다.
***
나는 저간의 사정을 아르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검룡이 사이한 술법으로 양천의 몸을 취했음을 알게 된 아르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안진을 납치한 대목에서는 비명까지 토해냈다.
“이를 어째. 큰일이네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요.”
정말 그랬다. 안진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심장이 타들어 갔다. 선정의 공능이 아니었다면 진즉 심마에 들었을 터였다.
내가 이럴진대 소중한 이를 끔찍한 방식으로 잃은 이들은 어떻겠는가. 나는 내게 원사를 들려준 이들의 피맺힌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아르는 섣부른 위로를 삼가고 대신 냉정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자가 밀왕을 부린다고 가정하면 확연한 열세네요. 달리 방비책이 없다면 검제와의 비무에 응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나우와 문상의 협조를 얻어 그자의 행방을 찾는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어떨까요? 그게 안 소저의 안위에도 이로울 거예요. 오 공자가 건재한 한 인질의 가치가 상당한 그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요. 나우나 문상이 그자의 소재를 알아내면 아버지와 함께 구출하러 가요.”
그럴듯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조언이었다.
“그러고 싶지만 불가하오.”
“어째서요?”
“무후가 검제를 꺾은 후 자기와 대결할 것을 바라기 때문이오. 벌써 날짜도 잡혔소. 십일월 십일일로.”
아르가 미간을 모았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 공자 편을 들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그렇더라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네요. 검제의 비무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예 성립이 안 되는…….”
말끝을 흐리더니 아르가 유순한 눈을 사납게 치떴다.
“혹시 무후에게 약점을 잡혔나요? 그녀가 아직 강해지기 전의 오 공자를 불러서는 본인 외에는 해소 불가능한 점혈 같은 금제를 가한 건가요? 오 공자에게 덤볐다가 폐물이 된 낙일쾌검 대신 자기 사냥개로 삼으려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마치 어린 문상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점혈이 아니라 벌레였소.”
나는 놀라는 아르에게 천지쌍고에 관해 털어놓았다.
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후나 문상에게 비난을 퍼부을 줄 알았더니 그녀의 입술에서 뜻밖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귀가 솔깃했다.
“독고를 빼낼 수 있단 말이오?”
“어쩌면요.”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떻게 말이오?”
“그 전에 독고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들려줄래요?”
“좁쌀보다도 작소. 생긴 건 진드기와 비슷하오. 더듬이와 다리가 앞쪽에 몰려있고 뒤는 둥글고 펑퍼짐하오.”
“다른 특징은요?”
“주둥이에 이빨 같은 매우 강력한 도구가 있는 듯하오. 내 머리뼈를 뚫고 들어갈 만큼. 그러면서 무지하게 예민하오. 강자들과 혈투를 치를 때는 몸을 돌돌 말고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소. 하지만 내가 내기로 움직이려 들면 격렬하게 반응하오. 자칫 제 몸을 터뜨려 내 상단전을 파괴할까 봐 손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오. 붙들고 앉아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성질이 보통 더러운 게 아님은 분명하오.”
아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쉽지는 않겠네요.”
당연하지. 쉬웠다면 내가 반년이 넘도록 어떤 해법도 찾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았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나는 목구멍에 걸려있던 질문을 내뱉었다.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요?”
아르에게 즉답이 나오지 않아 불안해졌다. 설마 그새 난이도 상(上)에서 아예 해결 불능으로 바뀐 건가.
애를 태우던 아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방법 자체는 지극히 간단해요. 본궁에 피를 뽑는 데 쓰는 세침이 있어요. 머리카락 한 올만큼 얇지만 안이 비어있죠. 그 침을 오 공자 머리에 꽂은 후 독고를 단숨에 빨아들이는 거예요.”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내 속을 읽은 듯 아르가 분발했다.
“본궁에는 신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기물이 있어요. 그 기물을 써서 독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후 최고의 전문가로 하여금 단번에 빼게 하면 돼요.”
‘특별한 기물’엔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았으나 ‘전문가’라는 단어는 귀에 박혔다.
“최고의 전문가라니? 용궁에 그 방면의 시술에 능통한 이가 있소?”
“그래요. 다름 아닌 내 아버지예요. 독고가 그렇게 예민한 미물이라면 최대한 은밀하게, 그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해치워야 할 거예요. 그럴 능력이 있는 이는 아버지밖에 없어요. 침을 두개골 안으로 찔러 넣는 것 자체는 나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조금의 요동도 없이 해내는 건 불가능해요. 그리고 세침이 독고에게 닿기 전에, 그리고 그 미물이 눈치채기 전에 빨아들이는 것도 아버지가 월등히 나을 거예요. 흡입력이 나와는 천양지차니까.”
내 목숨이 달려있는지라 무작정 수용하기는 어려웠지만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얘기였다.
***
우리는 용왕을 다시 불러들였다.
사정을 들은 용왕이 무후와 문상을 대상으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더니 수박만 한 주먹으로 제 가슴을 탕탕 쳤다.
“나만 믿게, 천룡. 자네의 머리에서 그 고약한 벌레 새끼를 뽑아내 잘근잘근 씹어줌세.”
조금도 미덥지 않았다. 저렇게 투박하고 큼직한 손으로 그렇게 섬세하고 정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자칫 실수하기라도 하는 날엔 전생도 못 해보고 생을 마감해야 할 판이었다.
신이 난 용왕이 마치 결정이 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재촉했다.
“자, 자, 어서 포르로 가세나. 거기엔 자네 뼈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도구가 있다네. 그걸로 벌레 새끼가 든 곳을 확인한 후 단박에 낚아 올려줌세.”
나는 나를 떠미는 용왕의 우악스러운 손을 떼어놓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간 영악하고 까다로운 놈이 아니오. 한낮 벌레로 취급하다간…….”
용왕이 후려갈기듯 내 어깨를 쳤다. 몸이 날아갈 뻔했다.
“걱정 붙들어 매게. 어련히 알아서 할까 봐. 설마 그 벌레 새끼를 뽑아내는 도중에 탈이 날까 봐 간이 졸아서 이러는 겐가? 자네가 이런 겁보인지는 미처 몰랐구먼. 자자, 나를 믿고 용기를 내게나. 백척간두진일보일세. 일이 잘못된들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이 인간이 그걸 말이라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거리는 용왕의 낯짝에 약이 올라 시술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자고 파투 놓으려던 찰나 아르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경망스럽게 구니 오 공자가 걱정하지요. 나라도 주저하겠어요. 오 공자의 생사가 달린 중대사예요. 그에 걸맞게 무겁고 듬직한 언행을 보여줘요, 아버지.”
아르의 나무람에 용왕이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마저 내 뜻을 몰라주다니. 중요한 시술을 앞둔 천룡의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한 방편이었잖으냐. 아무려면 내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청상과부로 만들까 봐서.”
“아버지, 제발!”
“오냐, 오냐. 그리 간청하지 않아도 내 초극의 집중력을 발휘해 기필코 사위의 머리에 든…….”
“아버지!”
“알았다니까.”
희한하게도 부녀의 유치한 신경전을 보고 있자니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정말로 용왕이 이를 의도한 걸까. 아르는 알면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장단을 맞춰준 걸까. 그런 것도 같고 아닐 듯도 싶고, 심히 헷갈렸다.
우리는 ‘포르’에 갈 필요가 없었다. 선정의 투시안으로 내 두개골의 형태와 독고의 위치를 정묘하게 그려내 용왕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왕의 평정을 위해 아르가 방에서 나간 후 나는 검지만 편 왼손을 귀 옆에 갖다 대며 그에게 재삼재사 당부했다.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 즉시 멈춰야 하오. 절대로 임의로 진행해서는 안 되오.”
“알겠으니 그만 눈을 감게나. 그런데 정말로 마혈을 짚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방금 말한 주의사항이나 명심하시오. 조금만 늦어도 천추의 한을 남길 터이니…….”
“허어, 부창부수라더니 누가 짝 아니랄까 봐 잔소리 신공이 내 딸아이 못지않네그려. 그쯤 하게나. 한 번만 더 들으면 열 번일세. 귓구멍에 인이 박일 지경일세. 자, 시작함세.”
말릴 겨를도 없이 용왕이 손에 쥐고 있던 한 자 길이의 대침을 급소 중의 급소인 백회혈에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