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5
제165화 – 언제든 환영이오.
머리 가죽은 얇다.
그 바로 아래 있는 두개골도 별로 두껍지 않다. 두께가 채 반 치도 안 될 터였다. 다시 말해 독고에게 도달하는 데 굳이 한 자나 되는 대침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었다. 바느질할 때 쓰는 침 정도의 길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용왕이 내 목구멍까지 내려갈 수 있는 대침을 거침없이 꽂아 넣는 기색이자 나는 기겁했다. 반사적으로 검지를 움직여 그를 제지하려는 찰나 살갗에 닿은 대침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통찰안으로 용왕을 살펴본 나는 그가 고도로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둘 다 호흡을 닫고서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미동도 없었기에 방 안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정수리에 닿은 대침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용왕에게서 주의를 돌린 나는 독고에 온 신경을 몰아넣었다. 자기에게 닥칠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고는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대침이 거의 붙었다고 여긴 순간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작디작은 더듬이를 꿈틀거렸다.
나는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몰랐지만 나로서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조짐이었다. 아르는 미물이라고 폄하했지만 몇 달간 씨름을 하고도 어찌하지 못했던 터라 나는 놈을 영물이자 강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독고의 반응속도였다. 영물이라고 해도 사고력이 있을 리 만무하니 단지 본능으로 주변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일 테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더듬이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나는 갈등했다.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철군해야 할까.
내 선택은 후자였다.
검지의 신호에 따라 시술을 중단한 용왕이 대침을 천천히 뽑아냈다. 그러고는 대침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뜬 나도 호흡을 재개했다.
용왕의 두꺼운 입술에서 불만 가득한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막 빨아들일 참이었는데 왜 말린 겐가.”
“위험했소.”
용왕이 작은 눈을 씰룩였다.
“자네가 이다지도 소심한 사람인지 몰랐구먼.”
“목숨이 걸렸는데 신중하게 구는 건 당연한 처사잖소?”
“나는 자신 있었네. 다시 해 봄세. 나를 믿고 맡겨주게나.”
“미안하지만 예감이 안 좋소. 용왕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벌레가 극도로 예민한 놈이라서.”
“그럼 이대로 무후의 노예 노릇을 하며 살 텐가?”
“천만에. 그럴 리가 없잖소. 다른 방법이 있을 거요.”
“무슨 방법?”
“다음 단계에 접어들면 수가 나올 것 같소. 우리 선맥에서는 신선지경이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신적인 권능을 취득하는 경지요. 이제 머지않았소.”
“너무 막연한 소리가 아닌가?”
정곡을 찌르더니 용왕이 나를 막판으로 몰아넣었다.
“신선이란 게 되고도 머리에 든 벌레 새끼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어쩔 텐가?”
나는 용왕이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
“그땐 신세 좀 집시다.”
그제야 용왕이 나를 놓아주었다.
***
검제와의 비무일까진 이레나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며칠간 용궁에 머무르기로 했다. 누구보다도 용왕이 반색했다. 그동안 아르와 만리장성을 쌓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의주를 보기를 청함으로써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성구에 들어갔다 나오면 최소한 닷새는 자르에 갇혀있어야 하네. 지난번처럼 열흘이 걸릴 수도 있고. 그러면 시간을 지키지 못할 게 아닌가.”
“만약 내가 제때 통에서 나오지 못하면 용왕이 우장평으로 가서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날짜를 십일월 초하루로 미루자고 해 주시구려.”
“그러지 말고 다음에 들게나.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굳이 지금 볼 게 무언가?”
“언제 또 올지 모르잖소? 무엇보다 당장 확인하고픈 게 있소.”
“그게 뭔데?”
아르가 용왕과 나의 실랑이를 중단시켰다.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가요, 오 공자. 성구로 안내해줄 테니.”
아르의 눈을 본 용왕이 구시렁거리면서도 뒤로 물러섰다. 나는 냉큼 아르를 따라 방을 나갔다.
나선형의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족히 십이삼 장은 내려온 것 같았다.
이윽고 바닥에 이른 아르가 전면의 회색 벽을 가리켰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사항들도 기억하나요?”
“그렇소.”
“좋아요.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르가 비켜서자 나는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 손을 대니 마치 물처럼 출렁거렸다. 나는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벽이 나를 빨아들였다.
원형의 공간은 여전히 좁았다.
나는 중앙에 떠서 느릿느릿 회전하는 비취색 구슬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실제로 내 투시안은 구슬을 관통해 내부를 속속들이 보여주었다. 석 달 전엔 수박 겉을 핥는 수준이었는데 선력의 증강 덕분에 이제는 전체를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약간 부족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여의주 안에는 밤톨 크기의 적구(赤球)가 들어있었다. 그 시뻘건 구체는 아무리 선력을 끌어올려도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얼마간 시도를 거듭하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적구를 제외한 구조를 살피는 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확신했다. 여의주 안에 수천 가닥의 실핏줄처럼 이어진 선들은 환상환의 그것들과 흡사했다.
두 기물은 동일한 장인, 혹은 집단의 작품임이 틀림없었다.
성구를 나온 나는 아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통나무 모양의 침구에 들어가 몸을 눕혔다.
뚜껑이 닫히자 완벽한 어둠이 나를 감쌌다. 지난번에 선정에 든 상태였음에도 깜박 잠이 든 것 같은 기사를 경험했던지라 이번엔 의식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지만 ‘자르’ 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탐지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암흑뿐이었고 내 신체도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일더니 돌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듯했다.
통나무가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아르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났소?”
“나흘 반나절이요. 역대 최단 기록이에요.”
아르는 감탄조로 말했지만 찜찜할 따름이었다. 닷새 가까이나 시간의 경과를 감지하지 못하고 송장처럼 누워있었다니.
대체 이 괴이한 기구를 만든 이들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용왕의 말처럼 정말로 신인(神人)들이었을까. 아니면 서역의 신화에 나오듯 신(神)들 그 자체였을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
아르와 나는 용궁 지붕 위에 나란히 올라앉아 낙조를 감상했다. 벌건 하늘과 퍼런 바다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했다.
“아름답죠?”
“그렇구려.”
짧은 문답을 나눈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르와 공유하는 침묵이 편안하면서도 무언가 매듭을 지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이제 용궁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작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나에 대해 아르에게 말해주고 싶소.”
아르가 수평선에 입맞춤하는 태양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맑고 깊고 선한 눈. 내가 첫눈에 반했던 눈.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도인이셨소.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마인의 후예라 여기며 살아왔소. 나를 키운 어른에게서 그이들이 천마의 재림이라 들었기 때문이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거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었소.”
나는 아르에게 내 부모의 비사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문상처럼 수시로 질문을 던지며 흐름을 끊지 않고 묵묵히 귀만 기울였다.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어느새 해가 떨어져 달과 별들이 야천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라는 내내 본성을 착각한 탓에 웃지 못할 일이 많았소. 여자에 대한 것도 그중 하나였소. 이성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자 나는 당혹감에 빠졌소. 조부를 따라 천하를 주유할 때 숱하게 관찰했던 현상이 나에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소. 하지만 조부에게 그러한 마음을 들키기 싫어 의도적으로 속세로 다시 나가자고 졸랐소. 여자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이유를 표면에 내세우며. 내 바람대로 조부는 내 청을 물리쳤소.
그러고도 조부를 속이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 틈날 때마다 여자 타령을 해댔소. 그러면서 훗날 천지조화지경에 들어 금욕의 금제가 풀리면 일백의 왕비와 일천의 후궁을 둘 거라 큰소리쳤소. 조부는 신선이 되면 음욕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장담했지만 나는 반신반의했소.
조부가 육신을 버리고 떠난 후 세상에 나온 나는 내가 정상임을 확인하고는 안도했소. 이런저런 여인들을 접하며 보통의 사내들처럼 욕정도 일었고 빼어난 미모에는 혹하기도 했소. 다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쨌든 내가 여인들에게 끌렸다는 게 중요했소. 더욱이 너무나 매혹적인 눈을 가진 이에겐 연심까지 느꼈소.”
일순 아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한 듯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아르를 흘긋 바라본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난 몇 달간 내 선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소. 조부가 이르길 하나 오르는 데만 수십 년이 걸릴 거라던 두 개의 고개를 반년 만에 넘은 나는 마지막 봉우리만 남겨두고 있소. 아직 단정하긴 이르나 정상에 이르면 음욕에 관해 조부가 예언한 바가 실현될 듯하오. 그날이 오기 전에 미리…….”
아르가 내 뒷말을 막았다.
“그걸로 충분해요, 오 공자. 말해줘서 고마워요.”
뜻밖의 언사였다.
“조금 기이했어요. 오 공자와의 관계가 깊어지면 질수록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후련함이 더 커요. 더 이상 안개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될 테니까.”
“미안하오.”
“그러지 말아요. 나는 오 공자의 고백을 나에 대한 존중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
“그래서 고맙다고 한 거예요. 안개를 걷어내 줬으니까. 그 너머의 길이 내가 바라는 곳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기꺼이 감내할 작정이에요. 걱정은 말아요. 오 공자에게 집착하지는 않을 테니. 다만 오 공자를 향한 내 마음은 변함없이 간직하겠어요. 오 공자가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를 가지듯 나도 내가 원하는 삶을 택할 권리가 있잖아요. 앞으로 보지 못해도 괜찮아요. 나를 잊어도 좋고요. 하지만 가끔 얼굴을 마주하고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너무 욕심일까요?”
“그렇지 않소. 아르와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정을 나누었으면 하오.”
아르의 자그마한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마지막이라니. 아르라면 언제든 환영이오.”
먼저 일어선 나는 아르의 손을 잡아당겼다. 몸을 일으킨 아르가 내 허리에 두 팔을 둘렀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천공의 달이 우리의 포옹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아르와 최고의 마무리를 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용궁을 떠났다.
그녀는 검푸른색으로 변한 바다로 몸을 날리는 나와 용왕을 배웅하며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목적지인 우장평까지는 칠천이삼백 리를 가야 하지만 전날 문상과 합의한 검제와의 비무일은 이틀이나 남아있었기에 나는 느긋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먼 수평선에 육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을 때 비행 속도를 최고로 끌어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