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53
353. 외전 – 죽음이 추가한 이야기(1)
[아들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선택을 지지할 거란다.]
***
8년간의 긴 전쟁이 끝나 데온 하르트가 영웅으로서 귀환한 날 밤, 하르트 백작가의 가주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아내의 앞에 자리했다.
사용인도, 크루엘도 없는 오롯한 둘만의 시간. 잔잔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먼저 말을 꺼내 주길 차분히 기다리는 배우자의 침묵을 배경 삼아 담담히 입을 열었다.
“데온, 그 아이가 생환했다는 소식은 들었을 거요.”
백작 부인의 잔에 술이 채워졌다.
아마 다른 이들이 이를 보았다면 아들이 영웅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술이라 생각하겠지. 당치도 않은 소리다. 백작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아마… 우리를 원망하고 있겠지.”
“…….”
“아니, 생환했음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원망한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술이 어디 기쁠 때만 마시는 것이던가.
본인의 잔을 채우는 적보랏빛 물줄기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언뜻 목소리도 흔들린 것 같았다.
……아이를 데려올 수 없었다. 빼낼 수 없었다. 건강하고 검술에 능한 첫째로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다.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일부러 방해하기라도 하듯, 항상 데온을 데려오기 위한 모든 조치가 엇갈렸다.
조치를 위해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는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텐데. 미칠 것 같았다.
“……새삼스러운 말이네요.”
백작의 손에서 와인병이 빠져나갔다.
깔끔하게 잔에 술을 따라 준 백작 부인이 그 주변에 형편없이 튄 액체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더니 벽난로에 던진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손수건에 백작이 시선을 뺏긴 찰나, 뻗어 온 고운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잖아요. 당신, 무슨 정보를 들은 거예요?”
“…….”
배우자의 단호하면서도 걱정 어린 얼굴을 앞에 두고, 언제나 굳건하던 가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 아이가…….”
제 약한 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아비가 칼에 찔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논공행상에서 폐하께 독대를 청했소.”
“아…….”
보통은 공개된 자리에서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게 정석이다. 알려져서는 안 될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럴 이유가 없거늘, 독대라니.
무언가 예상한 백작 부인의 얼굴이 슬픔으로 흐려졌다.
“우리 가문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네요.”
“……그렇소.”
최악의 경우, 가문 사람들 모두가 죽게 되겠지.
“우리가 많이 원망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원치 않게 지옥에 끌려갔다 왔으니까.”
그 약한 아이가 지옥에서 아득바득 살아 돌아왔으니, 남은 것이라고는 당연히 악밖에 없으리라. 정이고 뭐고 8년간 이어진 피바다에서 모조리 마모되었을 터.
“……부인.”
백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나는, 그 아이가 무슨 선택을 하든 받아 주고 싶소.”
내가 무능해서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속죄하고 싶지만, 이쪽에서 먼저 속죄할 방법은 없다. 그 아이가 복수하겠노라 나서 준다면 오히려 기쁠 따름이지. 그렇기에 이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기꺼이 받아 주고 싶다.
하지만, 아이의 원망은 ‘가주’만이 아닌 ‘가문’ 전체를 향한 것이 거의 확실해서.
“그러니… 죽음으로 위장하고 크루엘과 떠나시오.”
차마 다른 가족을 끌어들일 수 없는 백작은 아내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고 애원하듯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마차 사고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 아이도 가주인 나와 내 가문이 타격을 받는다면 만족할 테니….”
“여보.”
“…….”
“‘우리’ 아이예요.”
말이 ‘타격’이지, 백작은 최악의 가정인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백작 부인이 굳은 얼굴로 손을 빼냈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찌 절 빼놓으려 하나요.”
“…….”
“뭐… 그래도 크루엘을 빼내려 한 건 마음에 드네요. 그 아이가 책임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데온이 전쟁터에 끌려가던 당시에는 크루엘 역시 성인이 아니었다. 만약 성인이었다 해도 가주가 아닌 데다, 데온을 낳은 부모도 아니니 마찬가지로 죗값을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
적어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백작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오.”
죽을 수도 있단 말이오.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돈다. 괜히 입 밖에 내었다가 안 될 예정이었던 것도 실현되어 버릴까, 짧게 내뱉고 침묵하는 백작을 향해 백작 부인은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알아요.”
“……역시 당신은 못 이기겠군.”
백작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가 용사의 동료로서 다시 길을 떠난다고 했소. 필시 청한 것이 과해서 조건이 더해진 것일 테지.”
인재를 아끼는 현 황제가 조건을 추가할 정도로 ‘과한’ 바람. 백작은 어쩐지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폐하의 성격상 데온이 목적을 이루고 돌아오는 즉시 약속을 이행할 것이오.”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사용인의 수를 조금씩 줄여야겠네요.”
괜한 사람이 피 보는 건 원치 않으니까.
눈치챘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사용인들이 남아 있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편이 좋을 터.
물론 어지간해서는 사용인들까지 건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를 택한 백작 부인이 다시 백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거기에 담긴 재촉의 의미를 읽은 백작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리고 아이가 돌아오는 날 바로 크루엘을 다른 곳에 보내도록 하지.”
“현명한 판단이에요.”
죽음으로 위장해 대피시키려 해도 크루엘, 강직한 그 아이가 상황을 파악하는 즉시 거절할 게 분명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곳에 보내 두는 편이 낫지.
“반역으로 몰리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으니 그곳에 신분 세탁을 위한 준비도 해 두겠소.”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신분을 바꿀 수 있도록.
“완벽하네요.”
백작 부인이 곱게 눈을 휘었다.
백작은 그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받쳐 들었다. 손등에 입술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사과가 흘러나왔다.
“미안하오. 내가 무능해서 당신까지 피해를 보게 되는군.”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손등을 스치며 간질인다. 이를 지켜보던 백작 부인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올려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독하리만치 다정한 음성이 사랑을 담고 속삭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제 무능 역시 말해야 할 테죠. 그런 말 말고, 다른 말을 해 주시겠어요?”
“……사랑해.”
“저도요.”
***
별의별 상황을 다 각오하고 있던 백작 부부는 자신들을 직접 죽이러 온 데온을 마주하고 잠시 멍해졌다.
흉흉한 붉은 눈과 숨 막히는 살기. 잔인한 손속으로 사용인들을 죽여 가며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들 앞에 선 그 아이는 전보다 더 야위었고, 전에 없던 광기를 품고 있었다.
‘아.’
그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광기에 물들어 버렸구나.’
이 아이는 미쳐 버렸다는 것을.
가족에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가족의 품에 돌아가겠다는 일념하에 버텼더라면 이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겠지. 부모의 감각이 말한다. 이 아이는 배신감 때문에, 너무 슬퍼서 미쳐 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제 손으로 부모를 죽이겠노라 무기를 쥐고 앞에 선 아들을 보면서도 충격이나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앞섰다.
……미안했다.
“……크루엘이 없는데.”
“크루엘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 8년 전쟁에서 귀환했을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이제야 얼굴을 보이는구나. 그러고는 하는 말이 형을 찾는 것이라니.”
“누가 형이야.”
낯선 분위기의 청년이 낯선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흉흉한 살기에 몸이 떨릴 법도 하건만 의심의 여지 없는 내 아이이기에, 백작은 가만히 데온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꾸나.”
“…….”
“그동안… 다친 곳은 없었느냐.”
“……하.”
냉소가 공기를 얼렸다.
“없긴 왜 없겠어. 더럽게 많았지.”
“…….”
“뭐, 그래도 용케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 아니겠어? ……아니, 그쪽에겐 ‘다행’이 아니려나.”
비아냥이든 분노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여서, 백작 부부는 낯선 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라는 듯 흐린 미소를 짓고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저항 없는 태도에 눈앞의 아이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를 위해서 삼켜야 하는 말들이 꽉 다문 입 안에 맴돌았다.
‘아들아,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선택을 지지할 거란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니까.
다만.
‘크루엘을 찾았지?’
그 모든 선택은 우리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후에 어떠한 경로로 네가 후회하게 될 때 크루엘이 옆에서 다독여 줄 수도 있고, 혹시 모를 위험에서 지켜 줄 수도 있을 테니.
크루엘은 우리의 안배다.
‘우리를 죽임으로써 크루엘을 향한 분노까지 어느 정도 사그라들길 바라마.’
단검이 급소를 찌르고, 한 박자 늦게 격통이 느껴진다.
실력이 깔끔한 것이, 일만 잘 풀리면 크루엘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형제가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며, 백작 부부는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지 않고 순순히 저 아래로 꺼트렸다.
마지막으로 어렴풋이, 발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은 없을 텐…….
…….
“형님.”
***
데온 하르트가 용사의 시신을 챙겨 귀환한 날, 크루엘은 아버지로부터 한 가지 명령을 받았다.
어느 섬에 지어진 별장 관리 장부에 구멍이 있다며 직접 가서 확인하라는 것이었지. 차기 가주로서의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이지?’
크루엘은 의문을 가졌다.
왜 하필 데온이 돌아온 날일까. 그것도 당장 떠나라며 재촉하는 것이, 마치 저와 데온이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것 같지 않나.
이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발한 상황이라 평소였다면 그저 의문에서 그치고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위해 움직였겠지만, 오늘따라 원인 모를 불길함이 등골을 스친다.
하여 그는 말을 재촉하는 대신 그 의문을 붙잡고 파고들었다.
‘……데온이 8년 전쟁에서 귀환하고 논공행상 때,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던가.’
그리고 직후 용사의 동료가 되어 길을 떠난 것이고.
몸도 약한 아이가, 그것도 8년이나 전쟁을 치러 전투에 이골이 났을 장수가 굳이 다시 전장을 찾아 떠날 리 없다. 필시 이유가 있을 터.
‘데온이 청한 것이 과해서 추가 조건이 붙었나?’
비상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크루엘은 이동 속도를 조금 늦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추가 조건이 붙을 정도로 과한 요청이 뭐가 있지?’
아니, 애초에 데온이 ‘독대’를 통해 빌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지금의 데온이 바랄 만한 것은?
‘설마…….’
데온 하르트는 원치 않게 전쟁터에 끌려갔다. 아무리 영웅이 되어 귀환했다 한들 그때의 충격과 배신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터.
오히려 전쟁터에서 원망과 증오를 키웠다면…….
‘……안 돼.’
무언가 깨달은 녹안이 충격에 휩싸여 부서질 듯 흔들린다.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그저 손 놓은 채 빌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크루엘은 곧장 말을 돌렸다.
목적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실 하르트 저택.
미친 듯이 말을 몰며 입술을 콰득 씹었다. 그의 머리는 충격에 굳은 와중에도 또 하나의 진실을 유추해 냈다.
‘두 분은 알고 계셨구나.’
알고서, 나만 대피시킨 것이다.
무슨 생각이신지 알 것 같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말을 재촉하고 또 재촉해 왔던 거리를 최단 시간에 주파한 크루엘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저택 입구를 넘었다. 그렇게 피로 가득한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부모님의 방에서 발견한 것은.
“형님.”
……아버지의 심장에 꽂힌 단검을 뽑으며 이쪽을 돌아보는 데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