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66
제166화 – 시작하오들.
용왕이 정식으로 청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경신을 겨뤄보자는 그의 요청을 알아들었다. 그러고는 그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날지 궁금했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눈빛으로 합의를 본 우리는 대충 어깨와 호흡을 맞춘 후 일시에 최고 속력을 발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 걸려있던 화살처럼 그와 나의 신형이 ‘핑’하고 날아갔다.
초반은 난형난제였다.
무력으로는 확실히 우위를 점했지만 나는 비행에서는 용왕을 제치지 못했다. 경공만 따지면 개세팔천 중 단연 으뜸이라는 평가를 지닌 이답게 용왕은 좀처럼 나에게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지의 윤곽이 뚜렷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조금씩 앞서나갔고 차츰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드디어 해안가의 절벽에 이르렀을 즈음엔 이십여 장의 격차가 나 있었다. 낭떠러지 끝에 내려선 나는 용왕을 기다렸다.
쿵.
절구 찧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착지한 용왕이 거친 숨과 함께 욕설을 토해냈다.
“젠장.”
잠시 숨을 고른 용왕은 경주에 대한 소감 대신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아르에게 대체 뭘 한 겐가?”
질문의 요지를 알아듣지 못한 나는 반문했다.
“뭘 하다니? 뭘 말이오?”
“뭘 했기에 그 아이가 그리 요상한 태도를 보이느냔 말이지. 한편으로는 자네와 바라마지 않던 언약을 맺어 행복에 겨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이나 절망 같은 안타까운 기미도 보이더구먼. 내 딸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도무지 해석난망일세.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거든. 아르에게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빤하기에 이렇게 자네에게 묻는 걸세. 대체 뭘 어떻게 해서 아르를 그렇게 요상한 상태로 만들었는가?”
진실을 알리면 용왕은 크게 낙담할 터였다. 어쩌면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아르에 대한 예의로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아르의 몫이오. 그러니 그녀에게 들으시구려.”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딸아이에 관해서라면 눈치가 고금제일인일세. 딱 보니 아무리 캐물어도 절대로 실토하지 않을 걸 알기에 자네에게 묻는 게 아닌가? 그러니 말해주게나. 어째서 딸아이가 그리 대조적인 심사를 동시에 드리우는지.”
“미안하지만 역시 아르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듯싶소. 그녀의 허락 없이는 입을 열 수 없소.”
“그러긴가.”
“…….”
“좋네. 그럼 한 가지만 말해주게나. 내 딸아이는 지금 행복한 겐가, 불행한 겐가?”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만약 내 아이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치 않을 걸세.”
“내가 바라는 것도 그녀의 행복이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네. 자네만 믿네, 천룡.”
용왕이 언제 협박을 했냐는 듯 파안대소했다. 아르에 대한 그의 맹목적인 애정을 알기에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
우리는 다음 날 오전 목적지인 우장평에 당도했다.
전날 문상과 나는 검제와의 결전장을 그리로 정했다. 원래는 중립지대의 대도(大都)들 중 한 곳을 골라 대결할 예정이었으나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고려해 장소를 변경한 것이었다.
범인(凡人)의 참관을 제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럼에도 너른 벌판엔 벌써부터 수많은 이들이 운집해있었다. 어림잡아 십만은 되어 보였다. 반년 전 도봉과 검룡의 비무를 보러 몰려들었던 오륙십만의 군중에는 크게 못 미쳤으나 강호에서 나름 행세깨나 한다는 무인들만 왔을 것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였다.
인파로 넘실거리는 들판에 들어서며 나는 불안감이 들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해가 뜬지 오래임에도 사위는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 때문이었다. 머리 위 수십 장 상공까지 내려온 암운은 금방이라도 폭우로 화할 것처럼 음험하게 일렁거렸다. 나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대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 폭포수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대기를 장악한 빗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도저히 탐색작업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엉뚱한 위인이 기감에 걸렸다.
그의 숨결을 확인한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악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지만 그는 칠 개월 전 구룡장에서의 난전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군자도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다가서자 사태를 파악한 군자도가 소스라쳤다. 하지만 감히 달아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어졌다.
나는 땅바닥에 오체투지한 군자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근사한 장원을 버리고 그동안 어디를 떠돈 게요?”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았음을 확인한 군자도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달달달 떨었다.
“죽여주십시오.”
“내가 왜 당신을 죽인단 말이오?”
내 반응이 뜻밖이었던지 군자도가 엉겁결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이마를 흙탕물에 박았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러니 죽어 마땅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그런가.
어떤 의미에서 군자도는 피해자였다.
그날 그는 나를 치라는 낙일쾌검의 명을 거부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시점에서는 낙일쾌검의 위세가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기실 월등한 정도를 넘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낙일쾌검에겐 십자무련이라는 엄청난 뒷배가 있어서였다.
그러니 군자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터였다. 그리고 적당히 시늉만 해서는 나중에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낙일쾌검에게 트집을 잡혀 횡액을 당할 우려가 컸으니 최선을 다해야 했을 터였다.
그런 그의 처지를 이해했기에 나는 그를 응징하고픈 의욕이 일지 않았다. 그가 그날의 사건 이후 모습을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고 찾으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냥 내버려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지 운이 나빠, 그리고 줄을 잘못 잡은 탓에 천하일백대고수에 무조건 들 강자에서 도망자로 전락한 그의 신세가 가엽기도 했다. 낙일쾌검이 아니었다면 군자도는 나의 비무 청을 흔쾌히 받아주고 상당한 양의 청화를 선사한 은인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 어떻게 징치할 수 있겠는가.
나는 결과가 아니라 동기를 중시해야 한다는 노인네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오. 나에게 칼을 겨눈 건 불가피한 결정이었잖소? 썩 유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십분 이해하오. 그러니 죽여 달라는 소리는 하지 마시구려.”
엎드려 있는 군자도의 등이 발작을 일으킨 듯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방금 전의 떨림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저를, 저를…….”
군자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나는 마무리를 지었다.
“이왕 왔으니 구경 잘하고, 그만 구룡장으로 돌아가구려. 마음이 내킨다면 나를 도와주러 와도 좋고.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바람에 일손이 많이 부족하다오.”
고개를 번쩍 쳐든 군자도가 부르짖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당신은 내 종이 아니오. 친구가 되겠다면 받아주겠지만.”
시끄러운 빗소리가 군자도의 울음소리를 삼켰다.
내 행사를 지켜본 이들에게서 조용한 소요가 번졌다.
나와 군자도의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그에게 아량을 베푼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내게 적잖은 득이 되었다. 군중이 발산하던 붉은 안개의 일부가 푸르스름한 운무로 바뀐 것이었다.
나는 우장평에 운집할 무인들의 구 할은 검제를 응원하리라 예상했다. 일세삼정(一勢三鼎) 중 나에게 우호적인 곳은 십자무련뿐이었다. 그리고 십자무련의 고수들은 무후를 앞세운 문상의 명으로 오늘의 승부를 관전하러 올 수 없는 처지였다.
나도 열흘 전 하동으로 떠난 건곤장을 통해 육마를 비롯한 마원의 마인들에게 참관 금지령을 내렸다. 건곤장조차도 내 당부에 따라 우장평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우장평은 내 입장에서는 적진이나 진배없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이들이 내게 적극적인 호감을 분출한 것이었다. 그 기운은 곧 청화로 전환될 터였다. 망외의 소득이었다.
***
어디선가 보고 있었던 듯 검제와 창제는 내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내에 떨어져 내렸다. 공히 비를 튕겨낼 호신강기를 며칠 내내 두르고 있을 수 있는 심후한 공력의 소유자들임에도 둘 다 흠뻑 젖어있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벌판에 본격적으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내 이십 보 전면에 선 오늘의 상대를 일별하며 놀랍게도 신창문에서처럼 오대오(五對五)의 이상적인 비율로 타오르는 청화와 적화를 열심히 챙겼다.
나를 응시하던 검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전에 응해주어서 고맙네.”
중인이 술렁거렸다. ‘도전’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나는 검제의 겸양지덕에 화답했다.
“가르침을 받겠소.”
“허허, 나를 조롱하는 겐가. 상수가 할 말은 아닌 듯한데.”
일순 검제 옆에 있던 창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러나 그 살벌한 눈빛은 내가 아니라 검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는 창제가 전날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망신당할 일은 없었을 거라 여기고 있을 터였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실책으로 인한 후과였으니 감내해야 마땅했다.
창제는 심경을 추스른 후 내게 재대결을 요청하려 했을 터였다. 그런데 검제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이었다. 검제의 약삭빠른 처사에 불만이 불 끓듯 했겠지만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그리고 다음 기회를 노릴밖에.
나는 창제가 나의 승리를 염원하리라 확신했다. 내가 검제에게 패하면 나와 다시 붙어 나를 이긴들 빛이 바랠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제쳐두고 검제와 자웅을 결하자고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나에 대한 설욕이 우선인데다 너무 속 보이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할 심사를 품은 채 창제는 내게도, 검제에게도 적의를 담은 눈을 부라렸다.
쾅!
창제와 함께 비무의 공식 참관인으로 지정된 용왕이 손뼉을 치며 폭약이 터진 듯한 굉음을 일으켰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을 모은 용왕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환담은 그쯤하고 규칙을 정한 후 바로 시작하는 게 어떻소? 비가 이리 사납게 퍼부으니 후딱 끝내고 쉽시다그려.”
원래는 공동 참관인인 창제가 응수해야 했으나 그가 침묵한 탓에 검제가 용왕의 말을 받았다.
“규칙에 관해서는 사전에 합의한 걸로 알고 있소만.”
“그래도 사전에 확인하는 게 낫잖소? 첫째, 판정관은 따로 두지 않고 당사자들끼리 승패 여부를 가린다. 둘째, 초수는 일백으로 하되 흐름에 따라 전후로 십 초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한다. 그렇더라도 참관인들이 요구하면 즉시 비무를 중단한다. 맞소?”
“그렇소.”
“그럼 준비하구려. 창제는 오늘 벙어리 노릇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니 개시 선언은 내가 하겠소.”
사나운 눈으로 용왕을 쏘아보았지만 창제는 용왕과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이렇게 해서 군중이 나와 검제의 무위를 감안해 비워둔 직경 삼십여 장의 거대한 원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급격히 타오르기 시작한 붉고 푸른 불길을 흡수하며 최고조로 끌어올린 청력으로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억수같이 퍼붓는 비 때문에 찾고자 하는 자의 숨소리를 포착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천이통을 거둔 나는 목전의 상대에 집중했다. 우세를 자신했지만 검제는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강자였다. 나와의 무력 차이도 크지 않은데다 내가 동일한 무위의 칼잡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전했던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마력이 검제의 정종무학에 약세를 보일 우려도 상당했다.
하여 나는 일백 초를 의식하지 않고 초장부터 최강으로 밀어붙여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다른 변수들을 고려하더라도 그편이 나을 듯싶었다.
검제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맞춰 내가 숨을 들이마시자 용왕이 소리쳤다.
“시작하오들.”
용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제의 검첨에서 뇌전이 일었다. 나는 십지 전부에서 지공을 발출하며 공간을 가르고 날아온 검강에 맞불을 놓았다.
이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충돌이 장차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대격전의 서막을 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