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 부디 몸조심해요.
운공을 마치고 눈을 뜨자 내 옆에서 새우처럼 웅크려 잠을 자고 있는 나우가 보였다.
중원은 겨울의 초입이지만 일 년 내내 더운 서역은 언제라도 노숙이 가능했다. 워낙 곤히 자는지라 그냥 둘까 하다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님을 상기하고는 부드럽게 깨웠다. 몽롱한 가운데 나우가 서역어로 옹알이를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에게 물었다.
“계속 ‘부르 부르’라고 하던데, 무슨 뜻이오? 춥다는 소리는 아닐 테고.”
양 관주를 닮은 나우의 두툼한 입술에서 긴 한숨이 빠져나왔다.
“목마르다는 뜻이에요. 오 공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닷새 동안 물을 한 모금도 먹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아! 미안하오. 미처 생각지 못했소.”
운공에 든 동안 짐승들이 습격할 것을 우려해 절벽 중간에 자리를 잡은 게 불찰이었다. 나우는 거기서 꼼짝도 못 하고 내가 운공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터였다.
“괜찮아요. 이래 봬도 어릴 때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랍니다.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끼지 못해요. 그래도 너무 갈증이 심하니 어서 물부터 마셨으면 좋겠네요. 몇 마디 안 했는데 벌써부터 입이 바싹 말랐어요.”
나는 나우를 안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멀리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리로 가서 목을 축였다.
파리나 본부로 귀환하는 내내 나우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는 대부분은 흘려들었지만 타우린에 대한 대책만큼은 경청했다.
“그치가 환상환을 갖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마음만 먹으면 왕들을 홀려 대규모 전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번에 왕들은 물론이고 타이 같은 각국의 유력자들을 모조리 불러 모을 참이에요. 국경 분쟁 조정이나 명령 체계 확립 등의 주요 안건도 논의해야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그치의 존재와 수단을 주지시키고 서로 감시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누구라도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그치가 수작을 부렸음을 알아챌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러면 대형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현명하고도 타당한 방책이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몇 달 전에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알아냈소? 밀왕이 일부러 유도한 건 아닐 텐데.”
“알고 보니 밀궁에 인질로 잡혀가 있던 이들이 원인이었어요. 타이도 그들 중 하나죠. 아니, 어떤 의미로는 원흉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무슨 소리요?”
“일전에 만난 밀궁 전대 궁주가 그랬잖아요. 분체가 완만하게 진행되었다고. 그 과정에서 밀왕의 본신이 ‘카루’에 있었나 봐요. 카루는 일종의 돌침대인데 중원식으로 보면 관(棺)과 같은 역할을 해요. 지체 높은 자가 죽으면 화장하기 전에 일정 기간 그 위에 눕히죠.
그걸 본 몇몇 밀사들이 타이처럼 친해지게 된 인질들 일부에게 흘린 모양이에요. 인질들이 다시 본국에 은밀히 그 정보를 전했고요. 다들 처음엔 조심했지만 성질 급한 칠왕국의 왕이 눈엣가시였던 삼왕국을 쳤는데 그러고도 밀궁의 응징이 없자 눈치를 보던 다른 왕국들도 그간 쌓인 원을 풀러 나선 거였어요.”
나는 그제야 나우가 타이를 두고 ‘원흉’이라 칭한 까닭을 알았다.
“그에게 확인했소?”
“그럼요. 억울해하더군요. 하지만 자기가 밀사들에게서 캐낸 정보를 본국에 보고했다는 건 인정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혹시라도 ‘밀왕의 이상’이 사실로 판명되면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터이니 미리 대비하라는 의미에서 그랬대요. 평판이 워낙 괜찮아서 좋게 봤는데, 음흉한 구석이 있어요, 그 인간. 오 공자하고 친한 척 구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요주의 인물이에요.”
나는 적염적발의 거한을 떠올렸다. 그에게 품은 호감은 여전했지만 나우의 말을 듣고 보니 약간의 경계심은 일었다.
“타이는 칠왕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공식적인 왕위 계승 서열은 한참 뒤예요. 왕좌에 오르려면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해요. 골육상잔이 불가피하다는 뜻이죠. 하지만 오 공자를 등에 업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야망을 이룰 수 있어요. ‘식은 죽 먹기’보다 쉽죠. 그렇더라도 그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니까. 내 앞에서 호가호위하는 꼴은 못 보죠.”
나는 경계해야 할 이가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전에는 그가 훌륭한 왕재(王才)라고 했잖소?”
“그때는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위인인지 몰랐으니까 그랬죠.”
“그러면 나우는 어떻소?”
“뭐가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우가 소리쳤다.
“내가 내 멋대로 설칠까 봐 그래요?”
나는 둘러 가지 않았다.
“타이에 관해 말하는 걸 보니 우려스러운 바가 없지는 않소. 칠왕국은 일왕국과 더불어 최강을 다툰다는 대국이잖소? 그런 곳의 대권 후보를 나우의 감정이나 선호에 따라 정하려 드는 건 온당한 일이 아닌 듯싶소만.”
반발하면 보다 엄하게 나가려 했는데 나우에게서 풀 죽은 목소리가 나왔다.
“미안해요. 내가 경솔했어요.”
기특한 것도 잠시, 나우가 다시 아이 같이 굴었다.
“잘못한 건 알겠는데 속상하네요.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만약 나하고 타이가 대립하면 누구 편을 들 거예요?”
“나야 당연히 나우 편이오.”
언제 토라졌냐는 듯 나우가 활짝 웃었다. 나는 ‘올바르게 처신한다면.’이라는 뒷말을 목구멍에 가두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어리나 나우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데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여인이었다. 문상과 아르를 제외하면 가장 명민한 여인이기도 했다.
***
우리는 오후 늦게 고르에 도착했다.
파리나 본부 전면의 광장은 넘치는 인파로 인해 장터처럼 복닥거렸다. 하지만 내가 나우를 안고 내려서자 무인도처럼 조용해졌다.
일시지간 마비되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손을 들고서 벌서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일제히 ‘후라’라고 소리쳤다. 나우가 내 귀에 대고 ‘만세’라는 뜻임을 알려주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원로들이 앞다투어 몰려나왔다. 밀왕을 처치한 지 닷새나 지났으니 지금쯤은 다들 소식을 알고 있을 터였다.
나우는 그들에게 내 공적을 칭송할 시간을 허락지 않고 부지런히 혀를 놀렸다. 그녀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노인들이 하나둘 어디론가 달려갔다.
“총소집령을 하달했어요. 일백 명 전후의 인원이 모일 거예요. 이레 후에요. 그때까진 여기 있어 줘요. 새로운 지배자의 모습을 보여줘야죠. 가능하면 지난번처럼 신위도 보여주고요.”
쓴웃음이 났다.
나우의 의도는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서역의 왕족들 앞에서 유치한 힘자랑을 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중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원로 한 명이 내 부담을 덜어주었다.
“오늘 아침 동방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유창한 중원어를 구사하며 노인이 소매에서 꺼낸 첩지를 내게 내밀었다. 한 겹으로 접힌 비단 종이를 펴보니 눈에 익은 필체가 나왔다.
나는 곁눈질로 첩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왕방울 눈을 부릅뜬 나우에게 작별을 알렸다.
“가 봐야겠소.”
“그래요. 여기 일은 나에게 맡겨요. 이젠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부디 몸조심해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나는 천공으로 비상했다.
***
달랑 한 줄이었지만 나는 상황을 대번에 파악했다.
문상은 우장평 대전이 있은 후 곧바로 해왕과 접촉을 시도했다. 빙왕에 이어 그마저 적진에 들면 곤란해질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따르면 해왕은 연수제의에 응할 공산이 컸다. 우리 편의 용왕과는 친분이 두터운 반면 검제와는 매우 껄끄러운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이십여 년 전 중원의 남동해안을 침탈한 해적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검림의 검호들이 가차 없는 손속을 보인 게 갈등의 시초였다.
해적들은 자신의 반도들이기도 했기에 해왕은 그들을 넘겨달라고 검제에게 요구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일벌백계로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검제는 해왕의 청을 묵살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휘하의 검호들로 하여금 해적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살수를 펼치도록 공개적으로 장려하기까지 했다.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한 해왕은 대담하게도 단독으로 바다를 건너와 검제와 한바탕 일전을 벌였다. 둘은 승부를 내지 못했으나 검제 쪽이 극미하나마 우세를 점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물론 해왕 자신은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아무튼 그 이후 해왕은 검제를 공공연하게 적으로 간주했다. 그로부터 육 년 후 용왕이 비무를 위해 그를 찾았을 때 적극적으로 친분을 쌓고는 함께 검림을 쳐 전리품을 나눠 갖자고 꼬드길 정도였다. 그랬다간 중원의 나머지 괴물들로부터 보복을 당할 게 빤하니 자중하는 게 낫겠다는 용왕의 설득에 못 이겨 철회했지만 검제에 대한 앙심마저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전력이 있었음에도 해왕은 문상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역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건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앙숙이었던 검제 편에 붙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검제는 아직 전투에 나설 만큼 회복되지 않았을 테지만 그에 못지않은 초(超)강자가 적진에 가세한 셈이었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도제를 논외로 치더라도 용왕과 재수 없는 늙은이만으로는 추가된 해왕을 포함한 세 명의 강적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
형세 판단은 여유를 앗아갔다.
최악의 경우 대결을 회피하고 각자도생하도록 일렀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우려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다름 아닌 무후의 승부욕이었다.
만약 숙명의 호적수인 창제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부상에서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결을 고집하려 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적들이 십자무련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당도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날았다.
일천이백 리를 한달음에 지운 후 천벽 또한 단숨에 넘고는 사막에 들어섰다. 모래 바다를 가로지를 때 해가 졌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족히 오천 리는 더 가야 할 터였다. 증강된 선력 덕분에 속도가 급증했음에도 자정 전에는 도저히 목적지에 이를 수 없을 듯싶었다. 나는 새삼스레 타우린이 부리는 광구가 얼마나 대단한 기물인지 실감했다.
어둠에 잠긴 대지 끝에서 불빛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렸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빛무리가 점점 커져 갔다. 그 광원은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야성을 이룬 천하제일도 호원이었다.
허파가 찢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쳐 날았다. 호원에 근접했을 때 ‘심상치 않은’ 기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 만일 적들이 침공한 것이라면 촌각이라도 빨리 현장에 이르러야 했다.
호원 상공을 지나는 내내 애가 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재수 없는 늙은이나 밀왕이 구사하던 비술을 연속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되면 진즉 십자무련에 닿았을 텐데.
간절함이 통했는지 일순지간 뇌리에 기묘한 도형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뒤죽박죽으로 얽힌 선과 면들이 면전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리로 비집고 들어가면 거리를 단숨에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갈등했다. 이 유혹에 몸을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찰나지간의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자칫 잘못하면 경을 치를 것임을 본능이 강력하게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는 와중에도 최고속도는 유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무련이 시야에 들어왔다. 면적이 일백이십만 평에 달했기에 전경이 잡히지는 않았으나 소란이 벌어진 지점을 포착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리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