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8
제178화 – 안 그렇소?
전장은 대웅전과 숭무전 사이의 연무장이었다.
일천 명의 무사가 동시에 수련해도 남음 직한 너른 광장을 단 일곱 명의 남녀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지축을 뒤흔드는 격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양 진영에 속한 이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했다. 한쪽엔 창제, 도제, 빙왕, 그리고 해왕임이 분명한 노인이 속해있었고 반대편엔 무후와 용왕, 그리고 재수 없는 늙은이가 들어있었다. 그들 전원이 절대지경에 오른 무존(武尊)들이었다. 그러니 연무장 가장자리를 둘러싼 십자무련의 무인들은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삼대사(三對四)의 대결은 전자의 일방적인 열세였다.
단순히 숫자가 하나 부족해서만이 아니었다. 역시 무후가 말썽이었다. 스무 날 전 우장평 대전에서 입은 내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군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음이 틀림없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와 용왕 모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역부족임이 명약관화했다. 현장이 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둘 다 위태로운 처지였고 무후는 어디를 크게 다쳤는지 운신조차 불편해 보였다. 한두 호흡만 지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죄다 이승을 하직할 판이었다.
실로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나는 사자후를 발했다.
아직 연무장까지의 거리가 사십여 장이나 남아있었기에 전투에 개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아니 그렇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용왕을 끝장내기 직전이었던 도제와 빙왕이 주춤하며 손을 거두었고 재수 없는 늙은이를 몰아붙이고 있던 창제와 해왕도 결정타를 보류하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작은 지체였으나 내겐 그걸로 충분했다. 단숨에 연무장과의 거리를 줄인 나는 네 명의 적들에게 지공을 폭사했다.
그리고 전세가 일시에 뒤집혔다.
***
나의 출현은 단순히 한 명의 원군이 추가된 수준을 훌쩍 초과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전히 이십 장 가까운 거리가 남아있었기에 내가 쏘아낸 지공들은 적들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기는 어려웠다. 하나 같이 금강불괴지신으로 화할 호신강기를 두를 수 있는 초(超)강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 잡은 사냥감을 내버려 두고 분분히 흩어졌다. 개중 한 명은 아예 나와의 대전을 포기하고 도주하려 들었다. 도제였다.
하지만 도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칼에 목이 달아나기 직전이었던 용왕이 악을 쓰며 장공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나만 의식하고 있던 도제는 속절없이 하체를 내주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도제와 달리 창제는 나를 겨냥해 탄강을 발출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빙왕과 해왕 역시 일시지간의 당황을 추스르고는 반격을 가해왔다. 나는 세 방면에서 짓쳐 드는 공격을 전부 흘려낼 수는 없음을 알았다. 일정한 피해는 불가피했다.
나는 전에 경험한 빙왕의 빙공을 허용하기로 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을 테지만 후속 수단을 고려하면 그러는 편이 가장 위험부담이 적을 터였다.
느닷없이 진로를 가로막은 빙벽을 돌파하며 나는 삼인에게 다시 지공을 날렸다. 나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던 해왕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일지관천지가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복부에 꽂힌 탓이었다.
빙왕과 창제는 아슬아슬하게 급소의 적중을 모면했다. 하지만 내 지공에 실린 위력을 실감하기엔 모자람이 없었을 터였다. 나와의 무력 격차를 깨달은 두 사람은 대항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나는 줄행랑치는 창제와 빙왕을 추격하지 않고 무후에게로 갔다.
빙왕의 빙공에 내기를 상해서가 아니라 무후의 상태를 점검하는 게 급해서였다. 여태 억지로 버티다 갑작스러운 전세 역전에 안심했는지 일순간에 정신을 놓고 쓰러진 그녀는 기식이 엄엄했다. 이대로 숨이 끊어지면 큰일이었다.
선정의 투시안으로 무후의 내부를 관조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상이 도지며 도처의 혈맥들이 터지긴 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듯싶었다. 초절정의 고수일지라도 이 정도의 중상이면 무조건 사망했을 터이지만 그녀는 십 갑자를 상회하는 초절한 공력의 소유자인지라 생사의 경계를 넘지는 않을 것이었다.
***
한숨 돌린 나는 주위를 살폈다.
다리가 뭉개진 도제와 배가 터진 해왕에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대가리를 터뜨려버리겠다는 협박을 날린 용왕이 내게로 달려왔다.
“십년감수했네.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네. 그런데 자네 일부러 늦게 나타난 거 아닌가? 살려줘서 고맙긴 하나 너무 기가 막힌 시점에 등장했단 말이지.”
“그럴 리가 있겠소. 최대한 일찍 온 게요.”
“밀왕은 어찌 됐는가?”
“염왕에게 보냈소.”
“캬아, 역시! 대단하이.”
탄성을 내뱉은 용왕이 모로 누운 무후를 내려다보며 별안간 욕설을 쏟아냈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고.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튀어나오는 통에 나까지 말려들었지 뭔가. 하마터면 딸아이한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골로 갈 뻔했네. 자네만 아니면 뒈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을 텐데.”
“고생 많으셨소.”
내 치하에 기분이 풀렸는지 용왕이 히죽 웃었다.
“어쨌거나 결과가 좋으니 됐네. 이제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구먼. 밀왕을 포함해 세 마리나 잡았으니 우리 쪽이 압도적 우위가 아닌가.”
용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나를 살려주시오. 그러면 강호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소.”
도제의 목소리였다.
멀리서 한 줄기 인영이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안진이었다.
장내에 이른 안진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형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재수 없는 늙은이를 부축했다.
“괜찮아, 사부?”
늙은이의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소매로 훔치며 안진이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걱정 말거라.”
안진이 나를 쏘아보았다.
“사부한테 감사 인사 안 할 거야? 너 때문에 저 여자를 지키러 나섰는데.”
마지못해 안진의 요구를 들어주려는데 늙은이가 선수 쳤다.
“그럴 것 없다. 저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업보를 책임지고자 함이었으니.”
나를 보는 늙은이의 눈에 기광이 번득였다.
“반드시 마물(魔物)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
나는 늙은이에게 대꾸를 주지 않고 도제에게 걸어갔다. 용왕의 장공에 무릎 아래가 으깨진 도제가 개구리 자세를 취했다.
“제발 살려주게. 그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네.”
도제의 비루한 작태에 나는 경멸감이 들었다.
“당신은 당신에게 구명을 청한 이들에게 그런 선처를 베풀었소?”
뻔뻔하게도 도제는 스스로를 변호했다.
“나도 늘 고통스러웠다네. 하지만 만인을 다스리다 보면 추상같은 위엄을 보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일세. 그렇더라도 음으로는 관용을 베푼 경우도 수두룩하다네. 거짓말이 아니네. 조사해보게나.”
“상계의 성자(聖者)라 불렸던 진덕근 대인에겐 어땠소? 아무 잘못도 없는 이의 사지 근맥을 자른 후 똥구덩이까지 기어가게 만들었다며? 그러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끝까지 농락했다던데.”
“그 일은 내 평생 가장 후회하는 죄업일세.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네. 당시 요사스러운 계집의 꼬드김에 넘어가…….”
나는 도제의 말을 잘랐다.
“그 여자는 어디 있소?”
“그년의 처소를 알려주면 나를 살려줄 텐가?”
나는 대답 대신 발로 도제의 오른손을 짓이겼다. 내 뜻을 알아들은 도제가 허둥지둥 말을 쏟아냈다.
“서경에서 동북방으로 칠백이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서원(西垣)이라는 이름의 소읍이 있네. 거기서 밤나무 숲을 지나면 장원이 나오는데 그년은 거기에 들어있을 걸세. 어쩌면 거처를 옮겼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악!”
말을 하다 말고 도제가 비명을 질렀다. 내가 왼손마저 으깨버렸기 때문이었다. 팔다리가 다 망가졌음에도 도제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핥으라면 핥겠네. 벌레처럼 기어가라면 그러겠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게.”
불현듯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전이 터지고 턱이 깨졌음에도 숨을 붙여줄 것을 애원하던 낙일쾌검의 눈빛이었다.
수십 년간 강호를 종횡하며 단지 재미 삼아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마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졸렬한 처신을 보였던 악한을 상기한 나는 그에 대한 새삼스러운 분노를 보태 도제의 아래 등판에 지공을 쏘았다. 척추를 뚫고 들어간 지공이 그의 단전을 파괴했다.
이 대목에서는 저주를 퍼부을 줄 알았으나 도제는 그 꼴이 되고서도 구명을 간청했다. 그야말로 ‘목숨만 살려 달라’였다.
도제를 상대하고픈 의욕을 상실한 나는 해왕에게로 넘어갔다.
해왕의 외관은 예전에 용모화에서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호방한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겁먹은 쥐새끼 같은 면상만 약여했다. 이미 내 일지관천지에 단전을 꿰뚫려 무력을 잃은 해왕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는 도제를 흉내 냈다.
“살려주라. 나는 살려주라. 살려주면 감사요. 백배 감사요.”
무릎을 꿇은 해왕이 어눌한 중원어를 남발하며 파리처럼 부지런히 손을 비볐다. 제 딴에는 비는 시늉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니다. 저들이 나는 안 오면 나는 안 가만둔다. 안 하고 싶어도 나는 온다. 나는…….”
나는 해왕의 너저분한 잡설을 어렵지 않게 해독했다. 요컨대 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가세했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어디서 씨도 먹히지 않을 수작을.
문상의 제의가 거의 동시에 들어갔을 터이니 해왕은 열심히 주판알을 튕겨 본 후 내 적들에게 가담하는 게 이득이리라 판단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왕 나선 김에 확실한 태도를 보이자고 결정했음이 틀림없었다.
도제가 문제가 있다고 하나 그와 빙왕이 맡았던 용왕은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있었던 반면 해왕과 창제를 상대했던 재수 없는 늙은이와 무후는 죽기 일보 직전에 몰려있었다. 해왕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나는 해왕을 즉결처분하지 않고 그의 단전이 파열되었음을 확인만 하고는 등을 돌렸다.
연무장을 말발굽 모양으로 둘러싼 무인들의 수는 삼사백 명가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위와 무관하게 그들은 대부분 용자들일 터였다. 비록 차원이 다른 초인들의 결전에 한 칼을 내밀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테지만 다른 이들처럼 피신하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기개와 용기를 증명했다.
나는 경외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십자무련의 무인들에게 호의를 담은 눈길로 화답했다. 그러면서 다시 무후에게로 돌아갔다.
무후 곁에 선 나는 두개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까는 그녀의 숨이 붙어있을지 여부가 중요했기에 심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와 혈맥들을 꼼꼼히 살폈지만 그 걱정이 사라진 지금은 그녀의 두개골에 붙어있을 독고가 관심사였다.
선정을 강화하고 집중하자 내 것과 거의 같은 위치에 박혀있는 까만 벌레가 보였다. 제가 깃든 인간의 처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좁쌀 크기의 벌레는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작은 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문득 내 머리의 독고에게 주의를 돌린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놈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놈을 뽑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되면 앓던 이가 빠지는 것 이상의 쾌감을 느낄 터였다.
혼절한 무후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정신을 차린 후 스스로 매듭을 풀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렇게만 해 주면 과거지사는 모두 불문에 부치겠소. 나아가 당신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걸로 간주하리다. 당신은 언제라도 내게 은혜를 갚을 것을 요구할 수 있소. 어떻소? 이만하면 썩 만족스러운 조건 아니오? 안 그렇소?’
무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내가 속으로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령 그녀가 내 제안을 들었더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아예 묵살했을 것이었다.
무후가 침묵하는 가운데 나는 문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연무장 주위의 무인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데다 안면이 있는 무영도수에게 그녀를 찾아보도록 시켰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변고가 발생한 즉시 문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음을 알았다.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