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79
제179화 – 그렇지 않음을 아오.
문상은 이튿날 저녁에야 나타났다. 그러고는 자기도 무안했던지 그녀답지 않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아무리 말려도 들을 생각을 않더군요.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이니 피신할 밖에요. 나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긴 싫지만 그들은, 특히 도제는 언니를 처치한 후엔 반드시 나를 잡으려 들었을 거예요. 내가 오 공자와 밀접할뿐더러 서로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라 여길 테니까. 인질로서 뿐만이 아니라 정보원으로서도 가치가 있다는 뜻이죠. 적어도 전자는 착각이지만 그들에게 그 점을 차근차근 설명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피한 거예요.”
“무후가 그럴 거라 예상하지 못했소?”
“물론 했죠. 하지만 나는 언니가 내 설득에 응하리라 보았어요. 해왕 때문에 불안해서 그 전날까지도 비상시에 어떻게 대응할 건지에 관해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는 내 권유에 따르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닥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더군요. 갑자기 창제에 대한 적의를 표출하며 뛰쳐나가는데 나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어요.”
“무후가 대체 왜 그랬을 것 같소? 아무리 승부욕이 강하다고 하나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짓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그야 당신이 알겠지.”
“…….”
“분명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거라 확신하오만.”
“그래요. 짐작 가는 바는 있어요. 아직 언니에게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들어봅시다.”
“내가 보기엔 두 가지가 맞물렸던 것 같아요. 하나는 언니의 내상이 의외로 빠르게 아물었으리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언니가 새로운 패를 쥐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하필이면 그날.”
“새로운 패? 그게 뭐요?”
“신수(新手)의 창안이겠죠. 우장평 대전에서 얻었는지 아니면 오 공자와의 비무에서 비롯된 건지, 혹은 그 둘 다로부터 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는 강자들과의 대결에서 무언가 도약의 단초를 얻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날 신수의 윤곽을 잡은 게 아닐까 싶어요. 마침 부상에서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해볼 만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적진에 창제가 없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게 문제였죠. 언니는 객관적인 형세 판단과 무관하게 그를 상대로 신수를 시도해 보고픈 욕망을 누를 수 없었을 거예요. 한 번 작심하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언니가 마음을 굳힌 시점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도 좀 더 철저하게 대비해야 했소. 무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엉뚱한 이들이 피해를 볼 뻔했잖소.”
문상은 비난받아 마땅했다. 무후의 통제는 전적으로 그녀의 책임이었다. 일이 잘못됐으면 무후의 목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용왕과 재수 없는 늙은이, 그리고 나까지 경을 치렀을 터였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난장판을 방치하고는 나 몰라라 하고 혼자 내뺐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문상이 반격을 시도했다.
“나로서는 할 만큼 했어요. 그러는 오 공자는 왜 그렇게 늑장을 부렸나요? 해왕의 동향에 관한 급보와 상관없이 진즉 귀환했어야 하잖아요? 밀왕은 이미 엿새 전에 처치했다면서요? 그러면 최소한 사나흘 전에는 돌아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얼마나 초조했는지 알아요? 안 그래도 언니로 인해…….”
“알겠소. 그만합시다.”
나는 눈빛과 목소리로 분노와 실망감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하지만 문상은 끝까지 사과의 언사를 면사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
문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향후 어떤 식으로 강호를 정리할지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 전에 서역에서의 여정을 들었으면 해요.”
나는 문상의 청을 무시하려다 도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곳의 참극이 왜 발생했을 것 같소?”
“검룡이 오 공자 흉내를 냈던 게 아닐까요? 안 소저를 납치했을 때 환상환을 써서 그녀에게 비법을 캐냈을 테죠. 그러고는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악마와 영웅을 가장한 거죠. 수많은 이들의 공포와 원한, 그리고 감사와 칭송을 동시에 취하려고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 수십만 명을 학살했으니 참으로 악독한 위인이에요.”
역시 문상은 나우의 두 번째 서신을 받고는 전모를 파악한 것이었다.
“아마 다른 노림수도 있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쪽이 더 주된 목적이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뭐요?”
“유인이죠. 오 공자를 서역으로 오도록 강제한 후 중원의 방해꾼들을 처리할 작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실은 그 가능성 때문에 오 공자의 서역행을 만류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날 오 공자의 태도를 보니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최대한 빨리 서역의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당부했던 거예요. 그나저나 검룡은 만났나요? 그를 잡진 못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문상에게 검룡의 실체를 알려주었다.
“상상도 못 했어요. 검룡이 밀왕이었다니.”
좀처럼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는 문상의 음성에 날 것 그대로의 흥분이 묻어났다. 나는 타우린과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준 후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할 것 같소?”
“그에겐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거예요. 잠적하거나 새 어장을 찾아가거나. 아마 후자를 택하지 않을까 싶어요.”
“무슨 소리요?”
“요긴하게 써먹던 본체를 잃었잖아요? 혼자 힘으로는 살겁을 일으키지 못할 거예요. 중원은 말할 것도 없고 서역에서도요. 환상환을 부린다고 해도 파리나의 아이가 대책을 세웠겠죠. 전쟁을 일으킬 권력을 가진 자들을 서로 감시하도록 한다든가 같은. 아니면 아예 모든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밀왕과 환상환에 관해 알리며 주의를 주든가. 여하간 밀왕은 기껏해야 십전공자의 무력으로 실행 가능한 소규모 학살만 저지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큰데다 무엇보다 그 경우엔 영웅 노릇은 수행할 수 없으니 시도하지 않을 거라 봐요. 그렇다고 꽁꽁 숨어있자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을 테죠.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천지를 찾아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가 서방으로 갈 거란 말이오?”
“그렇지 않을까요? 서방은 중원 못지않은, 아니 중원보다 훨씬 광대한 땅으로 알려져 있어요. 밀왕은 환상환으로 이곳저곳의 지배자들을 움직여 제 나라의 민중을 상대로 살겁을 자행하도록 한 후 도중에 만인의 목전에서 그들을 처단하거나 제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서역에서의 참극과 같은 효과를 거두려고 할 듯싶어요. 서방에도 기이한 술법을 구사하는 이인(異人)들이 존재하는 등 변수가 워낙 많아 그의 뜻대로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로서는 모험이 불가피할 거라 봐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목숨이 희생될 것인가.
면사 속에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문상의 눈이 느껴졌다.
“그를 잡으러 갈 건가요?”
“그래야 하지 않겠소?”
“서둘지 말아요. 밀왕도 당장 일을 도모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로서도 낯선 땅일 테니 기본적인 사정을 알아보는 데만 족히 몇 달은 걸릴 거예요. 일 년 이상 소요될 가능성도 상당하고요. 그동안 파리나의 아이와 협조해서 서방과의 연계 방안을 모색해 볼게요. 서방은 결코 만만한 땅이 아니에요. 그곳의 유력자들에게 밀왕에 관해 알리면 그들도 자체적으로 대비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우선 여기 일부터 해결해요.”
“내가 어쩌길 바라오?”
“사실 오 공자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돼요. 밀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한달음에 달려올 거예요.”
“……?”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문상의 예측은 빗나갔다.
밀왕, 보다 정확하게는 환상환을 활용한 그녀의 패는 창제에게만 통했다. 검제는 문상이 내 이름으로 내린 소환령에 응하지 않았고 빙왕 또한 십자무련행 대신 빙궁으로의 도주를 택했다.
대웅전 연무장에서 퇴각한 지 나흘 만에 십자무련으로 돌아온 창제는 한껏 자세를 낮췄다. 그간 보였던 거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석 달 전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시월 초하루에 신창문으로 오라는 그의 명을 군소리 없이 따라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었다.
창제는 우장평에서 나를 공격한 게 환상환에 의한 행위였다며 자기를 변호했다. 실로 가소로운 작태였다. 백번 양보해 우장평에서는 그랬다 쳐도 십자무련을 쳐들어온 건 전적으로 그의 의지였다. 환상환의 공능은 일회적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창제의 면상이 독주를 들이켠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면서 횡설수설하며 주접을 떨었다. 더 듣기 싫어 나는 그와의 면담을 끝냈다.
내가 일 년 봉문을 명하자 딱딱하게 굳었던 낯짝을 푼 창제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로서는 횡재한 기분이었을 터였다.
창제의 몸에 어떤 금제도 가하지 않고 관대한 처분을 내린 건 문상의 요청 때문이었다.
문상은 무후에게 설욕의 기회를 주기를 바랐다. 무후가 새롭게 창안한 무학으로 내년 칠월 칠일로 예정된 창제와의 비무에서 오랜 숙원을 풀 수 있도록.
***
면죄부를 받은 창제가 십자무련을 떠난 직후 검제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날 우장평에서 입은 종아리 부상으로 인해 장거리 이동이 불가능하니 나더러 검림에 와 달라는 요청을 담은 서신이었다. 나는 바로 용왕과 함께 검림으로 출발했다.
용왕을 대동한 건 함정 따위를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설사 빙왕에 창제까지 검림에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용왕에게 동행을 청한 건 다음 일정에 그가 필요해서였다.
우리는 해질녘에 검림에 당도했다.
호리병 모양의 들판에 옹기종기 모인 와옥들이 붉은 석양에 잠겨있었다. 고즈넉한 풍경이었지만 마을 전역에 초상집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전날 검제와 대면했던 장소에 떨어져 내렸다. 잠시 후 비대한 체구의 노인이 절뚝거리며 담장을 돌아 나왔다.
한 달 만의 재회였지만 검제는 족히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턱 밑까지 축 처진 볼살이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신나게 흔들거렸다. 하지만 동공은 동태 눈깔처럼 생기가 없었다.
나는 검제의 눈에서 밀궁 전대 궁주를 보았다. 한쪽은 용왕 못지않은 거인이고 다른 쪽은 노인네 같은 난쟁이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똑같았다. 검제는 그 노인처럼 자신의 목숨으로 문파를 보위할 작심을 하고 나온 것이었다.
“먼 길을 와주셔서 고맙소. 내가 가야 도리이나 형편이 여의치 않았구려.”
검제의 바뀐 말투가 애처로운 듯 용왕이 혀를 찼다.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검제가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오. 미망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했소. 죄과를 인정하오. 벌도 달게 받겠소. 다만 이곳의 다른 이들은 선처해주었으면 하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소. 그대가 정인(正人)임을 아오. 부디 내 목만 가져가고…….”
나는 검제의 뒷말을 막았다.
“하나 물어봅시다. 검룡이 서역 출신임을 알고 있었소?”
검제는 묵묵부답했다. 그의 침묵이 긍정과 부정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더 캐묻지 않고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가 밀왕의 화신이라는 말은 믿소?”
검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고통스러운 심사의 내색일 터인데 살들이 출렁거리는 탓에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솔직히 거짓이길 바라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아오.”
이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