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58
제58화 – 정말로 무지하게 셌어?
일다경도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눈을 떠보니 창문이 밝은 햇살로 물들어있었다.
지난밤 제때 운공에 들지 못한 데다 지나치게 심력을 소모해서 탈진지경에 이르렀던 모양이었다.
나를 지켜줄 거라고 큰소리쳤던 안진은 길지도 않은 팔다리를 한껏 벌려 대(大)자를 만들고는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혔다.
확 물이라도 끼얹어버릴까 보다.
심통을 다스리며 안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체구가 작은 데다 단발인 탓에 얼핏 소년처럼 보이지만 주근깨나 초승달 눈썹에 비해 손색이 없는 미모였다. 내 취향만 따진다면 안진 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가부좌를 풀고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슬며시 손을 뻗어 안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머릿속에서 고성이 울렸다.
‘잠깐! 정신 차려, 오선! 이러고 있을 때냐!’
스스로를 꾸짖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돌연 눈을 뜬 안진이 나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너, 방금 엉큼한 짓 하려고 했지, 선?”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모함이오? 그저 안 소저를 깨우려 했을 뿐이오.”
“거짓말.”
“정말이오.”
“이게 어디서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나는 안진의 말을 잘랐다. 이걸로 입씨름을 해서는 승산이 없으니 사안을 바꾸는 게 상책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요? 나를 호위해준다고 해 놓고 이렇게 퍼질러 자고 있으면 어떡하오? 큰 위험은 지나갔다고 하나 여기는 적진이나 다름없는데 안 소저를 믿었다가 자칫 운공 중에 비명횡사했을…….”
“오해야. 밤새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고. 방금 전에 깜빡 졸았을 뿐이야.”
허술한 변명이었다. 깜빡 존 사람의 자세가 아니지 않은가. 본인도 그걸 깨달았는지 안진이 내가 구사한 수법을 들고나왔다. 화제전환이었다.
“근데 이제 떠날 거야? 가기 전에 호원 구경 좀 하면 안 돼?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라는 데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참에 실컷 보고 가자. 여긴 뭐가 유명해, 선?”
나는 안진이 내미는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이곳 십자무련 총단이 호원 최고의 명소요. 일단 여기부터 둘러봅시다. 그런 연후 호원에 나가 남사로의 마천루도 감상하고.”
내가 청을 들어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지 안진이 과도하게 반색했다.
“정말? 아아, 너무 좋다. 고마워, 선.”
나는 내 목을 끌어안으려 드는 안진의 팔을 단호하게 떨쳐냈다.
물론 한가하게 호원 유람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내가 안진의 원을 선선히 수용한 건 단지 그것이 내 계획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닭고기며 쇠고기며 육류만 그득한지라 시비들이 차려준 조찬에 손도 대지 않고 와옥을 나오니 우리를 안내할 이인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하나는 어제 본 중년 문사였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삼십 대 장한이었다. 외공을 익힌 듯 장한은 문상의 가마를 들었던 역사들 못지않게 근육질이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양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런 얼뜨기를 보냈을까.
문사가 내게 읍을 했다.
“드디어 나오셨구려. 동문까지 오 공자와 소저를 배웅해드리라는 명을 받았소.”
“가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소.”
“누구를……?”
“무영도수요. 이곳에서의 직위가 총수라던 것 같던데.”
문사는 난색을 표하고 장한은 입을 떡 벌렸다.
“그런 지시는 받지 못했소만.”
“다시 가서 물어보구려.”
장한이 끼어들었다.
“저, 공자는 뉘신지요?”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헉!”
내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경악성을 내지르더니 장한이 넙죽 엎드렸다.
“모,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절대천룡.”
더듬긴 했으나 장한의 목소리가 너무 우렁찬지라 길을 지나던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들 중 일부가 장한의 입에서 튀어나온 별호를 반복했다. 그러자 곧 소동이 일었다. 내 별호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십자무련 전역이 장터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장한을 앞세우고 무영도수의 거처라는 성운전으로 향하노라니 수많은 이들이 행로에 몰려나왔다. 와옥을 떠난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아 내 주위에 운집한 군중의 수는 수천에 달했다. 이러다 성운전에 이를 즈음엔 수만으로 불어날 듯싶었다. 십자무련에 상주하는 무인들은 하급 무사들까지 합치면 육천 명가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잡무를 보는 이들과 시비-하인들을 더하면 십만을 초과했다.
나는 나를 보러 달려 나온 이들이 청화를 피워주기를 바랐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비무를 청한다면 금상첨화였다. 어딜 가나 상대의 강함 따윈 고려하지 않고 치받으려 드는 싸움닭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자들과 적당히 놀아주면 관전하던 군중이 청화의 불길을 일으킬 터였다.
하지만 내 계산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일단 무영도수가 너무 빨리 나왔다. 그가 나섰으니 아무도 감히 내게 도전할 만용을 부리지 못했다.
군중의 반응도 예상 밖이었다. 불길은 고사하고 운무조차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열광과는 거리가 먼 공기에 혼란스러워하며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이곳의 인사들에게 나는 강호에 새로이 출현한 일대영웅이라기보다는 그저 껄끄러운 대상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어떤 이들은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제 있었던 낙일쾌검의 변고는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듯했지만 광마도와 무영도수가 패배한 것만으로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그러니 저들에게서 우호적인 태도를 기대한 건 욕심이자 오산이었다.
김이 팍 샌 나는 내게로 달려오는 무영도수가 달갑지 않았다. 그냥 제집에서 기다릴 일이지 구태여 마중까지 나올 건 뭔가.
날렵한 신법을 과시하며 군중 위의 상공을 가로지른 무영도수가 내 십 보 전면에 착지했다. 강퍅한 그의 면상에 당혹감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가 과묵한 사내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적절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보양에서 재대결을 한 게 고작 아흐레 전이었으니.
나는 무영도수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낙일쾌검의 일이야 당연히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내가 어제 십자무련에 든 건 알고 있을까. 나아가 나와 무후와의 면담에 대해서도 문상에게 언질을 받았을까.
“나를 찾아오는 중이라고 들어서 나왔다.”
애매했다. 이 말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더 탐색하지 않기로 했다. 궁금증 해소보다는 현실적인 이득을 챙기는 게 중요했다.
“그렇소. 여기에 아는 이가 당신밖에 없어서. 왔다가 그냥 가면 서운해할 것 같아 얼굴이나 볼까 했소.”
잠시 무영도수의 대응을 기다린 나는 그가 눈살만 찌푸리자 용건을 꺼냈다.
“혹시 설욕전을 바란다면 이렇게 만난 김에 받아주겠소. 이번에도 오십 초로 하는 게 어떻겠소?”
군중이 크게 웅성거렸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안개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옳거니. 바로 이거야!
쾌재를 부르자마자 무영도수가 재를 뿌렸다.
“언젠간 그럴 테지만 오늘은 때가 아니다. 할 일이 산더미다. 따로 용무가 없다면 그만 가겠다.”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돌린 무영도수가 신형을 날렸다. 체면 불사하고 꽁무니를 뺀 그에게 군중이 실망의 눈길을 보냈다.
나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점화하기 직전이었는데.
혹시라도 무영도수가 내팽개친 기회를 자기한테 달라는 미친 닭들이 나올까 싶어 기다렸지만 괴괴한 정적만 이어졌다. 기다림에 지친 안진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는 수 없이 중년 문사에게 말했다.
“갑시다.”
“네, 공자님.”
내가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 비로소 알게 된 중년 문사는 새삼스레 경어로 응답하며 반으로 접었던 허리를 펴지 않고 곱사등이처럼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걸어 나갔다. 그의 진로에 있던 군중이 벼락 맞은 고목처럼 쩍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근육질 장한은 마치 내 호위무사라도 된 듯 목에 힘을 주고는 뒤를 따랐다.
도원에서의 성과도 미미했다.
십자무련 바깥까지 데리고 나온 장한을 시켜 은근슬쩍 내 별호를 퍼뜨린 결과 번화가인 남사로에 이르렀을 때는 너른 대로가 인산인해로 덮여 마차들이 늪에 빠진 듯 꼼짝도 못 할 지경이었다.
안진이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본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흥분했다. 어림잡아 십만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수에서 나온 청화의 양은 한 줌에 불과했다. 목청을 가다듬고 악인 척결 운운하며 일장 연설을 했지만 환호는커녕 호응조차 별로 없었다. 다들 내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아귀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더 구차스럽게 굴어 봐야 건질 게 없다고 판단한 나는 연설을 대충 마무리하고는 안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어맛! 무슨 짓이야?”
나는 답을 주지 않고 그녀를 안은 채 공중으로 솟구쳤다. 지상에서 폭죽 같은 탄성들이 올라왔다. 혹시나 싶어 속도를 늦추고 상단전을 살폈지만 푸른 불꽃은 여전히 아지랑이 수준이었다.
***
호원에서 벗어나고도 안진은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 나는 그녀를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돼? 편하고 좋은데.”
“나는 불편하오.”
“칫, 그러면 애당초 왜 나를 안았어?”
“많은 눈들이 보는 데서 당신의 재주를 보일 수는 없잖소?”
“핑계 대지 마. 그냥 나를 안고 싶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덧나?”
더 말을 섞어봤자 입만 아플 터이기에 나는 몸을 날렸다.
“어디 가? 같이 가.”
전속력으로 경신을 전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진이 쫓아오지 못할 터이기에 속도를 그녀에게 맞춰주었다. 괜한 배려였다. 여유가 생기자 애물단지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호원 구경은 안 해? 왜 이렇게 서둘러? 참, 깜박 잊고 안 물어봤는데 무후라는 여자는 어땠어? 정말로 무지하게 셌어?”
나는 묵묵부답했다.
무시하긴 했지만 안진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보양이었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선력 증강을 위한 세 가지 방안 중 무림 명사들을 상대로 한 비무행은 포기해야 했다. 누가 낙일쾌검을 묵사발로 만든 나와 손을 섞으려 들겠는가.
강호십대악인 사냥도 당분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더욱 꽁꽁 숨을 터이니 아무리 상운의 정보망이 넓고 촘촘하더라도 잡아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도는 흑도 소탕뿐이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양 관주의 협조가 필수였다. 그녀의 도움이 없으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계획이 크게 어그러졌고 예기치 못했던 금제까지 안게 됐지만 긍정적인 점들도 있었다.
이제부터 십자무련의 영토를 자유로이 헤집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고무적이었다. 그들의 본단을 방문하고도 무사히 나왔으니 앞으로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성과는 건곤장과 한 달 후의 일전을 기약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호원에서 그와 공개 비무를 할 작정이었다. 인구가 일백만을 상회한다는 대도이니 수십만의 군중이 역사적인 대결을 관전하러 모일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발산할 열기를 청화로 전환해 흡수할 수 있다면 단번에 엄청난 선력을 취득하게 될 터였다.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했다.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 구상을 철회하게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