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60
제60화 – 헉!
양 관주의 두툼한 입술은 벌어질 듯 말 듯 했다.
나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울추가 기울었다는 반증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다고 한참 머리를 굴리더니 양 관주의 입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의 말이 나왔다.
“미안해요. 일 년 후, 오 공자가 무후와 대등한 무력에 도달하면 얘기해줄게요.”
“내가 목표 달성을 못하면 영영 들을 일이 없겠구려.”
“그러니 꼭 강해지세요.”
“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요?”
“별거 아니에요. 그저 흔하디흔한 일상사일 뿐이에요.”
“개세팔천의 누군가와 관련이 있다면 평범한 사연은 아닐 것 같은데. 혹시 양 관주의 정인이었던 이가 그자, 혹은 그 여자에게 변을 당한 건 아니오?”
양 관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석 대인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애먼 사람 잡지 마시오. 그는 단지 양 관주의 정인을 존경한다고 했을 뿐이오. 그걸로 추측해보건대 그이는 꽤나 유명 인사였던 것 같았소. 또한 양 관주가 그토록 말을 아끼는 걸 보니 뭔가 상서롭지 않은 상황이 있었던 것 같았고.
그런데 만약 양 관주의 정인에게 뭔가 해로운 짓을 한 자가 허접한 위인이라면 애당초 석 형 선에서 처리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그가 넘보지 못할 거물이란 뜻 아니겠소? 거기에 더해 양 관주가 개세팔천이라는 선을 정했으니 나로서는 양 관주의 원수가 그들 중 일인일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소?
논리의 비약이라고 지적한다면 인정하리다. 하지만 솔직히 추론이 아니라 직감이었소. 대체 누구요? 새외사왕(塞外四王)일 가능성은 희박하니 일후삼제(一后三帝)중 한 명일 텐데, 어떤 자가 양 관주의 가슴에 못을 박은 거요? 무후? 창제? 아니면 도제나 검제?”
내 드문 장광설에 대응하려는 듯 양 관주가 기록적으로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전히 입을 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오기가 생긴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기회는 한 번뿐이오. 지금 원사를 들려주면 그 괴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 양 관주의 원을 풀어주겠소. 하지만 끝내 함구하겠다면 나도 오늘부로 깨끗이 잊어버리겠소. 농담이 아니니 잘 생각하구려.”
좀 치사했지만 끝장을 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양 관주가 입을 앙다물었다. 내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였다. 저렇게나 완강하다니. 사연을 털어놓으면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다는 걸까.
양 관주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한편으로 나는 내가 왜 남의 사정에 이토록 집착하는지 의아했다. 단순한 궁금증으로 치부하기엔 강도가 너무 강했다.
아무리 개세팔천이 개입되어 있을지라도 어차피 하나의 원사에 불과했다. 내 친인이라 하나 특별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배수의 진까지 치고서 토설을 강요하려 들었을까.
어이, 오선! 왜 그런 거냐?
자문과 함께 내 속을 깊이 들여다본 나는 소스라쳤다.
이 여자를 참회동에 갇힌 그녀와 동일시하고 있었다니.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나이도 이 여자가 그녀보다 열 살은 많을 텐데.
당혹스러운 발견에 평정심을 잃은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자 했다. 나 자신의 망상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억지로 말할 필요는…….”
나는 말끝을 흐려야 했다. 별안간 양 관주의 뺨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맹세했어요. 가슴에 묻어두기로. 아니, 영원히 잊어버리기로. 그래야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살아야 그분이 남긴 아이들을 돌볼 수 있으니까요.”
눈물에 이어 고백의 봇물이 터질 줄 알았는데 양 관주는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
“전날 오 공자의 은덕으로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잡은 소향이가 그자를 무참히 난도질하는 모습을 보며 상상했어요. 나도 저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절망적인 상상이었죠. 왜냐하면 실현될 가능성이 전무했으니까. 어떻게 그 괴물을 무력하게 만들어 내 칼을 얌전히 받도록 할 수 있겠어요? 그 괴물과 대등한 괴물들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런 괴물 둘이 있어야 가능할 터인데.”
‘그래서 그 괴물이 대체 누구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곧 알게 될 터이기에 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오 공자를 만난 후, 아니 오 공자의 무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알게 된 후 다시 상상했어요. 여전히 절망의 상상이었지만 이번엔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어요. 삼십 년 후쯤 절정기에 접어든 오 공자가 일백 세를 넘어 쇠락하기 시작한 괴물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내가 그 괴물의 몸뚱이에 원 없이 칼을 쑤셔 박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면 화염지옥에 떨어져도 좋아요. 진심이에요.”
마지막 말은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원사를 풀어내지 않았음에도 내 상단전에 선연한 적화가 타올랐으니까.
양 관주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그래서 그 괴물이 누구요? 그리고 양 관주의 정인과는 어떤 악연이 있었소?”
“나중에 말하면 안 될까요?”
아니, 이 여자가. 기껏 달궈놓고는 찬물을 끼얹으려 들다니.
“대관절 왜 그렇게 말을 아끼는 거요? 여기까지 왔으니 후련하게 다 쏟아내쇼. 내가 치워 주리다.”
그래도 양 관주가 머뭇거리자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를 닦달하는 대신 달랬다.
“내가 섣불리 일을 도모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염려 붙들어 매구려. 무후를 능가하는 무력을 갖출 때까진 자중할 테니까. 그렇더라도 사냥감이 어떤 작자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소?”
“…….”
하아, 이렇게나 답답한 여자였을 줄이야.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순간 양 관주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내 동지들 가운데 점에 능통한 어른이 계세요. 너무나 잘 들어맞는지라 마치 마법 같아요.”
“그래서? 그이가 나한테 양 관주의 정인에 관해 알려주면 재수에 옴이 붙을 거라 공갈이라도 친 거요?”
놀랍게도 양 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요.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귀인(貴人)에게 원을 밝히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거라고 했어요.”
희한하게도 나는 바로 납득했다.
***
흔히들 점술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점괘의 해석을 두고도 귀에 걸면 귀고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폄하하지만 노인네의 신통을 여러 차례 목도한 나는 그렇게 만만하게 볼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노인네는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이치와 중중무진 인연의 원리를 깨치면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와 현세와 미래, 그리고 중원은 물론이고 온 세상, 나아가 우주 전체의 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도 황당무계한 얘기임을 알았으나 몇 번이나 노인네가 굽은 손가락들을 꼽아가며 친 점의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걸 본 후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술을 가르쳐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지만 노인네는 선력의 경지가 오르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될 거라며 전수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인세에 널린 절대다수의 돌팔이들보다 조금 나을 뿐, 진정한 역학의 대가들에 비하면 겨우 흉내나 내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겸양을 떨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노인네가 지닌 여러 이능(異能) 중 가장 신비한 재주였다.
***
결국 양 관주의 정인의 이름과 둘 간의 연사, 그리고 개세팔천의 일인임이 확실시되는 그들의 원수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양 관주가 실토할 때까지 몰아붙인 건 아니었다. 우회로가 있었기에 구태여 그녀를 괴롭힐 까닭이 없었다.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알아보겠소.”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걸로 충분했다. 양 관주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걸 알면 석진은 캐묻지 않아도 신이 나서 밤새 떠들어댈 터였다.
문제는 석진이 보양에서 이천이백 리나 떨어진 ‘파우치’에 갔다는 것이었다. 구룡보 사태를 전해 듣자마자 양 관주가 내린 조치였다. 참고로 한월노모도 석진과 함께 그리로 대피했다. 십자무련의 입김이 닿지 않는 데다 힘이 곧 법인 땅이기에 두 괴짜가 설치고 다니기엔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급전으로 두 사람을 부르도록 시켰다. 하루라도 빨리 양 관주의 비사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향후의 과제수행에 그들의 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이내에 일천 건의 원사를 처리하려면 양천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공주로 돌아간 양천에게도 보양으로의 귀환을 요청하는 전서구를 날리기로 했다. 그는 석진과 한월노모를 합친 것 이상으로 든든한 방수였다.
여하간 세 사람을 부리면 목표로 삼은 사냥터들의 먹잇감들을 빠짐없이 잡아낼 수 있을 터였다.
***
양 관주와 세세한 사항에 관해 논의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창가가 어둑어둑했다.
밖으로 나가니 눈에 익은 호위나찰들이 등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양 관주가 그들과 함께 떠나자 안진이 떠오르며 갈등이 생겼다.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 별채로 가 볼 것인가, 아니면 튈 것인가.
세 번째 선택지에 생각이 미친 순간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뭐가 켕긴다고 달아난단 말인가. 지은 죄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게 있다손 쳐도 안진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같은 이유로 별채에 가서 추이를 살피는 것도 우스웠다. 하여 나는 그냥 소운당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안진은 밤이 이슥하도록 코빼기를 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콩알만 하던 불안감이 수박만큼 커졌다.
안진의 안위를 걱정한 건 아니었다. 그녀를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천하를 통틀어도 일백을 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보양에 들었을 가능성은 일 푼의 일 푼도 안 될 터였다.
내 염려의 대상은 안진이 아니라 주근깨였다. 둘 다 대가 세지만 부딪치면 작살나는 건 주근깨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안진이 범인을 상대로 애먼 짓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확신하긴 어려웠다.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류였다.
기다리다 못해 소운당을 나온 나는 별채로 향하다 죽림 어귀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혹시 안진이 근처에 숨어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 내가 주근깨를 만나러 가는 걸로 몰아붙이며 그걸 빌미로 핏대를 세우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이었으나 왠지 들어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청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음에도 온갖 잡음만 들어올 뿐 안진의 숨소리는 잡히지 않았다.
맥이 풀린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이른 봉야가 없는지 별채는 한산했다. 내 집인 양 이 방 저 방 뒤지며 안진을 찾는데 자하옥관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아왔다.
인성이 고약하거나 술에 취한 손님들이 일으키는 소란은 기루의 일상다반사인지라 무시하려던 나는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본관으로 가보기로 했다. 소나무 숲을 지나 육 층 전각에 이르니 괴괴한 적막이 나를 맞이했다.
방금 전의 소음은 뭐였단 말인가. 그보다 기루에서 이런 고요함이라니. 마치 벙어리들만 사는 마을의 장터 같지 않은가.
불길한 예감에 입구로 달려가 안으로 들어서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복도 양편을 지키고 있던 금박을 입힌 청동 봉황들이 박살이 나 있었고 수십 명의 남녀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경악성을 토해냈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