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1
Prologue
한재희
문득 고요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올해로 여덟 해가 되었다. 준우는 햇수로 여덟 해나 알고 지낸 여자를, 그 여덟 해 동안 출장과 휴가를 제외하고 매일 사무실에서 봐 왔던 여자를 마치 처음 보듯 찬찬히 훑어본다.
여자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식사에 열중한 듯 준우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다. 파르스름한 빛이 돌 만큼 흰 피부나 자그마하지만 단단하게 선 콧날은 여자의 인상을 차갑게 보이게 한다. 누구에게든 감정을 사는 일이 없지만 쉽사리 마음을 여는 일도 없고, 매사에 허술하거나 애매한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여자의 특성과 잘 들어맞는 부분이다. 하지만 준우는 밥을 푸느라 아래로 향한 시선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는 여자의 눈동자가 얼마나 다정한지 알고 있다.
‘제 눈빛이 묘하게 차갑다고 하네요. 정말 그런가요?’
언젠가 그녀가 대화 끝에 꺼낸 말이 떠오른다.
‘잘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다정하다고 말하기 머쓱하여 짤막하게 답했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평가였다. 자주 소리 내어 웃진 않지만 늘 미소 짓는 이미지로 기억되는 이유의 대부분은 그 눈동자 때문이다.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눈동자 외에, 흘러내린 머리칼로 반쯤 가려진 이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잠시 고민해 본다.
처음 만났을 무렵, 그녀는 앞머리를 걷어 올리는 헤어밴드를 즐겨 착용했었는데……. 머리와 이마가 이어지는 부분에 보슬보슬 솟아난 잔머리가 선명하게 떠오르다 지워진다. 문득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걷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준우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퍼 올렸다.
“……더 일찍 말씀드릴 걸 그랬나 봐요, 사장님.”
여자의 말에 준우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조금 전, 자신이 꺼낸 퇴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만 망설이다가 말했지. ‘저, 회사 그만두어야 해요.’ 느닷없는 결별 선언도 아닌데, 적잖이 당황했었나 보다. 마치 귓속을 솜으로 꽉 틀어막은 것처럼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지난 주에 말씀드리러 찾아갔었는데 너무 바쁘신 거 같아서……. 죄송해요, 그때라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결혼식 전에 인사도 다니고 이런저런 준비도 하려면 아무래도 회사 일과 병행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그래요.”
“당분간은, 적어도 한두 달은 계속 일할 겁니다. 제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올 때까지…….”
“그래 주면 고맙고.”
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의 말을 차분하게 곱씹었다. 마치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는 막막한 문제를 접했을 때처럼.
‘제 자리를 대신할 사람.’
한재희 팀장을 대신할 사람. 한재희를 대신할 사람…….
SJ파이낸스의 팀장 자리를 맡을 이는 이미 몇 사람 정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든 한재희의 목소리나 한재희의 이마나 손가락을 가진 이는 아닐 것이다. 그녀와 같은 갈색 빛이 도는 다정한 눈동자도…….
갑자기 한재희가 아닌 누군가가 한재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몹시 불쾌해진다. 한재희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무엇이었더라.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밥집에서 나와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가는 동안에도, 거대한 굉음이 간헐적으로 터지는 영화가 시작된 후에도 준우는 줄곧 기억의 마디를 더듬어 가며 두서없이 한재희를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스물두 살 한재희, 스물다섯 살 한재희, 스물아홉 살 한재희.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인턴 최종 면접 때였다. 준우는 여덟 해 전의 그날을 스크린에 투영되는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 손가락 굵기만 한 베이지색 헤어밴드, 풍성한 갈색 머리, 하얀 얼굴. 열리는 문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던 여학생은 소녀 같은 여린 외모와는 다르게 똘똘하고 야무진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여름 깊은 숲에서 달게 들이켜는 서늘한 바람 같았다. 지독하게 피곤했던 날이었다. 열이 오르도록 머릿속이 북적거렸던 날, 준우는 서늘한 바람 같은 재희를 처음 만났다.
유달리 무덥고 지치던 그해 여름, 정신없던 가을, 어느새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시간이 쉼 없이 흐르는 동안 그 여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재희는 줄곧 준우와 같이 일했다. 5년 전, 준우가 골드만삭스 서울 오피스 부사장 자리를 그만두고 SJ파이낸스를 시작했을 때에도 재희는 준우가 같이 일하겠냐고 가장 먼저 제안했던 사람이고, 또한 가장 명쾌하게 그러겠노라고 답해 준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누구도, 심지어 준우조차 SJ가 이런 규모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젠가 물었다. 뭘 믿고 골드만삭스를 나와서 SJ로 왔냐고. 재희가 눈을 맞추고 웃었다.
‘당연히 사장님을 믿었죠.’
‘내가 그런 모험을 하게 할 만한 믿음을 언제 줬다고.’
가벼운 대꾸였는데 그녀가 마치 일기장을 검사받는 아이 같은 자세로 말했다.
‘항상. 처음부터요. 처음 인터뷰 때부터 같이 일했으면 했어요.’
‘왜?’
준우의 물음에 재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무작정 믿었나 봐요.’
서준우
8년 전, 금융 대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국은 서준우가 다니던 세계적 투자은행에 위기와 함께 큰 기회를 제공했다. 서준우는 하루하루를 예측하기 어렵도록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에 들어왔고, 그해 여름을 국내 그룹 구조조정 본부에서 맞이했다. 날의 시작과 끝의 구분이 서지 않을 정도로 버겁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바뀐 계절, 여름……. 그날은 여름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다.
“매각 자료 완성되었습니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한 만큼 가져오십시오.”
준우의 머릿속에서는 두세 가지의 다른 사안들이 제각각 굴러가는 중이었다. 최대한 간략하게 감정을 담지 않고 지시했지만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영준이 무안함과 모멸감이 범벅된 표정으로 돌아섰다.
영준이 서울 오피스에서 그룹 구조조정 본부로 파견된 지 열흘 정도 되었나…….
첫날부터 그는 골드만삭스 뉴욕 본사에서 상무이사 자리를 달고 날아온 서른도 안 되는 새파란 놈, 서준우에 대해 은근한 비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의 구제 금융 사태가 억세게 좋은 운으로 작용한 녀석. 이미 준우가 몇 달 동안 외환 보유고와 기업 구조조정 프로젝트에 나서게 되면서 신물 나게 당했던 취급이다.
영준은 내용상으로는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PT(presentation,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들고 왔고, 목차부터 완전히 빠져 있는 브랜드 가치를 언급하는 준우의 지적에 몹시 불편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준우는 쉽사리 상대의 기분에 동요되지 않는 편이었다. 불쾌함을 표하는 대신 농담을 건넸다.
“힘드셨겠네요. 이걸 혼자서 하루 만에 다 해내라니, 제가 또라이 기질이 확실히 있죠?”
영준이 당황한 얼굴로 보았다.
“배웠어요, 또라이라는 단어. 죄송합니다. 제가 도우면 좋겠는데 지금 또 회의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도 전쟁터라…….”
“아닙니다. 빨리 완성해 보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국말 참 잘하세요. 대학 때부터 미국에서 있었던 저보다 더 나은 거 같은데, 미국에 언제 갔죠?”
농담이 효과가 있었던 듯, 영준이 굳은 표정을 풀고는 꽤 친근한 투로 말을 붙였다.
“초등학교 때 갔는데 형들이 있어서 말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상무님 한국말과 한국식 예절 덕분에 전쟁터 같은 회의 분위기가 그래도 많이 부드러워진다면서요. 회장님부터 경영진들이 울 회사 사람 중에 제일 맘에 들어 한다고. 하긴 우리 회사 백인들이 통역 달고 회의 들어가면 분위기 진짜 험악하지. 그룹 회장님이 골드만삭스는 못 믿어도 서준우 상무가 하는 말은 다 믿는다, 하신다던데?”
준우는 의미를 새기려 영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영준이 웃더니 ‘진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인정하오.’라는 식의 멘트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준우는 묵직해져 오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폈다. 자동차 회사 해외 매각 건이었다. 금리와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치솟았고, 자금 경색에 허덕이던 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다. 계열사 해외 매각은 기업을 살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지만 회사 사람들은 팔을 잘라 내는 기분이라고 했다.
시장통에서 만 원짜리 물건을 팔아도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마음을 일치시키기란 힘든 일일 터인데, 더군다나 육신의 일부를 잘라 내는 기분으로 회사를 매각한다는 한국 기업 측과 한국 경제에 짙은 의문을 표하는 외국 회사 간의 계약이다. 기업의 목줄을 조여 오는 상황을 고려하면 되도록 빨리 최선의 조건으로 완성시켜야만 하는 계약. 또한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국민 정서에도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만 하는……. 머리로 후끈 열이 올랐다. 맞춰 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았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단절시킨 건 서울 오피스 HR 담당자로부터 걸려 온 핸드폰 소리였다. 팀원 보충을 위해 부탁한 인턴의 최종 면접 시간을 확인해 주고 준우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준우는 택시를 타자마자 넥타이 매듭이 느슨해지도록 조금 당겨 내렸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오피스로 가는 동안에도 열 오르는 두통은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전부터 시작된 기업 경영진들과의 미팅은 배달시켜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면서 이어졌다. 다섯 시간이 넘게 계속된 회의는 저녁 식사 이후 다시 시작될 것이다.
준우는 주먹으로 경련이 이는 미간을 꾹 눌렀다. 이런 일에 비하면 숫자와의 씨름 따위는 거저먹기나 다름없었다. 막강한 회사 프로그램에 푸팅(putting, 입력) 작업만으로 적지 않은 수고로움이 덜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이란 포뮬러(formula, 공식)에 정보를 입력시킨다고 예상치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자신 혹은 자신의 회사에 대한 냉담한 시선들 속에서 호의를 끌어내거나 최소한 아무렇지 않게 버텨 나가려면 얼굴에 가면 두세 개쯤은 늘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후우…….”
차창에 희미하게 비쳤다가 사라지는 젊은 남자의 얼굴은 무기력과 무표정에 가까웠다.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격무와 신경줄 하나를 팽팽하게 활시위처럼 당기는 긴장감에 상당히 지쳐 가는 중이었다.
*
재희는 골드만삭스 서울 오피스가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인터뷰 예정 시각까지 15분이 남았다. 핸드폰으로 ‘골드만삭스 아이뱅커(Investment Banker, 투자은행가) 한재희, 파이팅!’ 문자가 도착하였다. 최종 인터뷰 요청 전화를 받았을 때, 폴짝 뛰어오르듯 기뻐했던 연숙은 연세대에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익숙하지 않은 한국에 와서, 가뜩이나 낯까지 가리는 재희를 늘 곁에서 챙겨 주던 언니 같은 친구. 그 성품답게 연숙이 시간 맞춰 독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잊지 않은 것이다.
재희는 심호흡을 하고, 몇 번 다녀간 곳이지만 여전히 입구부터 기가 질리는 오피스에 들어섰다. 안내받은 인터뷰 장소는 작은 회의실이었다. 종이 두 장, 연필 두 자루, 그리고 인터뷰를 담당할 사람의 레주메(resume, 이력서)를 받아 들고 재희는 테이블 중앙보다 한 자리 안쪽으로 치우친 좌석에 앉았다. 냉방이 지나친 탓인지, 긴장 때문인지 소슬한 기분이 들어 재희는 양손을 모아 쥐고 호오 입김을 불어 보고는 레주메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Jun ― uh Seo.
서준우.
미국 명문 사립고 수석 졸업, 아이비리그 최우등 조기 졸업, 헤지 펀드 근무 후 스탠포드 MBA 졸업, 골드만삭스 뉴욕 본사 입사, 홍콩 오피스 근무를 거쳐 현재 서울 오피스로 파견된 상무.
“후우…….”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 막히는 경력을 붙인 사람이다. 타고난 머리든 집안 배경이든, 혹은 그 두 가지의 조합 덕분이든 거침없이 성공 가도를 달려온 사람들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는 이미 몇 차례 인터뷰에서 겪었다. ‘또 30~40분 곤혹스런 시간을 견디면 되겠지.’ 하는 기분으로 서준우의 상세 근무 경력 첫 파트를 읽기 시작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움칫 놀라면서 일어서다가 재희는 눈을 크게 떴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훤칠한 키에 단단한 체구의,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서준우라고 합니다.”
남자가 큰 걸음으로 다가와 명함을 건네면서 손을 내밀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길고 섬세해 보이는 손가락을 가진 손이었다.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과과한 냉방 탓에 재희는 팔등에 소름이 돋을 만큼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재희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내밀었다.
“한재희입니다.”
남자는 재희의 손을 힘 있게 감싸 쥐었다. 남자의 손은 보기보다 훨씬 두툼하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전해지는 더운 체온 때문이었는지, 순식간에 뱃속 깊은 곳부터 따스해졌다. 언젠가 이런 손을 잡아 본 적이 있다. 재희는 그 순간 어울리지 않게도 세차게 흔들리는 놀이기구에서 조그만 손을 아프도록 꼭 잡아 주던,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울 공주님, 미안, 미안. 아빠가 미안.’
머리를 수그리고서 와앙 울음을 터뜨리는 재희의 손을 잡고서, 아빠는 환호성과 비명이 뒤섞인 소음 때문에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듯 말하였다.
남자와 손을 잡은 채로 저도 모르게 떠올렸던 미소가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남자는 거침없이 달려온 커리어만큼이나 타인을 대하는 시선에도 망설임이 없어 인터뷰 대상자의 머릿속이나 마음을 바닥까지 쉽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앉으세요.”
남자는 몸에 밴 직업적인 매너로 부드럽게 말을 이으며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가 허전하여 재희는 저도 모르게 제 손등을 감싸 쥐었다.
“한재희 씨, 미국에서 학교를 다 나왔네요. 여기는 교환학생으로 온 거예요?”
“네, 마지막 학기는 연세대에서 공부했습니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인터뷰 한국말로 계속하죠.”
“여기 와서 많이 늘었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주메에 시선을 둔 채 질문을 하였다.
“미국 시민권자네요.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던지는 소소하고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긴장감을 덜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재희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살피듯이 바라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숨을 한번 삼키고 답했다.
“아닙니다. 출생은 일본에서 했고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갔습니다.”
여섯 살까지였다. 일본에서 엄마,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은. 여섯 살, 6년, 제대로 기억하기엔 너무 어리고 너무 짧았다.
“금융 전공은 맘에 들었어요?”
이어지는 질문에 번득 정신이 들었다. 흐려지던 마음을 다잡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어떤 점이 그랬죠?”
“불확실한 미래를 과거와 현재를 통해 예측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맘에 들었습니다.”
남자가 양손으로 깍지를 만들며 빙그레 웃었다. 풋내기다운 답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래요? 예측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인데.”
“틀리기 때문에 미래라 하지 않고 예측이라 하겠지요.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현재의 삶은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현재를 노력하면서 살아 나가는 사람의 의지가……, 좀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그렇지만 그런 의지가 아이러니하게 포뮬러로, 숫자로 구체화되어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그가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 동안 쉽지 않은 질문도 있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답해도 돼요. 영어로도 좋고.”
남자는 정돈된 말투로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답을 하는 중간 중간 한 번씩 확인을 하듯 올려다보는 눈매도, 말을 더듬을 때면 싱긋 웃는 입술이나 박자를 맞추어 가볍게 끄덕이는 고갯짓도 아이뱅커로서 세련된 매너의 연장선일 뿐이겠지만, 재희는 그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쉽게 안정을 찾았다.
“골드만삭스나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형식적인 마지막 질문 후, 골드만삭스의 기업 문화에 관한 간략한 문답을 마치자 남자는 흘끗 시계를 보더니 바쁜 듯이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다시 잡으면서 재희는 그의 물음을 곱씹었다.
‘저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같이 일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남자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쉽게 도달하지 못할 커리어를 단기간에 성취한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경험보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던 안온함이 더 궁금하였다. 재희는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