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124
124. 「슬라임 헌팅」
몇 번을 생각해도 내가 진행하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준비해둔 브레이크들도 나를 막지 않는다.
일을 진행할지는 내 판단에 달렸다는 뜻.
할지 말지 고민된다면 하는 게 맞겠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들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
“훗.”
무심코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온 소리에 청년은 머리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중2병은 고질병이다.
그 당시에는 멋져 보였는데 나중에 되돌아보면 오글거려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몹쓸 병이다. 그 상처는 어찌나 깊은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좀처럼 치유될 줄을 몰랐다.
혹시나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했다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돼서 평생 쫓겨 다니게 된다.
그런데 이 병의 더 악질적인 점은 분명히 나았다고 생각했어도 계기가 있으면 다시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간지와 오글거림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다.
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간지가 있다고 생각한 행동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오글거릴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멋있다고 생각하며 해버리고 만다.
‘아니, 이걸 어떻게 참냐고.’
애써 묻어뒀던 그것을 다시 파내려고 하다니.
슬라임랜드를 세운 연금슬라임은 악마가 분명했다.
「내가 바꾸는 이야기」로 밑밥을 깔아놓은 게 더 나쁘다.
「내가 바꾸는 이야기」를 반복하다 보면 롤플레잉에 저항감이 낮아진다.
그런 상태에서 연금슬라임은 슬라임랜드를 헌팅 게임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슬라임 헌팅」에는 코스가 없다.
무대는 슬라임랜드 전역이다.
슬라임랜드를 돌아다니다 보면 수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수정을 만지면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공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슬라임랜드를 침공하려는 적.
「슬라임 헌팅」의 플레이어는 수정 내부의 공간에서 수호자로 변신할 수 있다.
수호자가 되면 신체 능력 보정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HP 같은 게 생긴다.
이 HP가 0이 되면 자동으로 수정에서 쫓겨나게 될 뿐. 실제로 다칠 염려는 없다.
그렇게 강해진 채 적을 사냥하면 다양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보상은 주로 골드와 장비다.
골드는 현금이 아니다. 「슬라임 헌팅」을 하는 도중 소모하는 체력 회복 포션이나 강화 포션 같은 물건들을 살 수 있다.
「내가 바꾸는 이야기」에 이은 또 하나의 VR 게임이다.
하지만 「내가 바꾸는 이야기」와는 꽤 차이가 있다.
「슬라임 헌팅」에는 연속성이 있다.
「내가 바꾸는 이야기」도 연속성이 있기는 하다. 어느 챕터에서 내가 한 일이 뒤에 나오는 챕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영향은 한정적이다.
예전 챕터에서 해놓은 일이 후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고 오는가.
이건 작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정을 해뒀고, 작가가 각색을 얼마나 허용하느냐에 달라진다.
본인이 만든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작가라면 전개를 크게 바꿀 수 없다.
예전 챕터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든 단순한 촌극으로 끝난다거나 아예 없었던 일이 된다.
반대로 아예 제한 없는 전개 변경을 허용하는 작가도 있는데.
이건 전개가 심해나 우주로 가는 일이 많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자유도가 높을수록 전개가 엉망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가자가 바꾸는 건 주인공의 점심 메뉴처럼 소소한 일이 아니라 주인공의 가치관에 크게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일이니까. 작은 돌멩이조차 큰 눈덩이로 불어나고는 하는데 폭탄을 터뜨리면 전개는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슬라임 헌팅」은 스토리가 없다.
적을 사냥하고, 수호자의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바꾸고.
더 강한 적을 사냥하고, 수호자의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바꾸고.
무한 반복이다.
게임을 할 때 스토리는 건너뛰는 사람에게 딱 맞는 게임 방식이다.
한국 게이머가 어떠한 종족인가.
스토리보다 최고의 레벨과 최고의 장비에 환장하는 종족이 아닌가.
청년에게는 딱 맞았다.
분류하자면 「내가 바꾸는 이야기」는 스토리가 중심인 게임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자유도가 아무리 높아도 한계가 있다.
이렇다 보니 빨리 다음 챕터를 각색하여 오픈하라고 작가를 닦달하는 게 요즘 원작 팬들이 하는 일이다.
「슬라임 헌팅」은 액션 게임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계속해서 침공해 오는 적들과 끊임없이 싸우면 그만이다.
이렇게만 보면 중2병을 자극한다고 욕할 이유가 없지만···.
이런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룩덕질이다.
얻는 장비에 다양한 스킨을 입힐 수 있다.
성능적으로는 차이는 크지 않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꾸밀 수 있다.
중세 기사 모습을 하고 싶다면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울 수 있다.
길리 슈트를 입고 총을 쏘고 헌팅 나이프를 휘두를 수 있다.
SF처럼 파워드 슈트를 입고 광선검을 휘두르거나 레이저건을 쏠 수 있다.
장비의 스킨을 고를 때부터 묻어뒀던 어두운 과거가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꾸민 장비를 입고 싸우다 보면 묻어뒀던 어둠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오고 행동으로 드러난다.
청년이 「슬라임 헌팅」 전용 공간에 있는 상점에서 나오는데.
“으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 막 시작한 초심자들은 깜짝 놀랐으나 청년을 비롯한 나머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슬라임 헌팅」에 스토리는 없지만, 플레이어들의 공통된 목적이 하나 있다.
“퉤.”
“너 이 개XX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원망의 대상이 된 슬라임은 달려드는 남자를 가볍게 들어 던져버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랐으나 대부분에게는 이미 익숙한 광경이었다.
「슬라임랜드 헌팅」에는 강화 시스템이 있다.
이 장비를 강화해주는데 외모는 무척 귀엽다.
장비를 강화하는 모습도 꽤 귀엽다.
몸에 장비를 넣고 가볍게 춤을 춘다.
성공하면 장비에서 번쩍번쩍 빛이 난다.
도 [축하합니다! +3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팻말을 흔들면 축하해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좋은 슬라임이지.
이 의 본성은 강화에 실패했을 때 나온다.
“퉤.”
실패하면 쓰레기를 뱉듯이 장비를 뱉어낸다.
실제로 쓰레기가 된 것은 맞으나 강화까지 생각한 장비가 그런 취급을 받으면 열이 뻗치기 마련이다.
그렇게 분노한 플레이어를 향해 은 빨리 꺼지라는 듯 촉수를 흔든다.
그런 모습을 보이다가도 강화하겠다고 새로운 장비를 꺼내면 통통 뛰며 애교를 부린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이 플레이어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화를 못 참고 무기를 휘두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수호자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공간은 훈련소와 수정 내부뿐이다.
이 「슬라임 헌팅」 전용 공간에서는 수호자로 변신을 할 수 있으나 능력은 제한된다.
맨몸으로 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아무리 덤벼도 승산은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검은색 수정 내부에서 을 마주쳤다는 목격담이 있다.
“야! 우리 만난 적이 있지!”
그렇게 따졌지만,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그래 놓고서는 그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던 장비를 빼앗아 강화하고 그것으로 공격해왔다고 한다.
강화 실패를 할 때마다 죽이고 싶어지는데 장비를 강탈해 강화한 뒤에 그걸로 공격해 온다?
죽여야지.
수정 내부에서는 수호자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과도 싸울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본 수많은 플레이어가 열심히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강화했다.
“강화해줘. 강화된 장비로 레벨을 올리고 더 강한 장비를 얻어서 언젠가 너를 죽이고 말 거야”
가끔 너무 몰입하여 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안 돼!!!”
“퉤.”
을 사냥하는 건 아직 먼 이야기다.
은 수호자로 변신하여 보정을 최대로 받는다고 해도 무찌를 수 없을 만큼 강하니까.
청년은 「슬라임 헌팅」 전용 공간을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수정을 발견했다.
‘주황색.’
지금 수호자 레벨로는 조금 위험한 상대다.
수정의 색에 따라서 나오는 적의 강함이 정해진다.
흰색이라면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상대.
주황색은 약간 위험한 적.
검은색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강적을 뜻한다.
수정에 다가가는데 다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반인은 누가 슬라임랜드 수호자인지 모르나 수호자들끼리는 눈빛만 나눠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수정을 다수에 차지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양보할 때도 있고, 협상할 때도 있고, 힘으로 차지하려고 할 때도 있다.
상대의 선택은 마지막이었다.
결투장이 날아왔다.
장비만을 고려한 승률이 표시됐다.
‘조금 밀리나.’
청년은 남자를 눈으로 훑었다.
‘이길 수 있다.’
수호자로 변신했을 때 신체 능력 보정이 걸린다고 해도 운동신경이 퍼포먼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운동신경은 타고나는 것도 있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훈련으로 강화된다.
몸 상태를 볼 때 상대는 운동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제대로 다룰 육체가 없다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청년이 결투장을 수락하자 둘은 별도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
“···.”
서로의 복장을 본 둘은 한마디씩 하고 싶은 심정을 삼켰다.
타인의 취향을 지적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조금 거리가 떨어진 장소에서 결투가 시작됐다.
전사 대 궁수의 대결.
상대는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청년은 주눅 드는 일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청년은 모든 장비를 공격력에 집중했다.
발이 느리기에 도망칠 수 없다.
방어력이 약하고 HP가 적어 붙잡히면 끝이다.
‘그 전에 쏘면 돼.’
청년은 활시위를 놓았다.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상대의 이마를 꿰뚫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압도적인 재능 앞에서 포기했던 길.
헛되이 보냈다고 여겼던 시간.
의미가 없이 낭비됐다고 여겨졌던 노력.
그 길이 지금 이렇게 색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결투에서 이겨 수정의 권리를 얻은 청년은 안으로 들어갔다.
‘나쁘지는 않네.’
무사히 사냥을 마치고 얻은 장비는 꽤 괜찮았다.
본인이 쓸 물건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팔릴 법한 물건이었다.
이 「슬라임 헌팅」의 또 특별한 점 또 하나.
돈이 된다.
다른 코스에서도 등을 찾으면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거리로 바꿔준다. 하지만 이건 돈을 번다기보다는 아끼는 거다.
「슬라임 헌팅」은 현금을 벌 수 있다.
지출을 줄이는 게 아니라 통장에 적힌 숫자가 증가한다.
「슬라임 헌팅」 전용 공간 내부의 거래소를 통해 얻은 장비를 타인에게 현금으로 팔 수 있다.
게임 속 거래소 같은 것에 올려 경매할 수도 있다.
개인 간의 거래도 할 수 있다.
거래는 반드시 슬라임랜드 내부의 거래소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때 내야 하는 수수료가 만만치 않다.
이 수수료를 피하려고 외부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장비를 판매한 적이 있는데 순식간에 중단됐다.
그뿐 아니라 편법을 쓰려고 한 사람들도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죄다 걸렸다.
그들에게 내려진 벌은 무려 사용 제한.
을 사용할 수 없는 삶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런 꼴을 당하느니 그냥 수수료를 내고 말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슬라임랜드 외부에서의 거래는 사라졌다.
수수료가 꽤 강하기는 해도 운이 좋으면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실력만 충분하다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과연 전업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용돈벌이로는 쏠쏠했다.
’그리고 활을 쏠 수 있으니까.‘
돈이 되기는커녕 즐기려면 돈을 내야 했던 과거의 잔재.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청년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수정을 발견한 청년은 안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서 적이 달려온다.
활을 당기자 절로 입가 끝이 올라갔다.
활을 쏠 때 이렇게 감정이 흔들리면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연금슬라임 님 감사합니다.”
***
“천만에요.”
이따금 감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욕하는 목소리도 있겠지만, 슬라임 귀는 자동 필터링 기능이 있어 그런 소리를 못 듣는다.
반쯤 농담이다.
내 귀에 달린 게 아니라 마더가 욕은 거르고 칭찬과 감사를 전해준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보살핌은 필요 없는데.
그래도 욕하는 목소리는 피하고 감사의 목소리를 듣는 건 확실히 기분이 좋다.
불만의 목소리를 못 들으면 발전도 없다.
이 말도 맞기에 대비를 해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들이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문제가 있으면 보고하게 돼 있다.
슬라임랜드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했으니까 이를 게을리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직접 욕을 듣지 않더라도 불평불만이 슬라임 아래 묻히지 않는다.
한스의 보고서를 계속 보고 있는데 역시 현재 슬라임랜드의 운영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못 찾겠다.
나 때문에 축소되는 산업은 많다.
그 대신 슬라임랜드 내부에서 활동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바꾸는 이야기」를 각색하는 작가들.
슬라임랜드 내부에서 영상을 찍는 방송인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음악가들.
「슬라임 헌팅」을 통해 얻은 장비를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들. 이쪽은 아마 머지않아 프로게이머 같은 사람들이 나오겠지.
기술이 발전할수록 1차, 2차,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줄어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되고, 위험하고, 반복적인 일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다.
대체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
SSS급헌터 : 나는 슬라임이 싫다.]
그러고 보니 내 친구 기수처럼 을 싫어하는 사람은 점점 살기 어려운 나라가 돼가고 있구나.
그렇지만 이것도 써보지 않아서 그렇게 느낄 뿐이 아닐까.
을 싫어하던 사람도 몇 번 써보면 을 구하려고 안달 내는 지경에 다다른다.
기수도 마찬가지 아닐까?
뭐, 체질 때문에 어렵겠지만.
[나 :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생각해?마키나 :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게 네 행복?
나 : 아마도?]
사람들이 슬라임랜드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즐거우니까.
[마키나 : !@#! !@#!?나 : 미안. 글씨가 깨졌어.]
가끔 있는 일이다.
통신 회사랑 스마트폰 회사도 차리는 게 좋을까?
[마키나 : ···오늘 게임은 두 개야.]마키나가 보내준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게임은 모험 어드벤처 게임이었다.
소녀는 안락한 집을 떠나 고난으로 가득한 모험을 겪은 뒤 조금 어른이 돼 돌아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게임은 도시 건설 게임이었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만들어져서 무언가를 세우면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싫어하는 그런 게임이었다.
마키나가 무언가 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무엇을 전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
시간이 흘렀고.
저주는 대체 무엇이 목적이었을까.
그 답을 머지않아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