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149
149. 친구들.
애쉬가 갑자기 내게 실망했다고 했다.
농담이나 장난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진지하게 로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거다.
“뭐가?”
애쉬는 아래를 내려봤다.
“이 섬은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전부 훑어본 것은 아니나, 지금 파악한 부분만 해도 사람의 탐구심을 자극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칭찬 고마워.”
“그런데 이건 뭐지?”
애쉬는 다시 로드를 올려봤다.
“탐색도, 궁리도, 발전도, 발견도 없다. 심지어 명확한 구상조차 없다. 이것에 을 위로 세운 것과 무슨 차이가 있지?”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는 속을 간파하는 눈동자로 나를 봤다.
그 눈으로 내게 이 졸작을 세계에 내놓은 의도를 물었다.
애쉬의 말이 맞다.
로드는 우주 궤도 엘리베이터.
사람과 물자를 지상과 우주에 오가게 할 수 있다.
우주에 떠다니는 쓰레기들에 촉수를 뻗어 낚아챌 수 있고 들을 살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
우주 스테이션이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부족한 상태다.
과 마찬가지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한 번에 끝낼 필요는 없잖아. 이 상태로도 우주 쓰레기는 처리할 수 있어. 일단 세우고 천천히 발전시켜 나가면 되지.”
“그래. 단순히 우주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것으로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우주 시대를 열겠다는 거창한 말을 해놓고서 내놓은 게 이것인가?”
“말했잖아. 천천히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고. 가변성은 의 큰 무기야.”
“너의 들은 전부 목적을 지녔다. 제조 업무를 맡은 아이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을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슬라임랜드를 맡은 아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맡았고. 을 제어하는 아이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바다 아래에 있는 아이는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섬을 이루는 아이는 사람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겠지.
그런데 이 아이는 뭐지? 구경거리인가? 허울뿐인 역할을 맡기고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냐.”
애쉬는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반대로 내 입에서는 차갑게 식은 대답이 나왔다.
“우주 쓰레기 처리”
“그게 이렇게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가?”
“문제가 눈에 보이는 데 내버려 둬?”
“네 일이 아니라면 내버려 두는 게 당연하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야. 나도 당연히 그 모두에 포함되고.”
“너는 눈에 보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셈인가?”
“달리 할 사람이 없다면.”
“그런 식으로는 일을 점점 떠맡게 될 뿐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이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짓이기도 하고.”
대꾸하려다가 멈칫했다.
색욕의 저주 때가 떠올랐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지? 상대 수준에 맞춰 교류하며 시간을 들이면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을 내게 알려준 것은 너일 텐데? 어째서 교류를 포기하고, 기다리기를 그만두고, 전부 멋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거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잠시 일에서 손을 떼고 쉬기를 추천한다.”
그 말을 남기고 애쉬는 떠났다.
내가 또 저주에 삼켜져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건가?
사실 낌새는 있었다.
얼마 전에 레벨이 65에 도달했었다.
그때 상태창이 내게 스킬이 아니라 경험치를 줬다.
내 상태가 좋으면 새로운 스킬을 주고 상태가 나쁘면 빨리 레벨을 올리라고 경험치를 주는 상태창이 후자를 줬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만의 저주는 [결계☆] 스킬로 제대로 격리해 뒀다.
오만의 저주가 내게 주는 영향이라고는 ‘나는 옳다.’와 ‘내가 옳다.’ 이 두 가지가 전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데.
자신감과 자존감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한다.
확신을 품고 일을 진행해야 일도 더 잘 풀리는 법이다.
여론을 봐라. 모두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하는 일은 옳다.
애쉬가 대단한 것은 맞으나 나도 S 등급 연금술사다.
나도 나의 기준이 있다.
로드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해저 던전과 해양 쓰레기 처리로 여론이 내 편으로 돌아선 지금에 단숨에 일을 진행하는 게 맞았다.
나의 기준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세계 각국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우주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봐.
내가 옳잖아.
***
민족의 대명절 추석.
친척들을 만나러 갈 생각은 없으나 가족은 만나러 가야지.
마침 추석이 화요일이고 연휴가 5일이나 이어진다.
가족이 모두 있는 일요일에 집으로 갔다.
가족들 보안에는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내 집인 비상식량 수준은 아니어도 각종 이 침입자에 대비하고 있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라는 호신용 도 나눠줬고.
침입자는 평범해 보였던 집이 돌변하여 습격해 오는 공포 영화 한 편을 찍게 될 거다.
습격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평범해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촉수를 휘두르며 반격해 올 테니까.
은 최후의 방위선이다.
애초에 습격받는 경험 자체를 하지 않는 게 좋지.
그래서 평화 길드에도 경호를 맡기고 있다.
거기에 한스도 애초에 습격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
덕분에 지금까지 단 한 번에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왔어.”
“어서 오렴.”
집에 들어와서 탈을 벗었다.
지금은 내 몸이나 다름없게 여겨지도록 친밀한 탈이지만, 엄마가 벗은 상태를 더 하니까.
“밥은 먹었니?”
“무한히 먹을 수 있으니까 먹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건 친척들 선물.”
나는 친척들이랑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나쁘지는 않은데 친하지도 않다.
1년에 기수보다도 만나는 횟수가 적은데 친밀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일단은 육친이니까.
호신용 을 선물이랍시고 나눠주고 있다.
감히 내 가족과 친척을 인질로 잡으려고 드는 멍청이들은 없으리라고 여긴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에는 대비해야지.
“엄마 선물은?”
“당연히 있지.”
추석 선물의 정석.
과일 상자를 여러 개 꺼냈다.
이야 평소에도 많이 보내니까.
슬라임랜드의 과수원에서 하루에 하나 주는 과일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탐스러운 것들이다. 맛은 당연히 일품이고.
“쉬고 있어.”
소파에 앉아 이랑 TV를 보는데 동생이 방에서 나와 옆에 털썩 앉았다.
“뭐냐 혈육.”
“진짜 우주에 갈 수 있어?”
“갈 수는 있는데 너는 못 가.”
“야! 왜!”
“돈이 없으니까.”
“이거 있으면 된다며.”
동생은 내가 준 팔찌를 찬 팔을 흔들었다.
“그건 슬라임랜드 자유 이용권이잖아. 로드 투 스페이스는 별도야.”
“얼만데?”
“얼씨구? 내가 준 용돈으로 내겠다고?”
“내 돈이 됐는데 어떻게 쓰든 내 맘이지.”
“그렇게 우주에 관심이 있었냐?”
“우주보다는 지구를 보고 싶어서. 그래서 얼만데?”
“Priceless. 가격을 못 매겨.”
“장난하지 말고.”
“아직 가격을 제대로 안 정했어.”
“뭐야. 준비 끝났다며.”
“그러네.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우주 쓰레기 때문에 아직 위험하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잖아.”
“바다처럼 금방 치울 수 있는 거 아냐?”
“우주가 얼마나 넓고 우주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부터 공부하고 와라.”
“쳇.”
동생은 혀를 차고는 을 두들겼다.
왜 안 된다고 했을까.
우주 쓰레기 처리에 사용하는 건 좋다.
우주정거장에 자원을 보낼 때 사용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우주에 기대를 품은 사람을 로드를 통해 우주로 보내자고 생각하자 꺼려졌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애쉬가 한 잔소리가 내 안에서 맴돌았다.
현재 로드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조차 하지 않은 전망대나 마찬가지다.
사람을 우주에 올려보내 풍경을 보여줄 수는 있으나 그뿐이다.
우주에 올라갔기에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라고는 딱히 준비하지 않았다.
우주 체험? 슬라임랜드 내부에서도 할 수 있다.
풍경이야 디스플레이로 보여주면 그만. 무중력도 방을 낙하시키는 방법으로 재현할 수 있다.
우주라는 특수한 환경을 살리고자 하는 구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 관광객을 어떻게 받아.
직원들에게 연락하려다가 참았다.
내가 직원을 험하게 굴리는 사장이기는 한데.
연휴에는 건드리는 거 아니다.
“밥 먹으렴.”
그 뒤는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평범하게 시간을 보냈다.
애쉬의 말을 따르려는 것은 아니지만, 연휴에는 나도 조금 쉬자.
***
오늘은 추석.
가족은 친척을 만나러 갔을 테고 나는 내 집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미국에서 몬스터를 학살하고 사이비 교단을 박살 내느라 바쁜 내 친구 기수.
그 녀석은 현재 한국에 있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낸 뒤 나를 찾아오는 게 그 녀석의 패턴.
기수는 을 매우 싫어하니까 평범한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그 뒤로는 처음인가.”
기수가 내가 슬라임이 된 원인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처음 만나는 거다.
원망할 대상을 틀릴 생각은 없다.
나쁜 건 이상한 의식을 펼친 리본교와 저주를 건 리치다.
그들을 토벌한 기수는 정의의 편이지.
그래도 약간의 화풀이는 할 수 있잖아?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에는 음식이 제일이지.
추석은 송편을 먹는 날이기에 깜짝 앙금으로 놀려주기 좋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마마이트 송편과 땅콩버터 송편은 괜찮고 고추장 송편은 이상하다고 여기는 괴상한 입맛이 이번의 적이다.
송편 안에 을 넣으면 직방이기는 할 텐데.
진심 펀치가 날아올 것 같으니 관두자.
수제 민트초코 송편, 파인애플 피자 송편, 홍어회 송편, 오이 송편, 김치 송편 기타 등등 다양한 송편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초인종이 울렸다.
“왔냐.”
“그래.”
“그건 뭐냐?”
언제나 술이나 들고 오던 기수의 손에는 봉투가 잔뜩 들려 있었다.
“어머니께서 언제나 선물 고맙다고 음식 가지고 가라고 하시더라.”
“아···. 그 합의가 깨진 건가.”
기수 어머니는 기수와 어울려 줘서 고맙다고 자꾸 내게 무언가 주려고 하셨었다.
‘기수가 좋아서 어울리는 거지 보답을 바라고 어울리는 게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었다. ‘제 지갑 사정이 여의찮아서 선물 교환도 못 합니다!’ 이렇게 합의를 봤다.
내가 을 선물로 보내면서 그 합의가 깨졌구나.
“잘 먹을게.”
기수가 잔뜩 들고 온 음식에는 송편도 있었다.
“직접 만드신 거냐?”
“그래.”
“···여기서 이 음식이 아니라 내가 만든 깜짝 음식을 먹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
“싸울 거다.”
“그래···. 그냥 이거 먹자.”
기수를 안으로 들였다.
으로 뒤덮인 집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전 세계를 으로 뒤덮을 기세더라.”
“뒤덮을 건데? 아, 그러면 네가 살 곳이 없어지려나? 포기하고 을 즐겨.”
“싫거든.”
기수가 가져온 음식을 식탁에 차렸다.
“네가 준비한 거 어차피 송편이지? 그것도 줘.”
“옜다.”
녹색 송편을 입에 넣은 기수는 멈칫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이딴 걸 만들 게 되냐?”
“맛있지?”
“죽을래?”
기수는 보라색 송편을 입에 넣었다.
“이건 조금 낫네.”
“나는 네 혀가 나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대체 미국에서 혀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김치 송편은 싫고 버터 송편은 괜찮다니.
기수 어머니께서 만드신 음식이 살짝 불안해졌다.
먹어봤는데 아주머니의 입맛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이야, 맛있는데. 아주머니 요리 솜씨는 여전하시네.”
“당연하지.”
“그런데 네 혀는 왜 그 모양이냐?”
툭툭 말을 던지면서 밥을 먹고 술도 마셨다.
슬슬 자리를 파할 때가 다가오는데.
기수가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야.”
“왜.”
“조심해라.”
“뭘.”
“너, 옛날 모습 나오고 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냐.”
“그래. 나쁜 건 아니지. 내가 나쁘다고 할 일은 절대로 아니고.”
“아니, 고마워.”
기수를 떠나보낸 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생각 이상으로 오만에 먹혔네.
***
딸칵딸칵.
컨트롤러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미지로 가득한 내 친구 마키나와 노는 날.
오늘도 마키나가 고른 게임을 하는 날이다.
마키나는 내게 무엇을 전하고 싶어서 이 게임을 골랐을까.
화면 속 주인공은 구르고 또 굴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굴리고 있다.
주인공과 동료를 임무에 내보는 간단한 방식의 게임이다.
누구를 보내느냐에 따라 임무가 성공할 확률이 달라진다.
나는 주인공에게 쉬는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임무에 보냈다.
주인공을 임무에 포함하는 편이 성공할 확률이 높으니까.
당연한 선택이다.
주인공이 구르면 구를수록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다.
세계는 행복해졌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화면에 후일담이 나왔다.
모든 일을 짊어지려고 했던 주인공이 사라진 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마키나 : 감상은?나 : 잘도 이런 결말을 썼네. 웹소설이었으면 끝까지 고구마를 먹인다고 뒤집어졌을걸.
마키나 : 주인공이 누군가와 비슷하지 않아?
나 : 내 친구가 홀로 던전을 몽땅 없애려고 하는데 비슷하네.
마키나 : 유유상종.]
유유상종이라니.
기수와 어울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내가 이런다고?
나는 다르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에만 손을 대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다.
[마키나 : 나는 세상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마키나 : 자기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마키나 : 그래서 전부 짊어지려는 사람이 싫어.
마키나 : 그런 사람의 끝은 대체로 슬프고 안타까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