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ine Digger Gutter Slime RAW novel - Chapter 151
151. ‘내’가 아니라 ‘네’.
자, 그러면 우선.
분노 씨 들어가세요, 아, 들어가라고요. 날뛰지 말고요.
얌전히 있으라고요.
식사는 [정화+]의 불꽃으로 하루 삼 식 세 끼 챙겨줄 테니까요.
간식이랑 야식도 [정화+]의 불덩어리로 챙겨줄게요.
그러면 이만.
쾅.
공포, 탐식, 질투, 나태, 색욕, 오만을 토해냈다.
칠죄종에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아도 꽤 비슷하게 가고 있다.
앞으로 남은 저주는 아마도 하나.
높은 확률로 분노일 터였다.
표적이 하나뿐이니 즉시 [결계☆] 스킬로 분노의 저주부터 격리했다.
[결계☆] 스킬은 빗나가는 일 없이 정확히 적중했다. 분노의 저주를 무사히 [정화+]의 불길로 가득한 결계에 처넣었다.뭐, 이렇게 해도 분노의 저주가 주는 영향을 받겠지.
완전히 격리할 수 있었으면 색욕의 저주와 오만의 저주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분노라는 감정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오만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인류가 답답하다고 느꼈지, 분노하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오만의 저주는 저주 1.3개 분량이었는데 분노는 저주 한 개 분량이고.
저주를 토해내며 성장했을 테니까 오만보다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오만의 저주가 남긴 여파일까?
잘은 모르겠네.
분노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것보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땅을 팠다.
판 구멍에 을 던져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묻었다.
-타인의 시선을 막아주는 아늑한 슬라임. 찾지 말아 주세요.
이 을 만드는 것도 오랜만인걸.
“하하하.”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끄럽다.
세상에 칠죄종을 벌하는 지옥이 있다면 나는 오만의 지옥에 떨어질 거다. 그 뒤에는 탐욕의 지옥으로 이송당하겠지.
나는 오만하다.
슬라임으로 변해 만능에 가까운 힘을 얻기 전부터 그랬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과 오만함은 한 끗 차이.
중간에 자신감을 잃는 일이 있기는 했는데 옛날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스스로가 꽤 뛰어나다고 어린 시절의 나는 생각했다.
오만하지?
두 번째 저주를 토해낼 때와 비교하면 나는 많이 성장했다.
[결계☆] 스킬이 겉으로 드러나며 효과도 강해졌고, [정화+] 스킬도 있고, 스킬의 평균 레벨이 올라갔고 별도 5개 달았다.오만의 저주는 색욕의 저주처럼 요사스럽게 내 행동을 조종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냥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런데도 오만의 저주에 휘둘렸다.
나는 오만하니까.
탐식의 저주 때와 마찬가지다.
내 약점에 특효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애쉬는 내가 너무 급하다고 말했다.
‘어차피 아무리 시간을 줘도 못 할 거다.’
이러한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아무리 시간을 줘도 해결하지 못할 일. 그러니 괜히 문제가 악화할 틈을 주지 말고 빨리 처리하려고 들었다.
내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파도 전부 처리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만하지.
마키나는 내가 일을 너무 짊어지려고 한다고 했다.
아무리 일을 짊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한계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짊어진 짐 위에 갑자기 까마귀가 와서 앉을 수 있다.
여유를 조금도 두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것만으로 무너질 수 있다.
내 한계를 생각하지 않았다.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헤쳐 나갈 수 있으니까.
오만하지.
뭐, 이것만이라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지 않았을 거다.
내가 보석의 눈을 지닌 아이에게 한 말이 문제다.
‘좋아. 그 눈은 지금부터 내 것이야. 너는 앞으로 내가 보라고 한 것만 보도록.’
‘대신 네가 필요 없다고 하는 그날까지. 내가 네 인생을 책임지도록 하지.’
“으악!”
촉수가 빙글빙글 꼬인다.
몸이 동글동글 말렸다.
그대로 내부를 굴러다녔다.
오글거려!
잘도 저런 말을 지껄였네.
기수가 괜히 내게 옛날 모습이 보인다고 한 게 아니다.
저런 말을 내뱉는 인간이었다는 건 아니다.
아니었지?
이 꼴이 되기 직전의 나는 인간관계에 확신이 없었다.
마키나에게 손을 뻗고 기수의 일에 머리를 들이대던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은 꽤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 변화지.
고등학교 시절에 일이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조금 과하게 오지랖이 넓었다.
내가 발굴해 낸 기수가 세계적인 헌터가 돼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이기도 해서 많이 기고만장했었다.
무슨 일이든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끼어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평생 책임질 게 아니면 내 인생에서 꺼져!”
말보다 표정이 문제였다.
차마 말로 못 하고 줄곧 가슴에 새겨온 상처가 보여서.
참고 참다가 결국 폭발해 버린 게 눈에 보여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질 용기가 없었던 나는 도망쳤다.
타인을 대할 때 확신을 잃었다.
또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내 역량을 벗어난 일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싶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추진력을 잃었다.
내가 어설프게 손댔던 일들이 하나씩 어그러졌다.
어떻게든 수습하기는 했지만, 쌓아 올린 것들이 많이 무너졌다.
내가 스스로 잘라낸 부분도 많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넘어가면서 인간관계는 많이 끊어진다.
만나자는 연락을 계속 거절하다 보면 인간관계는 더욱 빠르게 축소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니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상대라고는 마키나와 기수밖에 안 남았다.
내가 인싸 고등학생에서 아싸 대학생으로 전직하게 된 배경 이야기다.
그랬던 내가 언제까지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다니.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내게는 힘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말은 연애적인 의미가 짙었지만.
세계를 눈에 품은 아이에게 한 말은 보호자로서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지겠다.
이렇게 말하는 건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어떤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고.
뭐, 입에 담은 이상 노력할 거지만.
입에 담지 않아도 노력할 거고.
“상태창.”
[특성 : 슬라임☆☆☆☆☆☆ Lv. 1.+용기 +절제 +믿음 +근면 +존중 +겸손
스킬:
분해+ Lv. 1. 흡수+ Lv. 1.
분석+ Lv. 1. 분열+ Lv. 1.
변질+ Lv. 1. 저장+ Lv. 1.
변환+ Lv. 1. 증식+ Lv. 1.
가속+ Lv. 1. 연결+ Lv. 1.
경화+ Lv. 1. 정화+ Lv. 1.
치유☆ Lv. 1. 전도+ Lv. 1.
결계☆ Lv. 1. 압박+ Lv. 1.]
6성에 도달했다.
별을 7개 모으면 소원을 들어주나?
내 소원은 과연 무엇일까.
어지간한 일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는 내가 2~3개의 스킬을 더 얻고 7성까지 달았을 때.
대체 무엇을 바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애초에 소원을 이뤄줄 것 같지도 않고.
별 7개를 달았더니 갑자기 신이 나타나.
‘절망에 지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훌륭하다. 소원을 말하거라.’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여기는 그 만화의 세계관 아래 돌아가는 세계가 아니니까.
이번에 얻은 버프는 [+겸손].
인간은 겸손함을 알아야지.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존중+] 버프는 색욕의 저주를 해결했을 때 얻었다.실제로 이번에 오만의 저주가 가하는 영향을 받으면서도 타인의 목소리에 줄곧 귀를 기울이려고 했다. 또 나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고.
이건 색욕의 저주가 오만의 가면을 빌려 쓴 여파일까?
어쨌든 이번에 얻은 [+겸손] 버프는 나에게도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에 도움을 줄 거다.
오만한 말을 내뱉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빈도는 줄어들겠지.
그런 행동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거다.
태생적인 성격이 오만하다니까?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던 시절의 나라면 모를까.
온갖 위업으로 나 자신을 증명한 지금.
내게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확신이 있다.
그게 태도로 드러나겠지.
그리고 내가 ‘돈 얼마 못 벌어요.’ ‘대단한 능력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다.
나는 세계 최고 연금술사라는 애쉬조차 못 만드는 을 찍어낸다. 그것으로 하루에 어지간한 인간이 평생 버는 것보다 많은 돈을 하루에 번다.
그런 내가 저런 말을 하는 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다.
사람에게는 능력에 어울리는 태도가 있는 법이다.
에서 벗어났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빨리 오만의 저주를 처리해야 한다.
을 손에 들었다.
“어휴 단단한 것 보소.”
누가 오만 아니라고 할까 봐.
-깊은 원념으로 빚은 저주의 일부.
네가 가장 친애하는 자는 절망의 늪 ■■ 빠져 허우적대다 네 손에 끝을 맞이할 ■■■!
남은 마스킹은 두 개.
문맥으로 충분히 때려 맞힐 수 있는 부분만이 남았다.
네가 가장 친애하는 자는 절망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대다 네 손에 끝을 맞이할 (것이다)!
이게 본래의 문장이겠지.
내 예상과 다르지···.
“잠깐.”
‘내’가 아니라 ‘네’ 손이라고?
내가 예상하기로 이 저주는 리치가 기수에게 건 저주다.
대충 리치가 저주의 일부가 돼서 나를 죽도록 괴롭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저주의 내용을 보면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저주는 기수가 나를 죽이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손에 쥔 을 [정화+]의 불길로 불태웠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환상이 펼쳐졌다.
누군가가 악신을 부르고 악신의 파편이 지상으로 향했다.
엘더 리치의 준비해 둔 미끼에 이끌린 악신의 파편이 감정으로 만든 저주를 삼켰다.
악신의 파편이 점점 리치가 준비한 함정에 잠식당하던 도중.
기수가 난입해 리치를 토벌했다.
죽기 직전.
리치는 저주를 남겼다.
기수 본인이 아니라 기수가 사랑하고 친애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를.
환상이 끝나고 숨을 들이쉬었다.
1.3개 분량의 저주라서 그런가.
전보다 환상이 훨씬 명확해졌다.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까지 들렸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저주는 기수를 향한 게 아니다.
[네놈의 운명을 저주한다!]리치는 이딴 소리를 지껄이기는 했지만, 기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만만한 상대를 노렸다.
기수의 어머니와.
[네가 가장 친애하는 자는 절망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대다 네 손에 끝을 맞이할 것이다!]나.
“1절도 있었던 거냐.”
일단 1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1절의 방아쇠는 기수의 죽음이다. 지금 당장은 어떤 악영향도 주지 않고 있을 거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베로니카에게 맡기면 될 거다.
문제는 2절.
이건 옛날에 제대로 발동됐다.
저주는 나를 절망의 늪 속에 던져놨지.
지금까지는 잘 극복해 왔다. 남은 저주는 하나.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극복하지 못한 이상 저 저주가 이뤄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았다.
기수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내가 몬스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기수가 나를 죽이러 올 리가 없다.
기수가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미치기는 했는데, 인간을 죽이러 다니지는 않으니까.
지금까지 잘 숨겨왔는데 인제 와서 들킬까?
가능성이 있다.
설날에 기수는 나를 만나자마자 불로 태웠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했을까.
내가 몬스터가 됐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짓을 했을 거다.
그때는 이 불길에 닿자 불탔다는 게 이유였는데 그것만은 아니었을 거다.
리본교가 의심스럽다.
악신을 소환한 그 작자들이 기수의 의심이 나로 향하게 할만한 짓을 저질렀겠지.
만약 기수가 내가 몬스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면.
그 녀석은 나를 죽이러 올까?
죽이러 오겠지.
“하···.”
역시 저주는 싫다.
내가 슬라임이 된 것은 기수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기수가 왜 그렇게 몬스터를 죽이는 일에 집착하는지도 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고 만다.
지금까지 내가 해준 게 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됐는데.
기수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결계☆] 스킬로 격리하고도 이렇다.없었으면 어땠을까.
상태창 감사합니다.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SSS급헌터.]“···.”
받지 말까?
아니, 받자.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걱정이 돼서 친구를 피하다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지금 심란하기는 하다.
하지만 감정에 휘둘릴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분노의 저주가 가장 약할 때다.
분노라는 감정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쳐서는 안 될 시기다.
전화를 받았다.
“왜?”
목소리가 약간 퉁명스럽게 나온 거 같다.
나도 참 미숙하다.
-뭐 하냐.
“불놀이.”
-또?
“불놀이는 주기적으로 해줘야 인생이 편해지거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라니. 날마다 몬스터를 불태우는 네가 할 말은 아닌데?”
-···.
좋아. 감정이 얼추 정리됐다.
역시 분노 따위에는 안 진다니까?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했는데?”
-그냥.
“너야말로 또 그냥이냐. 뭐, 상관은 없다만. 친구 사이에 전화하는데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목소리가 가벼워졌네.
“응. 불놀이했더니 편해졌어. 그나저나 너의 그 ‘목소리’는 여전하냐?”
-문제없어.
“여전하다는 뜻이네. 고생 많다.”
-딱히.
“괜찮다니 다행이고. 이왕 전화 건 거 신나고 재밌는 소식이나 풀어놔.”
-있겠냐.
“그거야 모르지. 신나고 재밌는지는 돌덩어리 같은 감성을 지닌 네가 아니라 말랑말랑한 내가 판단할 테니까.”
***
“전투 훈련이요?”
“네.”
은퇴 헌터들과 전투 훈련을 하기로 했다.
가벼운 테스트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강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세상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