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61
#160화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나요?”
“아뇨, 하나도.”
매종학. 검성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인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검성 기만질 보소.’
별거 없기는 개뿔이.
서 있는 위치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고 했다. 겨우 넘어선 절정의 벽 뒤에는 험준한 산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 한참 멀었구나.’
누가 말하길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데, 그건 무공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검성이라는 만렙이 툭 던진 말에 겨우 깨달음을 얻은 초보자일 뿐이다.
뭐, 그래도…….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은 한마디와 함께 허리를 굽히자 청풍이 허둥거렸다.
“은인, 갑자기 왜 이러세요?”
“고마워서 그래요. 고마워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무인. 그중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극소수라는 사실을 안다.
초일류의 무공과 공력을 갖춰도 그에 걸맞은 깨달음이 없다면 평생을 제자리걸음만 반복해야 한다는 것도.
‘청풍이 아니었다면 한참 헤맸겠지.’
하지만 나는 운이 좋았다. 청풍은 열흘 가까이 성심성의껏 수련을 도와줬고, 검성의 가르침까지도 내게 전해 줬다.
고작 빙당호로 몇 개의 보답치고는 너무 과분한 답례다.
“이러지 마세요. 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한 게 없긴요. 제가 뻔뻔한 놈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고마움도 모르는 놈은 아니거든요.”
“엥, 진짜요?”
“…….”
이 자식은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었던 걸까.
내 눈이 가늘어지자 청풍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지금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고요.”
“제가 생각한 게 뭔데요?”
“그러니까 그게…….”
갈 길 잃은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던 청풍이 연무장 구석에서 코를 골고 있는 혁무진을 발견하고 냅다 외쳤다.
“혁 소협! 일어나 보세요! 지금 이렇게 주무실 때가 아니에요.”
“…….”
애잔하다, 진짜.
청풍의 외침에 갑자기 번쩍 눈을 뜬 혁무진은 나를 발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
이 새끼는 한술 더 뜨네.
“이 혁무진. 조장을 지키겠다는 숭고한 일념 하나로 호법을 섰습니다.”
“…….”
“깨달음은 어렵게 찾아오고 쉽게 깨지는 법. 제가 여기서! 눈을 부릅뜨고!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쥐새끼는 모르겠고 넌 시발 새끼 같은데…….
나는 입가에 침 자국이 가득한 녀석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진아.”
“옙!”
“나 절정 고수 됐거든?”
“감축드립니다!”
“응. 그래서 지금 몸에 힘이 막 넘쳐. 주먹도 근질거려.”
“…….”
“호법? 쥐새끼? 너 코 고는 소리가 조금만 더 컸으면 주화입마 올 뻔했어, 이 새끼야.”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을 것 같니?”
얼마나 코를 골아 댔는지 일산 사는 우리 엄마도 들었겠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실실 웃는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쫙 펼쳤다.
“마지막 기회다. 열 셀 테니까 눈앞에서 사라져라. 하나, 둘, 셋…….”
다다다다다!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는 혁무진을 보며 청풍이 감탄했다.
“와, 역시 수련의 효과가 있네요! 엄청 빨라요!”
이걸 이렇게 해석하네.
나는 물개박수를 치며 뿌듯해하는 청풍에게 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죠.”
“네?”
“비무. 아직 승부가 안 끝났잖아요.”
“저야 괜찮지만…… 피곤하지 않으세요?”
“전혀요.”
거짓말이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신체는 활력이 넘치지만 정신은 피곤하기 그지없다. 전력 질주 끝에 맥이 풀린 느낌이랄까.
하지만 청풍과의 비무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시험해 보고 싶으니까.’
깨달음을 얻은 것은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린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지금이라면 좀 더 빠르게, 좀 더 강하게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 멀쩡해요.”
재차 말했지만 청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휴식도 수련이다.”
“한 번도 안 됩니까?”
“네. 은인은 지금 쉬어야 해요. 그리고…….”
“그리고?”
청풍이 히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제가 이길 건데요. 뭘.”
“……!”
“이제는 은인도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죠.”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원래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절정의 경지에 오르니 청풍이라는 놈이 얼마나 괴물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전력을 다한 청풍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도.
‘청풍이 봐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비무에서 이겨 봤자 씁쓸함만 남을 뿐이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당분간은 이번에 얻은 깨달음을 녹여 내는 것만으로도 바쁘실 거예요.”
“그럼…….”
“비무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아쉽네요, 저도 재밌었는데.”
띠링.
– 퀘스트, [검성 수련 간접 체험기-2]가 취소되었습니다.
– 퀘스트 제안자가 스스로 결정한 사안이기 때문에 어떤 패널티도 부여받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푹 쉬세요!”
나는 멀어지는 청풍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전각으로 돌아갔다.
시스템 알림을 듣고 있으니 미뤄 뒀던 일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메시지 확인.’
띠링. 띠링. 띠링.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게 몇 개야.’
아무래도 휴식은 한참 후가 될 듯싶다.
* * *
커다란 나무 욕조는 뜨거운 물로 출렁였다.
며칠간이나 제대로 씻지 못한 탓에 목욕이 절실하던 상태.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그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어어. 시원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여운을 즐기던 나는 시스템 창을 켰다.
“메시지 확인.”
띠링. 띠링. 띠링.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시스템 메시지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 퀘스트, [벽을 넘어서]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절정 고수]로 전직하셨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
– 레벨 업!
‘오. 한 번에 5레벨이나 올랐어?’
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무림은 또 다른 현실이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게임 캐릭터나 마찬가지.
초보자 시절에야 산적 하나 잡고도 레벨이 올랐는데 이제는 다르다. 요구하는 경험치가 점점 많아지는 만큼 레벨 업의 속도도 느려지던 차였다.
‘이 정도면 땡큐지.’
그러나 보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진가심법]의 경지가 구 성으로 상승했습니다.
– 더 안정적으로, 많은 공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 [기감]의 경지가 칠 성으로 상승했습니다.
– 90레벨 이하, 70장 이내의 대상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 무공의 비약적인 상승으로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진가심법과 기감의 경지가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인데, 레벨까지 오르니 겹경사가 따로 없다.
지금까지 본 메시지만으로도 벌써 일곱 번의 레벨 업.
‘보상 하나는 화끈하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른 메시지를 읽어 나갔다.
– 절정 고수는 능히 일문(一門)을 이끌 수 있는 강자입니다.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 새로운 문파를 설립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은 미처 알지 못했던 공력의 운용을 깨달았습니다. 수련을 통해 새로운 스킬, [전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파 설립과 무공 창안이라니.
절정 고수 대우를 톡톡히 해 주는구나. 일류 때와는 그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 수 없다.
‘하긴, 절정 고수니까.’
수천 명의 무림인이 득실거리는 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정 고수의 숫자는 채 스물이 되지 않는다.
중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산서성에서 절정 고수란 그런 존재들이다.
‘하지만 별 쓸모는 없네.’
무공 창안은 아직까진 모르겠고, 새로운 문파를 설립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든든한 태원진가를 놔두고 어딜 가겠는가?
그것보다는…….
‘전음이 좋지. 아주 좋아.’
전음(傳音). 공력을 이용해 은밀히 소리를 전하는 수법이다.
앞서 두 가지는 당장 써먹을 구석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에 비해 전음은 효용성이 상당하다.
비록 수련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이제 겨우 세 개 남았나?’
그 많던 메시지 창도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딱 세 개.
나는 후련함 반, 아쉬움 반으로 남은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띠링.
– 인벤토리에 [만년한철]이 지급되었습니다.
– 무인과 병장기는 한 몸. 자신의 힘을 모두 끌어올릴 수 있는 병장기를 찾는 것도 무인의 몫입니다.
– 퀘스트, [장인을 찾아라]이 생성되었습니다.
“……어?”
* * *
북부 고원.
오래전 위대한 지배자가 세운 유목 제국이 존재하던 그곳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푸른 풀로 뒤덮인 드넓은 목초지는 점점 사라져 가고, 유목민들의 보금자리인 게르 대신 중원의 목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직은 유목민들의 풍습이 남아 있지만 서서히 중원의 복식과 문화가 고원을 침투하고 있는 현실.
양가죽을 걸친 사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성한 초원에 한족 놈들이 득실거리다니.”
“테무르. 자네가 참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나?”
“칭겐. 우리는 칸의 후예들이야. 그걸 잊어서는 안 돼.”
“난 잊지 않고 있네. 다만 오늘이 어떤 자리임을 잊지 말라는 거지.”
“빌어먹을. 멀쩡한 게르를 놔두고 객잔이라니.”
테무르와 칭겐.
각각 일백의 부족민들을 거느린 두 족장은 객잔으로 들어섰다.
스스로를 마적이라 부르는 한족들이 만든 그곳은 북부 고원에 단 한 곳만 존재했고, 그만큼 거대했다.
두 사람이 발을 들이자마자 발견한 것은 위층까지 꽉꽉 들어찬 마적들과 그 중심에 있는 두 사내였다.
“으허허, 대초원의 부족장들께서 오셨구려! 이리로 앉으시오, 그대들을 위해 따뜻한 마유주를 덥혀 놓았소.”
두 팔을 활짝 벌려 반기는 중년인과는 달리 다른 한 사내는 고개도 까딱이지 않고 손짓했다.
“앉게.”
“……!”
“……!”
테무르와 칭겐의 이마에 핏줄이 불뚝 솟았다.
그들이 누구인가, 한때 초원을 넘어 중원을 지배하던 대칸의 후예들이다.
비록 수백 년도 전의 일이지만 그들의 자긍심은 결코 죽지 않았다.
“이 개만도 못한 한족 놈이!”
본래 타고난 성정이 폭급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테무르다. 칭겐이 말릴 틈도 없이 그의 손이 곡도를 잡아채 갔다.
“네놈의 목을 텡게르 신께 바치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앉으라고 했다.”
서늘한 목소리와 심연 같은 눈동자였다. 거친 초원에서 부족을 이끄는 테무르조차도 감히 곡도를 뽑을 수 없게 만드는.
그때를 틈타 칭겐이 재빨리 테무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무르, 경거망동하지 마라. 저자가 누구인지 알겠지?”
테무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은 넷이다. 전부 초면이지만 각기 북부 고원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강자들.
그러나 이 정도로 자신을 위축시킬 만한 고수라면…… 한 사람뿐이다.
‘인도(人屠).’
성도 모른다. 이름도 모른다.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불명이다.
그는 한족이었고 고작 오십 명의 수하를 거느린 채 초원을 질타했다. 사람을 도축하듯이 죽여 대서 붙은 별호가 인도.
즉, 인간 백정이란 뜻이다.
“말귀가 어두운 친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