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5
#264화
저 만두 귀신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고양이 발도 아쉬운 지금 시점에 청풍의 합류는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반가움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청풍!”
“네에, 은인.”
우물쭈물 대답하는 청풍을 본 혈주가 알은체를 했다.
“오호. 어떤 쥐새끼인가 했더니, 화산파의 무적신검 아니신가.”
혹시나 했더니 역시다. 놈이 파악한 청풍의 정체는 딱 거기까지였다.
비무 때 청풍이 화산파의 제자라는 것까지는 밝혀졌지만, 검성 매종학이 혈육처럼 애지중지 키운 막내 제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겠지.
이럴 때 방심을 유도해서…….
“아니, 검성의 제자라고 불러 줘야 하나? 아니면 손자?”
“…….”
개새끼. 모르는 게 없네.
하긴, 수십 년 전부터 대장로를 포섭해서 심어 놓은 것도 암천이다. 혈주는 그 암천 내에서도 상당한 고위직일 것이 분명하고.
‘모르는 게 이상하긴 하지.’
아쉬워하는 내 모습에 혈주가 피식 웃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어차피 저 친구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든.”
이놈 봐라…….
비록 아직 절정의 끝자락에 머무르고 있지만, 일반적인 절정 고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와 청풍이다.
나는 압도적인 능력치와 풍부한 전투 경험을, 청풍은 타고난 무재에 더해 수십 개의 무공을 적재적소에 조합할 수 있는 천재적인 전투 센스가 있다.
거기에 십왕(十王) 중 제일이라는 화왕 적천강까지.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를 너무 물로 보는군.”
“사실이니까.”
“뭐?”
“날 죽이고 싶다면 검성의 제자가 아니라 검성을 데려왔어야지.”
“……이 새끼가.”
“남은 건 하나뿐이지.”
여유가 흐르는 목소리로 대답한 혈주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증명해 봐라, 무공으로.”
놈이 지금까지 지껄인 소리 중 유일하게 옳은 말이다.
맞다. 무인은 무공으로 증명해야 한다.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강함을 증명할 것이고, 패배한다면 나약하다는 증거다.
“염라(閻邏)를 만나거든 전해라. 화왕이 보내서 왔다고.”
쐐애애액!
잿가루처럼 퍼석한 목소리와 함께 적천강의 신형이 쏘아졌다. 동시에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알림.
띠링.
– 돌발 퀘스트, [절체절명]이 생성되었습니다!
– 당신은 퀘스트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퀘스트가 강제 수락됩니다!
빌어먹을. 퀘스트 제목 한번 기가 막히는군.
나는 땅을 박차며 쇄도했다. 욕설 대신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청풍! 지금!”
흠칫한 청풍이 입술을 깨물며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청강검이 유려하게 춤추며 허공에 매화를 그려 냈다.
화아악! 쉬쉬쉬쉭!
어느 한적한 오솔길. 열양지기가 시원한 산바람을 달구고 창과 검이 뜨거워진 바람을 가른다.
앞뒤로 달려드는 우리를 응시하던 혈주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 * *
파파팟!
적천강이 손을 떨쳤다. 열양지기를 한껏 머금은 장력이 그의 주름진 손바닥을 타고 뛰쳐나왔다.
이미 대성을 이룬 화염신장(火焰神掌). 영혼마저 불살라 버린다는 극양의 장법이 혈주의 전신을 휩쓸려던 그 순간이었다.
쉭!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혈주의 손에는 한 자루의 도(刀)가 들려 있었다. 불길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도강 앞에 화염신장의 장력이 반으로 갈라졌다.
후웅, 콰아앙!
오솔길 양옆으로 가지를 늘어트린 아름드리나무가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불길이 솟구치고 흙과 풀뿌리, 나뭇조각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두 줄기 섬광이 있었다.
쐐애애액! 쉬쉭!
앞과 뒤를 점하며 쏘아지는 두 자루의 창과 검.
혈주는 입꼬리를 비틀면서 도를 손에서 놓았다. 동시에 자유로워진 그의 두 주먹이 허공을 후려쳤다.
퍼엉!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며 광풍이 휘몰아쳤다. 흉폭하게 찔러오던 창날도, 검 끝에서 피어오른 매화도 풍압에 휩쓸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난 몸뚱어리에 진태경과 청풍의 눈이 커졌다.
“……시벌. 더럽게 세네.”
“이, 이럴 수가.”
우두둑.
목을 꺾은 혈주가 허공에 멈춰 있던 자신의 도를 회수했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을 상대한 것이다.
“그 정도로 되겠어?”
“……!”
적천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대성을 이룬 화염신장의 일 초가 이토록 허무하게 파훼 될 줄이야. 피한 것도, 튕겨 낸 것도 아니라 베어 버렸다.
혈주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수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검성을 데려오라는 말…… 허언이 아니로구나.’
상대는 능히 삼성에 견줄 수 있는. 아니, 혹은 그 이상의 고수다.
공력도, 무공에 대한 깨달음도 결코 자신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그것들을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펼칠 수 있는 싱싱한 활력과 젊은 육신까지 있다.
적천강은 오늘따라 자신의 주름진 손이 더욱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삼십 년, 아니 이십 년만 젊었어도…….’
육신이 온전할 때는 깨달음이 부족했고, 깨달음을 채우자 육신이 너무 늙어 버렸다.
낡고 구멍 난 항아리에서는 물이 새는 법. 지금의 적천강이 바로 그랬다.
‘어쩌면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수 있겠군.’
침잠하게 가라앉은 적천강의 눈빛을, 혈주는 놓치지 않았다.
입매를 비틀어 올린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늙은이. 이제 감이 좀 잡히나? 사태 파악이 돼?”
적천강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태경과 청풍의 눈이 자신의 입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괜한 말로 사기를 꺾을 수는 없다.
“입이 방정맞군.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너희들은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뭐라?”
“정파라는 것들은 예의 운운하면서 고수가 하수에게 삼 초를 양보한다더라고. 그 흉내 좀 내 봤지.”
“……!”
혈주의 긴 손가락이 차례차례 한 사람을 짚었다.
세 사람은 각기 일 초를 펼쳤고, 그 합이 셋이다. 그의 말대로 제 자리에 선 채 삼 초식을 양보한 것이다.
“이제는 내가 먼저 간다. 어디 발버둥 쳐 봐.”
혈주의 눈동자에 붉은 광망이 솟구쳤다. 동시에 핏빛으로 물든 흰자위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구구구구궁!
숭산(嵩山)이 몸을 떨었다.
* * *
쉬쉬쉬쉭! 꽈앙!
사방에 섬광이 가득했다. 보고 있자면 눈이 멀 것 같은 빛무리와 함께 굉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그중 압도적인 것은 검붉은 기운을 뿌리는 한 자루의 도였다.
콰아아!
강력한 도강이 희끄무레한 빛을 남기며 휘둘러진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지워 내는 파괴적인 궤적에 혈주를 향해 쏘아지던 공격들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그 안에 내 것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쾅!
백염의 창날이 찌르르 울렸다. 힘껏 움켜쥔 창대가 손바닥 안에서 거세게 진동했다.
막대한 공력을 실었다지만 실로 엄청난 힘이다.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물 같은 놈.’
이를 악물며 몸을 뒤집었다. 쉭! 간발의 차로 검붉은 도신이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하지만 풍압을 이기지 못한 피부가 살짝 갈라지며 핏물이 흘렀다.
나는 콧날을 타고 뚝뚝 떨어진 핏방울을 받아 삼키며 창대를 휘둘렀다.
“합!”
휘리리리릭!
거칠게 회전하는 창날이 혈주의 가슴을 노렸다.
성라대연의 우승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를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인지 그 움직임과 힘이 한층 더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콰득!
비어 있는 놈의 한쪽 손이 창날을 잡아챘다.
맨손이지만 맨손이 아니다. 검붉은 색으로 타오르는 막대한 공력이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안 되지.”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엄청난 힘이 창날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혈주의 눈썹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아귀에 잡혀 있던 창날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
놀란 음성이 새어 나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놈의 품 안 깊숙이 파고든 후였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찰나의 순간, 열양지기를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백염은 다시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세상 어느 것보다 단단하며 예리한 금속, 만년한철이 호신강기를 가르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살갗을 파고든 그때였다.
푹! 퍼벙!
놈이 소매를 떨침과 동시에 강한 경력이 배를 후려쳤다.
열 걸음을 연거푸 밀려난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을 부릅뜬 혈주의 얼굴과 피 분수가 솟구치고 있는 놈의 가슴이었다.
‘됐다.’
오직 나라서, 그리고 고작 나라서 가능했던 공격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스템을 사용한 공격이라 통했고, 혈주에게는 경계 대상조차 될 수 없는 내 공격이었기에 먹혀들었다.
‘지금이 기회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절호의 기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마지막 동아줄이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외쳤다.
“노야!”
내 외침이 초토화된 오솔길에 울려 퍼졌다. 공기를 뚫었다. 바람에 실렸다. 한 사람의 귓가에 닿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잘했다.”
혈주를 향해 쏘아지는 노인은 어느새 화왕(火王)으로 변모해 있었다.
콰아아아아!
그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엄청난 화기가 뻗어 나왔다. 공기를 태우고 바람을 짓눌렀다.
혈주의 기운이 보고만 있어도 불길해지는 무언가라면, 적천강의 그것은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 열기 그 자체였다.
“이런 개 같은…….”
혈주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놈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적천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것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그는 지금껏 저 무공을 단 한 번 사용했고, 천 명의 마교도를 죽임으로써 전설이 되었다.
‘화신귀무(火神鬼舞).’
그 순간, 적천강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혈주의 앞에 다가온 그의 손과 발은 안개처럼 흐릿했다.
붉고 푸른 화기가 사방 천지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두려울 정도로 파괴적인 섬광이었다.
“화왕!”
쏴아아악!
혈주의 거친 부르짖음과 함께 검붉은 도강이 화기와 섞였다. 절벽이 무너지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건…….’
감히 눈으로 좇는 것조차 힘든 공방. 촌각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의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짧은 순간에 엄청난 위력을 지닌 수백 합의 공격이 오고 갔음을.
그리고 그 싸움에서 누가 승리했는지를.
꽈아아앙!
열기의 파도가 검붉은 도강을 집어삼켰다. 번쩍이는 뭔가가 하늘 위로 솟구쳐 파헤쳐진 흙더미에 깊숙이 박혔다.
한 자루의 도. 그것을 쥐고 있어야 할 주인은 마지막 일격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부가 말했었지. 설령 인간이 아닌 마신이라도 죽이겠다고.”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일장이 놈의 가슴을 후려쳤다.
치지직. 살이 타들어 가고 가슴뼈가 주저앉았다. 울컥 핏물을 토해 낸 혈주가 흐릿한 눈빛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미동도 하지 않는 혈주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적천강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노야!”
“적 할아버지!”
황급히 뛰어나간 나와 청풍은 적천강을 부축해, 그나마 멀쩡한 근처 풀숲으로 옮겼다.
화신귀무.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은 없다. 춤이 끝나면 불은 꺼지고 열기는 사그라진다.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적천강이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때, 노부가 말했던 대로가 아니냐?”
“뭐가 말입니까?”
“화신귀무. 끝내주지 않았느냐?”
희미하게 웃으며 묻는 적천강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따라 웃어 보였다.
“끝내줬습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모든 것이 끝내줬다.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화신귀무…… 이름 한번 멋지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우리의 눈동자에, 멀쩡히 일어나는 혈주의 모습이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