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15
#314화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토화가 되어 있는 넓은 방 안. 온갖 부서진 파편과 함께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청년. 아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중년인까지 셋.
‘이게 무슨 그림일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무슨 그림이긴, 허구한 날 본 바로 그 그림이지.
시비와 싸움. 이쯤 되면 무림인들의 필수 덕목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내가 중얼거렸다.
“아주 그냥,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셨네.”
슬그머니 검을 내린 백무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셨습니까.”
“오라니까 왔는데, 바로 가고 싶어지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데 다른 분들은……?”
그의 눈이 내 등 뒤를 훑는다. 궁기방이나 혁무진을 찾을 리는 없고, 자신의 웬수 같은 사숙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청풍을 비롯한 버뮤다 삼각지대는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얌전히 따라오나 했더니.’
제발 사고만 치지 마라.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버뮤다 삼총사는 둘째 치고, 당장 눈앞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지금 그게 문젭니까? 사건 일으키는 게 화산파 종특이에요?”
“그,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굳이 말 안 해 줘도 됩니다. 누가 봐도 그래 보이니까.”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백무성과 대치 중인 웬 젊은 놈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매에 주걱턱. 지금까지 만났던 이 동네 후기지수들은 죄다 선남선녀들이라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는데, 이놈은 못생긴 편이라 친근감이 확 든다.
“안녕하세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
호의가 담긴 내 인사에 녀석이 대답했다.
“꺼져라. 네놈 같은 비렁뱅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는 백무성을 향해 물었다.
“백 소협, 이 시벌 새끼는 누굽니까?”
“종남일룡(綜南一龍) 혁소평입니다.”
“이 새끼도 용이에요? 아니, 뭔 놈의 용이 이렇게 많대.”
“강호에는 종남파 제일의 기재이자 십봉룡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긴 건 지렁이같이 생겼는데.”
못생긴 놈이 성격도 더러우니까 두 배로 열 받네.
내 중얼거림에 혁소평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이런 개 같은 놈을 봤나…….”
“개만도 못한 놈보다는 낫지. 그리고 그 검, 잘 생각하고 휘둘러라. 지금이 네 인생 최고의 위기니까.”
혁소평의 손이 움찔거렸다. 아주 미세하게 나를 향해 움직이던 검날을 슬며시 내린 놈이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예사로운 놈은 아니군.”
“응. 내가 한 비범해.”
“가죽이나 파는 놈인 줄 알았는데…… 하긴, 화산일학이 그런 놈을 상대할 리 없지.”
“너 같은 놈이랑 달리 백 소협은 누구나 상대해 줄걸. 그리고 이 아름다운 근육을 봐라. 이게 가죽 팔아서 나올 수 있는 근육이냐?”
지금 내 행색이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칠 주야가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객잔에 들르지 않고 직진했으니, 머리에는 기름기가 좔좔 흘렀고 깨끗하던 무복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가죽을 잔뜩 쌓아 둔 지게까지. 저 안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적천강이 숨겨져 있다.
‘행색도 행색이지만 냄새가 좀 나긴 하네.’
슬슬 씻을 때가 되긴 했지.
무복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나를 혁소평이 노려봤다.
“헛짓거리는 집어치우고 사문과 이름을 밝혀라.”
“어후, 뭐만 하면 사문, 사문. 지겹지도 않나.”
“하나만 장담하지. 네놈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라면, 여기서 몸 성히 걸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헉, 진짜?”
나는 짐짓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떡하냐. 내 사문은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아닌데. 그냥 걸어 나가게 해 주면 안 될까.”
“주둥이를 조심하지 그랬느냐. 그 알량한 세 치 혓바닥이 네놈과 네 사문을 위기에 빠트렸다는 걸 기억해라.”
“안 그래도 사문이 지금 좀 위기이긴 하지. 문파에 나를 포함해서 두 명밖에 없거든.”
“둘이라고?”
“응, 나랑 스승님. 끝.”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혁소평이 백무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삼류 문파 떨거지까지 상대하다니.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그 시간에 무공 수련이나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글쎄. 내 생각에 지금 자네가 한 말에는 상당한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
백무성이 선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첫째. 진 소협의 사문은 삼류가 아니고 그 역시 떨거지가 아니라네. 둘째, 자네는 나보다 한 수 아래야.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었던 사실이지.”
“지금 뭐라 했소?”
“나보다 한 수 아래라고 했네.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는 자네의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같을 거라 생각되는군.”
입은 웃지만, 눈은 아니었다.
백무성의 눈빛에는 무공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 본연이 지닌 기세, 혹은 위엄이라고나 할까. 혁소평이 이를 갈면서도 감히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저런 종류의 인간들은 꼭 말문이 막히면 몸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법이지.’
바로 지금처럼.
놈이 쥔 검 끝이 부르르 떨린 순간,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말했던 것 같은데. 그 검, 잘 생각하고 휘두르라고.”
휙.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혁소평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네놈…….”
“내가 만물 평등주의자라 이것저것 따지는 놈은 아닌데, 넌 종남파 제자라는 사실에 감사해라. 그마저도 아니었으면 이미 실려 나갔을 테니까.”
저 멀리 암천이라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
무림이 하나로 뭉쳐 대항해도 부족한 이 시기에, 종남파와 분쟁을 빚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영 아니다.
‘사실 좀 늦은 것 같긴 하지만.’
종남파와는 이미 악연이 있다.
종남삼수, 그리고 노호검객이라는 이름으로.
‘일 년 전에 노야께서 아주 탈탈 털어서 쫓아냈었지.’
노호검객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무명 소졸도 아니고, 종남파의 장로이자 장문인인 풍운검군의 사형씩이나 되는 인물이다 보니 그 여파가 제법 컸다고 들었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노호검객은 무슨 이유에선지 폐관에 들었고, 종남삼수는 장문인에게 따귀를 맞았다던가.
‘이 정도면 이미 훌륭한 악연이야. 여기서 더 나갈 필요는 없지.’
적천강이 종남파에 들이부은 기름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았다. 그 기름 위에 불을 붙이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적천강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니까 얌전히 검 집어넣고 갈 길 가라. 응?”
좋아, 잘했어.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거지.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만큼 침착한 대처였다. 하지만 종남일룡 혁소평의 생각은 달랐다.
이를 빠드득 간 놈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어디…… 그 주둥이만큼 실력이 있는지 보자.”
쉬이이익!
혁소평의 손에 들린 검이 눈부신 속도로 허공을 찢었다.
동시에 덮쳐 오는 검기의 그물. 일 년 전, 노호검객 송일의 손에서 펼쳐졌던 바로 그 무공이다.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종남파를 대표하는 절기.
적천강이 말하길, 천하삼십육검의 극의에 이르면 일 검을 휘둘러 사방 천지를 검기로 메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너, 그거 아냐?”
화아아악!
염화일로(炎火一路). 수백 년간 이어진 열화문의 독문신법이 한 줄기 불꽃으로 화한다.
검기의 그물을 찢고 거침없이 목표에 도달했다. 나는 혁소평의 부릅뜬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너랑 나랑은, 레벨이 달라요.”
“……!”
쉬이익, 덥석!
황급히 검로를 트는 혁소평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내 손에 서린 극양의 기운에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악!”
외마디 비명.
혁소평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검이 금속음을 내며 땅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내 손바닥이 놈의 뺨에 닿았다.
쫘악!
한 번 더.
쫘악!
다시 한 번 더.
쫘악!
저항할 사이도 없이 세 대의 따귀를 얻어맞은 혁소평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공력을 담지 않아도 내 신체 능력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지 오래. 놈의 눈동자는 이미 혼이 나간 채로 반쯤 풀려 있었다.
“아까 뭐랬지? 주둥이만큼 실력이 있나 보자고 했던가?”
“흐으, 흐으으…….”
“인마. 네가 종남파면 난 육체파야. 앞으로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라. 응?”
툭툭.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혁소평의 뺨을 두드려 주자 그제야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어, 어떻게 칠 성의 천하삼십육검을 이리 쉽게…….”
“칠 성밖에 안 익혔어? 어쩐지 좀 허접하더라. 최소한 구 성까지는 익히고 다시 덤벼 봐. 나야 이미 겪어 본 적이 있으니 결과는 비슷하겠지만.”
“구, 구 성의 천하삼십육검을 겪어 본 적이 있단 말이냐?”
“있지. 피하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구 성까지 익힌 분은 본문에서도 다섯이 채 되지 않는다!”
“그 다섯 중 하나거든. 듣기로는 종남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더라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호검객 송일. 그 양반 요즘 잘 지내시는지 몰라. 작년에 개망신당하고 쫓겨날 때만 해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종남파의 성골이라 할 수 있는 적전제자, 그것도 종남 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놈이다. 외부인도 아는 소문을 내부인이 모를 리 없었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뜬 혁소평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설마, 네놈이?”
“아까 그 사문 관련해서 말인데, 그거 전부 사실이야. 구파일방도 아니고 문도라고 해 봤자 나랑 스승님 둘밖에 없거든. 뭔 놈의 문규(門規)가 그 모양인지, 일인전승 비인부전이라서 더럽게 까다롭더라고.”
“여, 열화문……!”
“문도! 둘이다!”
“산서잠룡, 네놈이 진태경이구나!”
“진태경! 맞다!”
멱살을 바짝 잡아당긴 채 고함을 지르자 혁소평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놈의 표정을 빤히 구경하던 나는 씩 웃으며 붙잡고 있던 옷깃을 툭툭 털어 주었다.
“너, 우리 사부님 성깔 알지? 서로 기분 나쁠 일 없이 이쯤에서 끝내자. 그 뭐냐, 그래. 영원히 불문(不問)에 붙이자고.”
“…….”
“이상하다. 대답이 없네. 따귀를 열 대쯤 맞으면 들리려나.”
스윽.
손바닥을 슬쩍 들어 올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린 혁소평이 이를 악물었다.
“알……았다.”
“응? 뭐라고? 천하삼십육검을 칠 성까지밖에 안 익힌 찐따 목소리라 잘 안 들리는데?”
“……알았다고 했다.”
“그래. 그럼 가는 길 조심하고. 멀리 안 나간다.”
까드득.
온 힘을 다해 움켜쥔 혁소평의 주먹에서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나와 백무성, 그리고 누구인지 모를 중년 무인을 노려본 녀석이 성큼 발을 내디뎌 별채를 나서려던 그때였다.
“십 년 전 화종지회(華綜支會)에서 만났던 한 소년이 생각나는군.”
“……!”
“잘 가게. 소평.”
불쑥 들려온 백무성의 차분한 목소리. 순간 멈칫하던 혁소평은 그대로 별채를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혁소평의 인기척, 그리고 동시에 살금살금 가까워지는 한 사람의 발걸음이 있었다.
“나와.”
내 말에 누군가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이내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청풍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입 안에 든 음식들을 꿀꺽 삼키고 눈치만 살피던 녀석이 백무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는 진짜 미안했어요. 백 사질…….”
문득 일 년 전, 화산파로 압송되던 청풍이 백무성을 비롯한 매화삼절을 때려눕히고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이구나.’
저 자식은 무조건 유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