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350)
막 몸을 돌리려던 게오르크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바란디가 부족이 전선에 나타나지 않았나. 그 부족과의 협상을 위해 감찰관이 온다고 하네.”
“…그런가.”
감찰관, 칼이 전선으로 온다는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전투가 아닌 협상을 위한 방문이지만 전선은 전선.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자네, 아비로서 아들을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과한 걱정이야. 솔직히 나와 자네가 동시에 덤벼도 그 아이를 이기지 못해.”
“누가 걱정했다고 그러나.”
“그야 자네지. 내가 하겠나?”
시큰둥한 대답에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의회로 돌아가면 제노비아에게 이놈이 전선에 기웃거린 횟수를 알려줘야겠다.
***
바란디가 부족이 사레이 전선에 모습을 보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필 사레이.’
굉장히 익숙한 이름이라 흠칫했다. 탈라가 이끈 부족이 사레이 부족이었으니까.
지난 전쟁 때는 팔준마가 친히 이끄는 부족의 영역이라 오랜 기간 동안 점령하지 못한 곳인데, 지금은 제국군 점령지로서 전선을 유지하는 곳이다. 감회가 색다르다.
“사레이 전선은 유목민의 공세가 가장 격렬한 곳이었지만, 계속되는 전투로 유목민의 기세도 꺾였다더군. 이제는 관망하는 부족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하니 감찰관이 직접 가도 무방하겠어.”
전승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전투가 터질지 모르는 전선에서 협상을 하는 건 난감한 일이지만, 공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것도 공세를 펼치는 부족보다 탈주각을 재고 있는 부족이 더 많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바란디가 부족이 투항한다면 다른 중립 부족들도 제국에 기울어질 터. 감찰관의 역할이 매우 크다.”
“예,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전승공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미 수많은 부족들이 제국에 투항할 의지를 보였으니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무사 귀환을 최우선으로 하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카이타나 부족 때와 달리 전선에서 일어나는 협상이라 전승공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막말로 전선에서 협상을 하다가 근처에 있던 부족들이 일제히 협상장으로 달려들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니.
물론 전선에 있는 부족들은 예비 투항자, 혹은 중립 세력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번에도 묵광대의 호위를 받으며 바란디가 부족의 주둔지로 향했다. 마침 가주가 사레이 전선에 있다고 해서 인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지금은 공무 중이다. 인사는 협상을 마치고 해도 충분하겠지.
그리고 ‘협상을 하러 적진 한가운데로 갑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 것보다는 ‘하고 왔습니다.’ 라는 인사가 더 나을 것 같다. 적어도 가주에게 걱정을 끼칠 일은 없으니까.
‘협상이라.’
그건 그렇고 아직도 고민이다. 바란디가 부족과의 협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솔직히 카이타나 부족과의 협상은 협상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이미 투항할 생각이 가득한 부족이었고, 백작이라는 선물을 꺼내자마자 앞잡이 모드로 돌변하며 온갖 정보를 자발적으로 바쳤다. 그걸 협상이라고 하는 건 양심이 없는 거지.
반면 바란디가는 항복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을 암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신앙이 짓밟힌 제사장 부족이면서 주전이 아닌 중립을 유지하는 애매함, 제사장 자리를 물려받았으면서 제사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기묘함을 보였다.
‘…공식적으로는 제사장이기는 한데.’
혹시 바란디가를 신앙의 구심점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글러먹은 전제인가 싶어서 여러 루트로 바란디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다행히 바란디가 부족장이 3년 전에 제사장직을 계승한 건 맞다. 대외적으로도 알려진 사실인지 다른 부족들도 알고 있더라.
‘그런데 그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물론 겉모습은 제사장처럼 행동하고 있을 거다. 최소한의 행동은 하고 있으니 다른 부족들도 바란디가 부족장을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하지만 영원한 푸른 하늘은 제사장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신앙을 받는 신이 한 말이니 확실할 터.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속은 없다…’
무심코 허리춤에 매인 검을 쳐다봤다.
덤으로 카간에게 베였던 부분을 매만졌다.
흐으으으으음.
‘계십니까?’
– 응? 나 불렀어?
속으로 영원한 푸른 하늘을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변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
답변이 빨라서 다행이다. 협상 전까지 논의할 시간은 있겠어.
‘하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니 협조 좀 해줘.
***
멀리서부터 백기를 든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아마 제국의 사절이겠지.
‘환장하겠군.’
진지하게 군을 물릴까, 하는 충동이 치솟았다. 아직 제국과 접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사절과 만나봤자 최상의 조건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사절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도 끔찍한 일.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제국의 사절이 주둔지까지 도달했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흔을 받고, 신물을 보유한 자가 왔으니 제사장은 손님으로서 맞이해주십시오!”
별 해괴한 소리와 함께.
‘뭔.’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바란디가 부족이 원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란디가 부족장의 속내가 어떻든 부족장은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
제사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도 다른 부족들은 바란디가 부족장을 제사장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부친께서 돌아가셨지만 나도 제사장임.’ 이라고 열렬히 홍보 중이라는 거겠지. 물론 그 이유 역시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그거면 충분하다. 바란디가 부족장이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그 이름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흔을 받고, 신물을 보유한 자가 왔으니 제사장은 손님으로서 맞이해주십시오!”
그래서 바란디가 부족의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당당히 외쳤다.
나는 네가 모시는 신의 성흔을 받고 그 신의 신물조차 가지고 있다고. 네가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제사장이라면 차마 문전박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 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머릿속에 울리는 중얼거림에 조금 머쓱해졌다. 영원한 푸른 하늘을 모시는 신앙을 개박살 낸 사람으로서 당당히 외칠 말은 아니었으니.
그래도 애써 당당함을 연기할 수 있었다. 내가 나만의 사리사욕을 위해 영원한 푸른 하늘을 팔아먹는 거면 개새끼가 맞지만, 이건 둘 다 이로운 일이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 봐주십쇼.’
– 그래, 뭐, 나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영원한 푸른 하늘은 다시 조용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목민 몇 명이 급하게 달려왔다.
무기가 없는걸 보면 일단 손님으로 맞이할 생각이기는 한 것 같다.
주둔지 중심에 있는 게르에 도착하자 한 중년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수염도 단정한 것이 제법 외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만, 짜증과 피로가 뒤섞인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걸 보면 연이은 실패로 좌절한 백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흔과 신물이라.”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남성은 가죽 부대를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제사장도 보지 못한 것을 제국인이 가지고 있다니, 흥미로운 말이오.”
그러나 말과 달리 아무런 흥미도 없는 표정을 한 남성은 손을 뻗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는 것처럼.
예상대로 일방적인 축객령이나 공격 시도는 없었다. 아직 접대를 받지 못해 아슬아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스타트다.
“초원의 유일한 제사장인 바란디가 구르트 바탈이오. 이 바란디가 부족의 족장이기도 하지.”
“황제 폐하의 은혜로 백작위를 받은 칼 크라시우스 오브 위리디아입니다.”
늘어지듯 의자에 앉아있던 제사장은 내 이름을 듣고 움찔하더니 서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칼 크라시우스?”
그리고 이전의 권태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제사장의 눈에 깃들었다.
“하늘을 섬기는 대제사장과 그분의 집을 파괴한 이교도로군.”
어느새 위압감이 섞인 발언이나 상정한 범위 내다. 내가 제사장에게 성흔과 신물을 들먹이며 신앙적으로 접근한 이상, 제사장은 제국인이자 이교도인 나에게 북방의 신앙을 내세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 만남이 성사된 것은 제국 사절이 바란디가 부족장에게 만남을 청해서가 아닌, 성흔과 신물의 소유자가 제사장을 만나기를 청했기 때문이니.
하지만 상관없다. 거부할 수 없는 만남이 성사된 시점부터 협상은 진행 중이니까.
“신앙의 적이 성흔과 신물을 가지고 있다니, 지독한 농담이야.”
“대적자도 신화의 일부.”
난데없는 말에 제사장의 눈가가 찌푸려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신화의 일부인 대적자이기에 신과 얽히기도 합니다.”
그 말과 함께 4과장에게 손짓을 하자 4과장은 품에 들고 있던 내 검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카이타나 부족과 달리 호위와 무장이 제한되어 어쩔 수 없는 조치.
…아니, 사실 이게 정상이고 카이타나가 이상한 거였지.
“여명 교단의 초대 교황은 이교도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을 찌른 단검은 신성한 피를 머금어 신물이 되고, 교황을 해한 신앙의 적은 회개하여 신앙을 퍼뜨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뜬구름 잡는 말이지만 제사장은 무언가 눈치챈 듯 탁자에 놓인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이다. 눈치가 제법 빠른 양반이구나.
“그렇기에 대제사장을 죽인 검이 신물이 되고, 신전을 파괴한 이교도가 성흔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대충 요약하면 ‘내가 너네 대제사장도 죽이고 신전도 부쉈지만 아무튼 신물과 성흔은 진짜다.’ 라는 말.
순간 옷을 벗어서 성흔까지 보여줘야 하나 싶었지만,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사장은 픽 웃음을 흘리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는 없는 법이지. 귀한 걸 가지고 오셨구려.”
그렇게 말한 제사장은 뒤에 서있던 호위에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상을 차려와라.”
“예, 족장님.”
완전히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일이 틀어졌으면 신앙의 구심점인 부족에서 칼춤을 춘 다음에 탈출했어야 하니까.
그건 그렇고 검을 보기만 하고 납득하다니, 나름 제사장이긴 한 건가? 신의 힘을 느끼기는 하는 것 같다.
제사장의 반응은 제법 온화했다. 제사장으로서는 무너져가는 신앙의 신물을 가져온 자를 상대하는 것이고, 부족장으로서도 부족을 살릴 수 있는 사절이 온 것이니 당연한 일.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렇게 온화하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항복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신물은커녕 우리의 주를 섬길 신전조차 없던 상황에서 제사장을 자처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겠습니다.”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바란디가 부족은 신앙으로 뭉친 부족인데, 제사장인 저조차 어둠을 헤매는 기분이니 다른 동포들은 오죽했겠습니까. 헌데 제국이 주의 힘이 담긴 신물을 보여주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였으니, 감사하다는 말조차 부족합니다.”
어느새 존대로 돌변한 제사장의 말을 듣고 나니 납득할 수 있었다. 제사장은 항복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거다. 부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고 싶지만 제사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그렇다고 제사장임을 포기하기에는 살리고자 하는 부족이 무너질 것 같기에.
그 미칠 것 같은 딜레마 속에서 내가 활로를 열어줬으니 제사장도 망설일 것이 없었겠지. 굳이 내가 아닌 제국이 새로운 길로 인도했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이제 제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