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436
#435화
석양마저 집어삼킨 깊은 밤. 뱃머리에 앉아 검게 물든 강물을 응시하던 한 소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장강(長江)을 바라보며 술이나 기울일까 하고 왔지. 선객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소년의 등 뒤, 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난 오척단구의 노인이 호리병을 흔들며 씩 웃었다.
“어때, 생각 있느냐?”
“과한 음주는 몸에 해롭습니다. 멀리하시지요.”
“그러지 말고 한잔하지 그러느냐? 운치도 좋은데.”
“혼자 남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군요.”
“거, 어린놈이 말하는 본새가 아주 샛노랗구나. 아까부터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그 순간,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푸른 하늘이 떠오를 만한 헌앙한 얼굴 위로 먹구름이 끼고 낙뢰가 내리쳤다.
이어 맑은 목소리 대신 깊게 가라앉은 음성이 소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적당히 하지.”
푸르스름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런 소년에게서는 늘 밝고 쾌활하던 어린 의생, 문경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살성(殺星)이라는 별호를 지닌 희대의 무인이며, 예리한 발톱을 드러낸 맹수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이구, 무서워라.”
어지간한 절정 고수도 석상처럼 굳어 버릴 가공할 기세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노인. 화왕(火王) 적천강이 호리병을 던졌다.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놈 흉내는 관두고 목이나 축여.”
느릿느릿하게 다가온 호리병을 받아 든 문경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 없다.”
“왜, 아직 술 마실 나이가 아니라서?”
“끊었지. 오래전에.”
“의생 노릇 할 때부터겠군.”
“……안 자나?”
“늙으면 잠이 없어지거든. 누구처럼.”
문경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일평생 과묵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그에게 있어 적천강은 대화를 나누기 힘든 상대다. 상대하기 싫다면 피하는 것이 맞다.
“가려고?”
“자네가 알 바 아니지.”
“술은?”
문경은 손에 든 호리병을 강물에 던졌다. 넘실거리는 장강의 물결이 호리병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다 마셨다.”
“……마시기 싫으면 돌려주기나 하던가. 고약한 늙은이로고.”
적천강을 스쳐 지나가던 문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살성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 지금의 그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의생일 뿐이다.
“혀가 가볍군.”
“듣는 귀도 없는데 뭐가 어때서. 애초에 여기까지 따라온 마당에 굳이 정체를 감추는 이유가 뭔가?”
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째서였을까. 단지 한순간의 충동이었을까.
그건 수많은 살행(殺行)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냉철한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군. 아직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한 거야.”
적천강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문경이 입을 열었다.
“단순한 동행일 뿐이다.”
“이해해. 처음에는 노부도 그랬거든. 하지만 웬 괴이한 놈 하나를 만나서 말년이 꼬여 버렸지.”
문경은 ‘괴이한 놈’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고, 동시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다.
풍진 강호에서 온갖 인간 군상과 사건을 겪은 그의 시선으로도 그놈은 난생처음 보는 생소한 부류였으니까.
“진태경.”
“역시 아는군. 하긴, 모를 수가 있나.”
“희한한 놈이더군. 나이에 비해 대단한 경지에 도달했어.”
적천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큼. 대단하긴 무슨. 그냥 운 좋은 놈이야. 순수한 무재(武才)로는 검성의 제자를 못 따라가. 아직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미 중단전(中丹田)을 열 준비를 끝마쳤더군.”
문경은 오는 내내 뱀으로 묘기를 부리던 청년을 떠올렸다.
이제 겨우 약관이 갓 넘은 나이로 휘황한 검강을 흩뿌리던, 사천당가에서의 모습도.
“그 아이도 대단, 아니 대단히 미친놈 같긴 했지. 확실히 재능으로만 따지면 진태경보다 한 수 위다.”
“뭣이!”
“……?”
“아.”
물끄러미 적천강을 바라보던 문경이 혀를 찼다.
“제자 사랑이 극진하군.”
“제자?”
잠깐 멈칫하던 적천강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뭐. 제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게 무슨 헛소리지?”
“아니, 그. 약간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한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문경은 문득 머리가 아파 왔다.
암천(暗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사천을 피로 물들인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 괴이한 스승과 제자에 얽힌 이야기까지 듣고 있자니 없던 뱃멀미까지 생길 것 같았다.
“용건 없으면 이만 가 보겠다.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한마디를 툭 던진 문경이 선실로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고맙네. 녀석을 구해 줘서.”
“…….”
“진심이야.”
문경은 대답하지 않고 선실의 문을 열었다. 까칠한 늙은이라며 투덜거리는 적천강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딱딱한 목제 침상에 앉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옆 침상에는 한참 전에 자리를 차지한 선객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문경은 미동도 하지 않는 진태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괴이한 놈이야.’
그래서인지 잠도 괴이하게 잔다. 처음에는 호흡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뿐인가. 수백 년에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 천무지체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앞서 적천강에게선 점점 더 몸이 완벽해지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까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천무지체가 왜 천무지체인가.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완벽한 몸이기에 하늘이 내린 무골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완벽이라는 두 글자는 조금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기에 성립되는 단어. 팔불출 스승의 눈에 콩깍지가 씐 탓에 잘못 판단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대단한 놈인 건 변함없지. 아니, 놈들인가?’
진태경의 바로 옆 침상에는 청풍이 침을 질질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뭔가를 먹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길래 자세히 보니 늘 옆에 끼고 있던 뱀의 대가리를 쪽쪽 빨며 잠꼬대 중이다.
“만두, 오리 구이, 월병도 주세요…….”
“…….”
“많이, 많이 주세요…….”
도대체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문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태경과 청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런 녀석들이 향후 천하 무림을 밝힐 등불이라니.’
문경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약관을 갓 넘긴 새파란 나이에 초절정의 벽을 깨트린 희대의 천재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이립 전에 중단전(中丹田)을 연다면 그때는…….
‘이건.’
순간, 진태경과 청풍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문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언제? 아니, 어떻게?’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문경은 황급히 곤히 잠든 진태경의 맥을 짚었다.
명문혈을 통해 공력을 흘려보내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고가 정지한 뇌리에 한 가지 사실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중단전이…… 열렸다?’
오랜 세월 단련한 부동심(不動心)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문경이 넋 나간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뭐 하세요?”
시선을 내린 문경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 쌍의 눈동자를.
등허리의 명문혈과 중단전이 있는 가슴에 올려져 있는 문경의 두 손을 차례대로 바라본 진태경이 입을 열었다.
“뭐여, 시벌.”
문경은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오해다.”
“오예겠지.”
“잠시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보…….”
그리고 진태경은 그의 진심에 응답했다.
쾌조선의 모두가 깨어날 만큼 커다란 외침으로.
“노야!”
콰앙!
선실의 문이 잿가루가 되며 흩어지며 화왕 적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고요하던 장강의 평화가 깨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 * *
장강수로맹주 해상왕의 제자이자, 사천의 강을 호령하는 수룡채의 채주, 선화아(船火兒) 무송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안 돼! 내 쾌조선이!”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살성, 아니 문경은 갑자기 약초를 만들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쾌조선 한 척을 불살라 버린 적천강은 무송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네. 배야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인데 뭘.”
“안 돼! 안 돼애!”
“어허, 괜찮대도. 사람과 금만 있다면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배 아닌가.”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배가 아니고 저희 장강수로맹에서만 만들 수 있는 특수한 쾌조선입니다! 다시 만들려면 총단에 요청해서 장인들을 데려오고, 천금을 쏟아부어야……!”
격하게 소리치던 무송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적천강이 심상치 않은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고 있던 탓이었다.
어느새 주먹에는 열양지기가 이글거리는 중이다.
“천금을 쏟아부어야, 그다음에 뭐?”
무송이 입을 다물었다.
천금을 쏟아부어서 쾌조선을 다시 만들지, 장강에 자신의 피를 쏟아부을지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돈이냐, 목숨이냐다.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금을 쏟아부어도 돈이 남는다, 그런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적 대협.”
“그렇지? 여기 장사 잘되잖아?”
무송이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양민들이 보면 오장육부까지 지릴 장면이지만 저래 보여도 저게 웃는 거다. 성골 수적답게 인상이 더러워서 그렇지.
그는 덩치에 안 맞게 양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어후, 이를 말씀이십니까. 없어서 못 뺏죠.”
“그래, 그래. 잘됐군. 기왕 생각난 김에 하는 말인데, 적당히 뺏으라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예, 예.”
“내 이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함세. 수련 도중에 잠깐 실수를 했지 뭔가.”
“그럼요. 당연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혹시 다치신 곳은?”
“없네. 그런데 요즘 기가 허해. 뭐 씹을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근래에 괜찮은 하수오가 몇 개 들어왔는데, 드디어 주인을 찾은 모양입니다.”
“주인은 자네지. 노부는 손님이고. 허허. 그래도 준다니까 고맙게 받겠네.”
무송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선 적천강이 내게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그러게 왜 야밤에 그 난리를 쳤느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다가 깼는데 어떤 사내놈이 노야 가슴이랑 등허리를 만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뼛가루까지 태워 버려야지.”
“네, 그렇게 된 겁니다. 그 상황에서 무슨 판단을 해요. 그리고 갑자기 말릴 새도 없이 죄다 때려 부숴 놓고선.”
결과는 화끈했다.
문경은 살성이라는 별호답게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적천강의 공격을 피했고, 초고온의 열기가 담긴 화염신장은 쾌조선을 화끈하게 불태워 버렸으니까.
적천강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저놈이 옛날 버릇 못 버린 줄 알았지.”
“하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긴 하죠.”
“여든은 오래전에 넘겼을걸?”
“그럼 세 살 버릇 백 세까지 가는 걸로.”
물에 빠졌던 사람들을 살핀다며 바쁘게 돌아다니던 문경이 스쳐 지나가듯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라.”
나는 입을 꾹 다무는 대신,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외쳤다.
“문경아, 뭐라고?”
“예, 예?”
“아니.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
“그럴…… 리가요. 잘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네, 네.”
“그럼 계속 일 봐. 고생 많다.”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컨셉충의 최후다.
그나저나 아주 돌아오자마자 스펙타클 하구만.
‘이게 무림이지.’
나는 끝없이 펼쳐진 장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