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43
42회
난데없는 박장대소에 윤설의 얼굴 위로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은 억울한 이의 표정과 어이없는 이의 웃음이 완벽히 대조를 이루는 순간, 해인이 서둘러 제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조선에서 당연한 것이 현대에선 그렇지 않았고 또 그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해인은 제 입장에서만 판단하는 것이 윤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거라 여겼다.
“윤설아, 미안. 내가 자꾸 내 생각만 하는구나. 이제 네 얘길 들을게. 자아, 진지하게 말이야. 장난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줘.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했니?”
어느덧 귀까지 벌게진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곳에선 그렇지 않다는 걸 해인의 반응을 통해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면이 많았고 사실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해인의 웃음이 결코 놀림이 아니라는 걸 아는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혼인을 약조했다고 하여도….남녀가 단 둘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단다. 하여, 낯선 도령과 마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지. 헌데….나…난…..그러한 금기를 모두 깨고 말았구나. 더군다나 그분께서 내 어깨에 닿으셨으니…..휴우…..어쩌면 좋단 말이니.”
꽤나 진지한 윤설의 눈빛에 해인이 멈칫하고 말았다.
제 잠옷을 입은 채 자그마한 옥탑방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있지만 길게 머리를 땋아 내린 그녀는 조선의 규수임에 틀림없었다.
해인이 장난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윤설아,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조선에선 그랬었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여기에선 말이야, 미혼 남녀가 서로 마주하는 건 절대로 흉이 아니거든. 에이, 흉이 다 뭐야. 그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로 결혼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니깐? 믿어줘. 이건 사실이야.”
“어, 어찌……그런 일이…. 진정 참이란 말이니?”
해인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의 우정을 걸고 맹세할게. 히잇.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고 두 다리 쭉 뻗고 자도 돼. 알았지? 어우 야, 아까도 말했듯이 너 정말 좋았겠다. 대박 사건이라니깐. 헤헷. 빠순이들이 알면 부러워 쓰러지겠는걸? 말도 마. 아마 준이 씨랑 결혼하려는 애들이 줄을 섰을 거다. 아, 내 말은 준이 씨가 바람둥이라는 말이 아니라 팬들한테 인기가 짱 많다는 뜻이야. 음…. 그러니까 예를 들면, 네가 살던 그곳에서도 꽃미남이 있지 않았니? 뉘 집 도령이 잘 생겼다는 소문쯤은 너도 들은 적이 있겠지? 바로 그거랑 비슷할 거야. 흠모하는 도령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소녀들이 몰래 숨어서 보고 싶어 하던? 캬, 내가 생각해도 참 적절한 예시구먼.”
윤설의 머릿속으로 한복을 입은 준의 모습이 홀연히 떠올랐다.
부엌 앞에 선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준이 자신처럼 조선에서 왔다고 착각했었다.
윤설의 눈에 그는 분명 조선의 도령이었다.
하지만 오는 길에 후대 사람들의 차림으로 변한 모습은 또 영락없이 이곳의 사람이었다.
윤설은 순식간에 변신하는 그의 존재가 혼란스러웠지만 해인을 신뢰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제 걱정을 덜어냈다.
김 감독은 약속을 지켰다.
예정대로 촬영 시간이 늦춰진 아침, 평소보다 푹 자고 일어난 준의 얼굴이 더없이 개운했다.
또다시 강행군이 이어지겠지만 흔치 않은 아침은 꿀같이 달기만 했다.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던 준이 갑자기 미소 짓기 시작했다.
그의 미소는 세수와 샤워를 겸하는 내내 이어지더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는 동안도 지속되었다.
스킨을 바르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던 그가 이젠 옅은 웃음소리까지 내기 시작했다.
‘윤설 씨는…. 정말 특별해. 뭐랄까?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스타일이야. 언젠가 한번쯤은 상상했던 사람이랄까? 그래,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지. 그런 사람을 진짜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정말 신기하다. 꿈은 이루어지는 걸까?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먼발치에서도 흔치 않은 언행으로 그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윤설이었다.
가까이에서 조심스레 바라본 그녀의 모습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놀랐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준은 그녀만의 수수하고 예의바른 면이 좋았다.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은 요즘 세상에 흔치 않았고 핸드폰을 목에 달고 다니는 모습은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준이 윤설을 특별히 여기는 점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연예인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동하는 곳마다 길 가던 행인들까지 몽땅 쓸어 모을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는 그였다.
사인과 사진 촬영의 요구는 빗발치기 마련이었고 이젠 안전사고를 우려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윤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모습이 서운한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냥 한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윤설이 고맙기까지 했다.
시기로 똘똘 뭉친 친구들과 끊어진 이후, 내내 배우로서만 살았던 그는 홀로 있을 때면 외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긴 했지만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한 단계씩 밟아가는 것에만 그저 기쁨과 보람을 둔 삶이었다.
조금은 삭막하고 냉랭하며 외로운 그 시간 속으로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사람이 불쑥 들어온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싱긋 웃던 그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형. 어디세요? 저도 거의 다 했습니다. 이따가 뵐게요.”
10분 후, 주차장에 도착한다는 윤 매니저의 전화였다.
또다시 고단한 하루의 시작이었지만 준의 가슴은 윤설을 만날 생각에 설렘으로 두근대고 있었다.
흰색의 밴이 방송국으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소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김 감독의 연출작, 의 최종 캐스팅까지 갔던 심이지가 돌연 하차하게 된 이후 나타난 현상이었다.
과거, 그녀는 대세인 민준과 한 차례 스캔들이 났었고 그 일이 있은 후, 함께 캐스팅 물망에 오른 것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했다.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지 않은 이상 또다시 엮일 리 없다는 반응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별안간 그녀가 떨어져 나오면서 온갖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다.
특종에 갈증이 난 기자들은 이유를 캐내기 위해 그녀의 촬영 현장에까지 와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열린 문으로 이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급히 몰려들었다.
“심이지 씨, 의 돌연 하차를 많은 분들이 궁금히 여기시는데요, 한 마디 해주시죠.”
“최종까지 갔다가 갑자기 취소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지 씨, 여기 좀 봐주세요.”
매니저와 경호원들이 밀려드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밀어내며 그녀를 보호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입을 앙다문 그녀가 재빨리 안으로 사라지자 아무 것도 캐내지 못한 이들로부터 아쉬움의 탄성이 새어나왔다.
유리문이 닫히자 곧 밖의 소란함이 차단되었다.
이지를 따르던 매니저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신경 쓰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더 이상 소란 피우지 않게 할 테니까 아무 염려 말고 연기에만 전념해. 알았지?”
미간을 찡그린 이지가 별다른 반응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전작을 마친 후, 휴식을 취하던 그녀에게 사극 판타지 과 미니시리즈가 동시에 찾아왔었다.
한꺼번에 두 작품이나 찾아든 것은 꽤 잘 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쾌재를 부르는 가운데 이지의 선택은 당연히 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민준 때문이었다.
이지는 준을 처음 보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고생이었던 그녀가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치한에게 쫓기던 그녀는 무작정 길가의 카페 안으로 들어갔었다.
밝은 인사와 싱그러운 미소는 공포로 주눅 든 마음을 녹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시였다.
돈이 없었고 핸드폰의 배터리도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막상 들어오긴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움에 떨리는 눈빛으로 통유리 너머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치한이 저 멀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저리를 친 그녀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가 메모 한 장을 가만히 내밀더니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지의 두 눈이 촉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그는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비대한 몸과 못난 생김새로 친구조차 없던 그녀에게 낯선 청년의 친절은 감동이었고 간절히 붙잡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경찰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게 된 이후, 이지는 종종 카페를 찾았었다.
궁금했던 그의 이름은 가슴에 달린 이름표로 알게 되었다.
민준……
간결한 이름은 그의 올곧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
고마움을 전하려는 발걸음은 관심으로 이어졌고 서서히 호감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지고 말았다.
군대를 갔다고 했다.
기다렸다.
언제 올지 몰라 거의 매일 카페에 들를 정도였고 적립 카드는 벌써 몇 장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올 때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이지는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성형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따뜻함을 기꺼이 내어준 남자……
그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SNS에 날마다 기록한 다이어트 일기가 큰 반응을 일으켰고 눈여겨 본 관계자에 의해 이지는 뜻밖에 연예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데뷔를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녀가 남몰래 눈물을 흘린 이유는 바로 준에게서 멀어진 것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민준이 배우로 데뷔한 것이었다.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이지에게 그 작품은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사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극이라는 장르가 이제껏 현대극만 해왔던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몰랐었다.
김 감독에게 사정사정했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염두에 둔 마음을 끝내 돌이키지 못하고 말았다.
소속사에선 비상이 걸렸다.
최종 캐스팅을 마친 그녀가 리딩 후에 바로 하차한 것은 이미지에 치명타였다.
소속사는 급히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럴 듯한 이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와 동시에 이지에게 들어왔던 미니시리즈 캐스팅이 곧장 성사되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집을 부릴 수만도 없었다.
“휴우….”
나직한 탄식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분장실로 향하는 길목마다 그녀를 알아본 이들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마음을 추스른 이지가 그들을 향해 미소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기작을 선택했고 합류했으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장은 곧 시작될 촬영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던 이지의 시선이 무심코 한 사람에게 닿았다.
상대 역, 강태주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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