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est friend is a Korean lady RAW novel - Chapter 49
48회
-드르르륵-
차 안에서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던 심이지가 진동으로 울리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의 발신인은 민준의 소식을 알려주는 영은이었다.
반가움이 그녀의 입가에 미소로 피어났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미소는 얼어붙고 말았다.
준이 촬영 현장에 있는 어느 한 여자에게 유난히도 잘해준다고 했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는 순간, 이지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 이지? 헐, 열 받았나 보네? 정말 그런 거야? 어쩌지? 나 슛 대기 중인데? ]“나도 같은 상황이야. 금방 끝낼게.”
[ 좋아. 누군지 궁금하겠지? 예전에 말한 거 기억나? 드라마 팀에 음식 자문을 맡은 여자가 있다고…. 왜, 어려 보이는데 화장기는 별로 없고 댕기머리 길게 땋았다고 했잖아. ]영은의 말을 따라 이지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흘려들었던 탓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준의 관심을 받는 여자가 누군지 이제부터 알아 가면 그만이었다.
이지가 태연한 척 거짓말을 내뱉었다.
“기억나.”
별안간 수화기 너머로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웃기지 않아? 천하의 민준이 하필이면 왜 그렇게 볼품없는 사람에게 잘해줄까? 네가 신경 쓸 그런 상대가 아니거든.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꼬리치는 여우과도 아니고…. 참, 웃긴 일이 또 있었다? 그 여자가 서예 대역까지 맡았어. 진짜로 잘 쓰긴 하더라.”
이지가 미간을 찡그렸다.
영은이 들려주는 정보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들을수록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예쁜 외모로 여우 짓을 하는 여자들은 차고 넘쳤다.
이지 역시 외모의 격변을 이뤄낸 사람으로서 그런 심리를 잘 알았고 나름 대처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은이 말한 그 여자는 이지의 머릿속에 없는 존재였다.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영은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민준이 그 많은 스태프들 중에 유독 잘 대해주는 한 명이라면 이상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힌 이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촬영장으로 한 번 갈게.”
[ 오….. 전격 관리에 들어가시겠다? 심이지, 멋진데? 네가 바빠서 그렇지 온다면 나야 환영! ]통화를 마친 이지의 눈빛이 불안으로 일렁였다.
그녀는 먹다 남은 김밥을 비닐 속으로 집어넣더니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준이 씨…. 아니죠? 그냥, 당신의 착한 마음이 못 본 체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날처럼……’
“자아, 따끈한 쑥떡이 왔습니다. 어서들 드세요!”
해인의 싹싹한 한 마디에 스태프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박스에서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떡들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해인이 비닐에 나눠 담은 것들을 하나씩 나눠주자 스태프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 오늘 무슨 날이에요? 해인 씨가 이런 걸 다 준비하시고?”
“히잇. 제가 아니라 윤설…아니지, 우리 음식 겸 서예 선생님께서 준비하셨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동안 계속 얻어먹기만 했잖아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죠. 자자, 보답하는 의미에서 준비했으니 부담들 갖지 마시고 어서들 오세요.”
“캬아, 역시 음식 선생님다우십니다. 간식 하나도 평범하지가 않군요?”
감동어린 한 마디에 곧 다른 한 마디가 얹어졌다.
“오…. 아직 따끈한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데요?”
“헤헷. 그렇죠? 방앗간에서 새벽부터 만들어 온 거랍니당. 맛이 기가 막힐 거예요.”
해인이 야외에 있는 스태프들을 챙기는 동안 윤설은 부엌에 있는 음식 팀을 챙겼다.
여자들은 뜻밖의 간식에 놀라는 눈치였지만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떡을 나누어주는 윤설의 손길이 공손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느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것 같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약소하지만 준비한 떡을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뿌루퉁한 얼굴들이 공손한 말투와 행동에 덩달아 목례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니었다.
끝내 윤설의 스펙을 알아내지 못한 여자들은 내심 불만이 있었고 그런 마음은 그녀가 서예 담당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자 두 배로 커지고 말았다.
감독에게 뇌물을 먹였을 거라는 루머가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그 중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었다.
뇌물을 써가면서까지 바라는 소원이라면 당연히 얼굴이 드러나야 하는 배우의 자리쯤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빛도 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소박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상차림이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이 바닥에서 인지도를 쌓으리라는 야망 역시 평소 윤설의 언행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소문만 무성한 채 괜한 질투만이 남은 상태였다.
“허면, 편하게들 드십시오. 저는 잠시….”
“같이 드시죠. 왜?”
“제 벗이 혼자 힘들 것 같아 도와주고 오겠습니다.”
윤설이 목례를 남긴 채 밖으로 나가자 여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 이 떡 웬일이래요? 완전 대박 맛있어요.”
“그치? 은근 놀랐다니깐. 요즘 이렇게 잘 만다는 집이 드문데 말이지. 쑥 향이 제대로지? 찹쌀가루와 멥쌀가루 비율이 어떻게 될까?”
동그래진 눈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사이, 한 여자가 스마트폰을 들고 일어섰다.
“우리 조카 돌잔치 다가오는데 떡은 여기에서 주문해야겠어요.”
바닥에 놓인 떡 상자엔 방앗간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선명했다.
그녀가 폰으로 사진을 찍자 여자들이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촬영장으로 막 들어선 윤설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해인과 마주쳤다.
“해인아, 많이 힘들었겠구나?”
“에이, 힘들긴. 이렇게 누군가에게 베푸는 건 처음인데 기분은 무지하게 좋다. 히잇. 윤설이 네 덕분에 이런 기쁨도 알아간다니깐. 아무튼 기특한 아이디어였어. 모두들 떡 맛있다고 난리들이야.”
급여를 쪼개어 수고하는 이들에게 대접한 것에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참, 민준 씨하고 매니저님만 못 드렸어. 물어보니까 준이 씨는 저기 언덕에서 대본 연습 중이고 매니저님은 차에 뭘 가지러 가셨대. 주차장엔 내가 갈 테니까 넌 준이 씨한테 전해줄래? 콜?”
윤설이 해인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 뒤로 언덕이 있었다.
야산이라고 하기에 규모는 작았지만 나무들과 꽃들은 제법 무성한 편이었다.
떡을 손에 쥔 채 언덕을 오르는 윤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는 걸까? 해인이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래지 않아 의문을 가진 이의 귓가로 사내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윤설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외치는 소리는 준의 것이 분명했다.
“먹는 것은 사람의 육신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혼까지 담는 것이옵니다! 헌데 어찌 그것을 경홀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준이 허공을 향해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계속해서 이어진 대사는 마치 앞에 누군가를 세워놓은 것만 같이 생생했다.
제 심정을 토로하는 대목은 단호함과 절절함을 넘나들며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쏟아내던 준이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였다.
“마음이…… 얼마나 아프십니까?”
준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 윤설 씨……”
“어느 누가 이토록 힘들게 한단 말입니까?”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든 윤설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녀의 반응은 분명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은 웃음을 유발할 만했지만 어쩐 일인지 준의 마음이 포근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윤설의 그 눈빛과 말투는 그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언젠가 심적으로 고단했던 준은 누군가에게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뜻밖에도 진심 어린 첫 번째 위로는 윤설로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윤설 씨, 놀라셨나요? 지금…. 대본 연습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대….대…본…..이요?”
윤설이 당황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자 준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진심 어린 위로를 받고 싶었나 봅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일까요? 하하….”
윤설이 조심스레 그를 응시했다.
그의 웃음은 여느 때처럼 밝았지만 그의 말은 어딘가 쓸쓸하게 다가왔다.
해인의 말로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윤설은 출근길, 촬영장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한 무리를 자주 목격하곤 했다.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면 그늘이 없어야만 했다.
‘이분의 마음은 왜 힘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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