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115
“하여간 넌 그게 문제야. 의논도 안 하고 혼자 끙끙대는 헛똑똑이.”
“응….”
“눈 뜨려고 애쓰지 마. 착하지.”
귓가에 왱왱, 신랄한 잔소리를 늘어놓던 게 거짓말처럼 음성이 아기 달래듯 순식간에 부드럽게 번했다. 크고 따스한 손이 뺨을 가만가만 쓸다가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지금 병원이야. 응급 처치 다 끝났고 흉터도 안 남을 거라니까 마음 놓고 푹 자.”
가지 마.
간절한 바람이 불끈 힘을 솟게 했는지,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옷자락을 꽉 잡았다.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었지만 그게 연우재의 셔츠 소매란 건 알았다.
“알았어, 안 갈게.”
내 속내를 읽은 듯 연우재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안 가고 쭉 있을게.”
그 말에 안심이 됐는지 몸이 흐물흐물 녹듯,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머리를 베개에 똑바로 눕혀 주는 손길 속에서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
연우재의 그윽한 체취, 다정한 속삭임은 꿈속에서도 쭉 이어졌다.
* * *
나는 외출용 옷으로 환복한 뒤, 창 너머 가을 빛깔이 물씬한 후원을 바라보다 태블릿 PC의 실시간 뉴스를 클릭했다.
어느 채널을 눌러도 주요 기사와 보도는 한결같았다. 과거 윤성일보 사주 부부와 천암보살 간의 추악한 거래, 그리고 천암보살의 VVIP 기업 일가 장부를 논하고 있었다.
권우혁과의 구두 약속대로, 곧 신명그룹으로 거듭날 구 통합 신명교 부분을 제외한 장부 원본이 온전히 공개되었다. 개중 절반은 여전히 나라를 주름잡던 권세가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사주 집안이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고도 남을 만큼 전무후무한 스캔들이었다. 정재계 기자들과 언론인, 과거 가해자들의 정적 포지션에 있는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연일 비난과 맹공격을 퍼부어 댔다.
-이게 21세기에 가능키나 한 일입니까? 아무리 무속과 미신, 역술, 풍수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게 우리 민족 특성이라 해도 어린애들을 데려가서 액막이 의식의 제물로 삼아 학대를 자행했다니요!
-당시 보육 시설과 복지재단장도 철저히 수사해서 어떤 커넥션이 없었는지, 당시 입양된 아이 중 실종됐거나 현재 생사 여부가 불분명한 아동은 없는지, 죄다 밝혀내야 합니다!이건 아동의 인권을 좌시하고 유린한 사건일뿐더러,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럽고 충격적인 범죄로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국가적인 수치입니다. 이 일만은 연좌제 상관없이, 선대의 악업을 대신 짊어지고 현재의 책임자가 반드시 사퇴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장부를 세상에 드러낸 인물은 옥중의 추성희, 그리고 병실 신세 중이던 윤태경인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연우재는 내 존재가 노출되지 않게 최대한 만전을 기했다.
“혹시 네가 타깃이 될지 모르니까. 어차피 장부 중 몇 명은 증거 불충분에 무혐의로 유야무야될 수 있거든.”
잠시 후 내 병실에 온 연우재가 다시 그 화제를 꺼냈다. 장부의 폭로자에 대해서는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 제물 중 하나라는 사실만은 밝히고 싶었다. 서광재에서 열두 살까지 시달려 온 액막이굿, 소위 ‘회개 의식’이란 이름하에 자행된 학대의 희생자임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반대야. 재고해 봐.”
하지만 연우재의 의견은 달랐다. 이유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런 과거로 네가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게 싫어. 동정, 연민, 호기심, 모두 불필요한 관심이잖아.”
“그래도 멀리 보면 그편이 나아요. 어차피 내가 윤성일가의 혈육인 건 다 알려져 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윤성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닐 테니 차라리 동정의 대상으로 굳혀 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너는 정말….”
연우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 보면 보통 강심장이 아냐. 멘탈이 강해서 좋다고 해야 할지.”
“딱히 전략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 강심장 멘탈도 아니고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연우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우재 씨를 만나 많이 극복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 지난하고 지독했던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리고 숨이 가빴지만, 우재 씨를 만난 뒤로는 그때만큼 힘들지 않아졌거든요.
어쩐지 낯간지러워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우리 둘 사이, 아직 갈무리해야 할 얘기가 더 남아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보다 내일 퇴원 수속 밟을까 해요. 장 집사님에게 연락드리면 오셔서 도와주실 거예요.”
진작 통원 치료가 가능했으나 연우재가 좀 더 머물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마음대로 퇴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드넓은 병실을 새삼 다시 둘러보았다. 한라그룹 의료 재단 병원의 VVIP 병동은 호텔 스위트룸 뺨치게 호화로웠다.
“안 돼. 붕대 풀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다 갖다줄게.”
“갑갑해요. 열흘째 안에만 있으니까.”
“뒤에 산, 후원, 골프장 널렸는데 왜 안에만 있어? 내가 휠체어 끌어 줄 테니까 언제든 말만 해.”
“출근 안 해요? 그리고 휠체어가 왜 필요해요. 다리 다친 것도 아닌데….”
“네 뒤통수 보고 싶어서.”
“……네?”
“얼마나 귀여울까 상상이 돼서 말이야. 뒤에서 휠체어 끌면서 얌전히 앉아 있는 네 밤톨만 한 뒤통수 이렇게 내려다보면.”
뭔 개소리야, 나는 불쑥 튀어나올 뻔한 핀잔을 꾹 삼키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웃자 연우재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진담인데.”
그의 체취가 가까이 와 닿자 일순 웃음이 뚝 그쳤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아무튼 여기서 며칠 더 쉬는 걸로 하고. 외출 준비는 다 됐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가 괜찮냐고 묻지 않았는데도, 괜찮다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갔다. 연우재는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하고 부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10분 뒤 연우재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아직 왼팔을 두툼한 붕대로 감은 채였지만 운신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가을색이 완연한 바깥 공기는 선선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오랜 세월, 고대했던 복수의 마지막 단계가 목전에 있었다.
* * *
하지만 그토록 바라고 또 바랐던 복수의 마지막은 예상했던 것만큼 통쾌하지 않았다. 심장이 벅차오르는 기쁨과 희열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은효야. 그동안 네게 몹쓸 짓 한 것…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두를 대신해서 내가 이렇게 사죄하마.”
“은효야, 나도 그동안 못살게 굴고 괴롭힌 거 다 잘못했어.”
나는 접견실 의자에 앉아 내 앞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용서를 비는 모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연우재는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윤소담과 함께 온 가족 합동 접견이기도 했고, 내가 나가 있는 편이 좋겠다고 말해서였다.
처음엔 믿기 어려울 만큼 이렇다 할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원한에 찬 열정과 오기로 살아왔던 게 무색할 정도로 담담했다. 진심에서 우러난 사죄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기에 모녀가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지, 티끌만큼이라도 진실로 참회하고 있는지 여부는 상관없었다.
-은효야. 내가 나서서 더 확실히 막아 주고 널 지켜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삼촌이라 불릴 자격도 없었어. 난 용서를 빌 자격도 없는 놈이야.
한 시간 전, 또 다른 병원의 병실에서 마주했던 윤태경의 사죄는 진심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 손에 잡힐 듯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윤태경의 사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를 벌레처럼 보지 않고, 악하게 굴지도 않았던 유일한 서광재 어른이기도 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린 것 같았다.
비록 내가 액막이가 된 이유, 그의 친모 조현애가 내게 가했던 모든 악행은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윤태경을 향한 원한은 이제 한 줌도 남지 않을 듯싶었다.
-네, 용서할게요. 삼촌도 눈 치료 잘 하시고…. 어디서든 숙모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때 윤태경에게 건넸던 말이 눈앞의 모녀에게는 좀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윤소담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히끅거리며 우는 시늉을 했다.
“은효야, 정말 잘못했어… 내가 이렇게 빌게.”
-이 무생물 같은 년이!꺼져, 꺼지라고!남자한테 미쳐서 집안 체면 다 깎아 먹고 도망간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래, 은효야.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여기서 속죄하고 나가면 다신 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게. 소담이랑 같이….”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소담이에게 떨어진 유산도 빼앗기고 친정도 풍비박산 날 테니까. 그리고 윤진하가 그랬듯 윤소담도 어느 날 갑자기 비운의 사고를 당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사고의 전말을 알지 못했다. 다만, 연우재가 내 배후에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짓밟고 무시했던 처조카, 그리고 사촌은 이제 베일에 싸인 두려움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한라그룹과 CAM파트너스의 실질적인 오너, 그 든든한 세력을 곁에 둔 존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