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91
“우리 이러지 말자, 우재야.”
권우혁이 빙긋 웃었다. 입가를 적신 잔잔한 미소가 아까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내 손으로 내 동생 보낼 순 없잖아.”
많은 것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동생이 만만치 않게 미친놈이라 제어하기 어렵다는 말은, 결국 이유가 뭐든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친동생의 과오가 세상에 드러나며 조만간 새로이 거듭날 그의 조직, 신명그룹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결코 두고 보지 않을 터였다.
악영향을 미치기 전에 제 손으로 먼저 보내겠단 의미나 매한가지였다. 권우혁은 제 혈육에게도 감정이 없는 진짜 사이코패스니까.
“그러니까 우재야. 나 끌어들이지 말고 둘이서 해결해. 아니 셋인가? 이렇게 부탁할게.”
“착한 척, 부탁하는 척 좀 하지 마. 그럴수록 더 미쳐 보이니까. 씹새끼야.”
“말이 안 통하네.”
권우혁은 끄트머리만 남은 꽁초를 아예 물잔에 가라앉힌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살짝 일그러진 입술에선 일말의 위기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럼 어쩔까? 다 큰 동생 잡아다가 알아듣게 타이를 수도 없는데…. 타이른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거든. 어디 시설에 가둬 둘 수도 없고.”
“내 동생 아니잖아? 그건 대표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때 웅웅 울리는 진동음에 권우혁이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실례한다며 눈짓하는 얼굴엔 동요 한 점 없었다.
그가 상대편의 보고를 경청하길 한참, 갑자기 휴대폰 너머의 음성이 확 높아진 건 연우재가 슬슬 지루함을 느끼며 시계를 들여다볼 때였다.
-에이, 저 지 애미랑 씹 뜰 새끼들. 하여간에!백 실장, 새로 온 보지 년들 총 몇이야, 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늘 하필 애들이 좀 굼떠서….
“모든 대화와 용건은 한 번에 한 사람씩만. 깔끔하게.”
-죄, 죄송합니다!
곧 권우혁의 입에서도 상스럽고 근본 없는 욕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수하는 연신 죄송하다며 굽신거렸고 권우혁은 나중에 다시 보고하라며, 차분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실례. 본의 아니게 통화가 길어졌네.”
“더 말할 거 없고, 권이결이 더는 송은효 주변에 맴돌지 않게 해 줘. 천희중, 이번 윤성일보 교통사고, 그리고 오늘 오전 교도소에서 단체로 사망한 그 사이비 종교 한씨 남매와 주요 참모들까지. 딱 거기까지만 하라고 해.”
“하나 빠졌네. 한영식인가 한영수던가. 선생 행세하던 놈도 우리 이결이가 단칼에 끝냈지, 아마? 송은효 씨가 그놈 손아귀에 들어가기 전에….”
권우혁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연우재가 어련히 다 알아서 했을 텐데 우리 이결이는 왜 중간에 끼어들어서.”
“얘기 끝난 걸로 아는데. 바쁘신 몸이니 이만 일어나시죠, 대표님?”
“알아듣게 한번 노력은 해 보지.”
권우혁은 손수건을 꺼내 담뱃재가 묻은 손을 닦고는 그대로 테이블에 방치했다.
“우리가 서로 대치해서 좋을 게 뭐 있겠어. 앞으로 볼 날이 까마득한데.”
어느 한쪽이 땅속 깊이 묻히거나 심해에 가라앉지 않는 한.
그렇게 덧붙이듯 그가 온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우재는 형식적인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노력에서 그치는 건 의미 없어. 알고 있겠지만.”
“…….”
“송은효에게 신경 끄게 만들어, 완전히. 그 애가 자의로 날 떠나지 않는 한, 우린 누가 끼어들 틈도 없이 굳건하니까.”
“자의로 널 떠나지 않는 한…?”
권우혁이 두 손을 맞잡고 방금 들은 말의 한 부분을 복기했다. 그 단순한 조건에 뭔가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는 시계를 흘깃 보곤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재가 조용히 그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한마디 덧붙였다.
“노력해서, 이결이 그 자식이 확실히 포기하게 만들어 볼게. 정식으로 의뢰도 안 받는 청부업을 몇 건이나 해서 인력 낭비하는 것도 멈추게 하고.”
“그렇게 해 줘.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아, 마지막으로 연우재 팀장에게 충고 하나만 하지. 몇 년 더 산 꼰대로서.”
권우혁은 한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기 전, 짧은 말을 건넸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드러내지 않을수록 좋은 법이야. 지금처럼 내 약점은 이거다- 외부에 떠벌려서 유리할 게 뭐가 있겠어.”
“나는 내 방식대로 알아서 할 테니까 대표님 너나 잘하시죠. 나도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합니다만… 내 약점 건드리는 날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똑같이, 아니 몇 배로 갚아 줄 거니 그렇게 알아.”
“어쩌나. 내겐 볼모로 잡힐 약점 자체가 없는데.”
“영원히 없을까?”
“…….”
“장담하지 마. 살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
부인할 수 없는 말에 권우혁은 피식, 실소했다. 그러고는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는 푸드 코트 출구를 향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연우재와 맞먹는 큰 키, 흠잡을 데 없는 체격과 그에 썩 잘 어울리는 회색 정장 차림이 로비를 걷는 짧은 동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권우혁을 돌아보고 길게 시선을 주었다.
우재는 권우혁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 * *
연수향이 송은효와 담판을 짓기로 결정한 건 윤성일보 장남, 윤진하의 부고를 들었을 때였다.
-언니, 조문 갈 거지? 같이 가.
동생 연미향의 제안에 다른 핑계를 대고 거절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나 허리가 너무 아파서 못 갈 것 같아. 다녀와서 보자.
그리고 장례 마지막 날 송은효가 빈소에 있는 걸 확인한 뒤 조용히 조문을 갔다. 그러고는 비서를 시켜 송은효를 다른 층 대기실로 불러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송은효는 화장기 없이 파리한 안색이었다. 사촌 오빠의 장례에 더할 나위 없이 걸맞은 낯빛이라 의외였다.
천덕꾸러기, 군식구 취급을 받으며 지내 왔으니 사촌들에게 정도 없었을 텐데. 다른 근심거리라도 있나.
“어서 와요, 은효 양. 초면은 아니니 편하게 은효 양이라고 부를게요. 기억은 잘 안 나겠지만.”
“아뇨. 기억합니다. 예전에 외삼촌 회장 취임 기념 연회로 서광재에 오셨을 때 인사드린 기억이 있어요.”
“어머. 거의 10년 전인데 기억력이 아주 좋군요. 이거. 카모마일차예요.”
연수향은 조카뻘 되는 여자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테이크아웃 컵을 건넸다. 송은효는 처음 인사할 때처럼 단정하고 정중한 태도로 이를 받아 들었다.
아무리 봐도 윤부경 회장 친자식들보다 훨씬 더 낫네. 모든 면에서. 하지만….
“이렇게 몰래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요. 밖에서 만나면 우재 귀에 들어갈지 모르니까 어쩔 수 없었답니다.”
송은효의 낯에 스민 긴장이 한층 선명해졌다.
“지금 우재 집에서 지내는 걸로 알아요. 우재가 알려 준 건 아니지만.”
“…네. 맞습니다.”
“은효 양. 직설적으로 얘기할게요. 이런 날 정말 미안하지만 달리 만나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송은효는 이어질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눈빛이었다.
“우재는 결국 제 큰아버지가 정한 혼담에 따르게 될 거예요. 우재와 한라그룹 입장에서 가장 밑지지 않을 만한 상대로 말이지요.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은효 양도 이해할 거라 믿어요.”
그 말만으로도 족했다. 송은효는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납득한 얼굴로 시선을 조금 떨궜다. 비굴하진 않지만 건방 떨지도 않는 태도엔 어떤 견고함이 엿보였다. 내면 속 쉬이 무너지지 않을 단단함이 여실히 느껴졌달까.
“잠깐 가볍게 연애하는 것까지 터치하고 싶진 않아요. 요즘 세상에 흠도 아니고. 하지만… 동거는 좀 다른 문제 같아요. 한 지붕 아래 한 살림 한다는 소문까지 퍼지면 곤란하죠.”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거처를 마련해서 나가겠….”
“이쯤에서 우재랑 정리해 줘요, 은효 양.”
기어코 송은효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리 예상하고 있었다 한들 직접 귀로 듣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미안해요. 남 얘기로 들은 적만 있지, 내 입으로 이런 시시한 소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우재의 부모나 다름없는 입장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걸 용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