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115
연록흔 – 115화
“곽우안은 쫓고 있나?”
“예, 허나 종적이 묘연합니다.”
하균이 대답하자, 부접들이 잠시 잔을 내려 두었다. 진광원의 리갈은 그대로나 록흔은 석연찮았다. 역당의 무리 중 그 하나만 잡히지 않았으니 썩 마뜩찮은 터, 어젯밤 곽아밀이 찾아온 뒤로는 그 생각이 더 컸다.
“신광준이 곽우안이었지.”
“예, 감쪽같이 덮어 상처를 없앴지 뭡니까?”
“음, 가조가…….”
“폐하, 곽아밀은 어디로 간다 했습니까?”
“은접을 찾아 떠났다. 청심의 본을 밝히련다 하더군.”
“그 아이도 함께인지요?”
가은은 이제 곽은이라 불려 그 아비가 거둬갔다. 아이에게 정 없다 야멸치게 말하던 얼굴이 떠올라 록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것이 무슨 죄랴 싶어 마음이 좋잖았다.
“은소현은 아마도 기시할 거 같습니다.”
유장이 조심스레 사뢨다.
“끝내 옹주라 하더이다.”
사강이 눈귀를 일그러뜨렸다.
“그리 알고 가게 두시라 폐하께 말씀드렸다.”
“어째 그러셨습니까? 그런 간부에게까지 측은지심 가지실 게 무업니까? 그 잔독한 것은 그예…….”
기리단이 목소리를 높였다. 흑면이 벌게진 참, 그는 상관이 겪은 바를 되씹는 듯했다.
“이미 잃었는데 더 앗아야 쓸까?”
“하지만 폐하, 그런 건 짐승이라!”
록흔이 나직이 하는 말에 창해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 나무에 그 과실입니다.”
가조의 아이도 은소현의 아이도 장차 화근이 될 터. 하균이 눈시울이 꼿꼿해서 하는 말에 사강이 거들었다.
“법이란 게 차라리 없었으면 합니다.”
“효이가 잔혹하나 열여섯이 못 된 아이는 거두지 않는다. 아직 애잎도 못 된 것들이니 그리 미워 마라.”
록흔이 잘라, 부접들도 더는 말을 못했다. 상관께서 품 넓고 속 깊으신 줄 익히 알았어도 저런 아량에는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인화전에 계시기엔 그저 아까우신 분이라 접힌 눈귀마다 그늘이 짙게 뱄다.
“그나저나, 하준.”
“예, 폐하.”
“호분중랑장 아직도 고사할 텐가?”
“그게…….”
하준이 우물거리며 얼굴을 붉히자, 록흔이 살폿 웃었다.
“아직도 부족하다?”
“아무래도 저는…….”
“너무 오래 비면 좋잖아……. 알 텐데.”
“예, 폐하.”
“허면 맡아라.”
“예?”
“적임자가 따로 없지 싶다.”
상관께서 주청하셔 이미 윤허는 떨어졌다. 그동안 미루기만 한 것이라 이 이상 사양함은 옳지 않을 듯싶었다. 하준은 그예 낯이 불그레해져 고개를 숙였다.
“아하, 오늘부로 고중랑장이로군. 한 잔 받으셔야지?”
아진이 어글어글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어언간 하준은 얼굴이 더 붉어져 그 잔을 받았다.
“율아, 저것 봐라. 사람꽃이란다.”
록흔이 연하게 속삭이자, 하준이 자두인 양 익었다.
“새색시 홍조로세, 어이 곱다.”
사강이 농하며 또 다른 잔을 채웠다. 그에 와 하고 터지는 웃음들을 록흔은 보드라이 휜 눈으로 보았다.
탁!
창!
“자, 거배!”
“좋다!”
수국 향 은은히 퍼져 율의 뺨을 간질이고, 록흔의 머리칼을 늘어뜨렸다. 꽃그늘 새로 숨은 이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니 예든 제든 정은 연연히 배어 있었다.
***
“어떠하냐?”
어둠 속에서 은빛 눈이 살천스레 번득였다.
“썩 이르지 않으나, 손쓸 도리 없이 늦은 것도 아니오.”
뾰족한 눈이 옆으로 길게 째졌다.
“이것저것 비듬하면 죄 모았는데, 골라 봐라.”
새된 목소리나 듣그럽지는 않았다. 원래 청이 그런 듯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들여라!”
“종명!”
철문이 커다랗게 열렸다. 그리고 일군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모두 손이 묶인 참, 어슷비슷 훤칠하니 어디서든 대장부라 불릴 만했다. 웃통은 벌거숭이라 견갑골도 늑골도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옆으로…….”
눈이 뾰족한 이가 말끝을 흐리자, 눈빛이 옅은 이가 턱짓을 했다. 야차 같은 거한이 손을 맵차게 쳐들어 사내들은 좌측을 향해 나란히 돌아섰다. 상완으로 하완으로 완골로 살천스런 시선이 긁듯 핥듯 스쳐 지났다.
“우선은 저것으로.”
가느스름한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선택한 이는 눈매가 얕고, 선택 당한 이는 눈이 흔들렸다.
“얼마든지 댈 테니 염려 말고 행하라.”
뉘가 뭐라 하건 말건 불투명한 눈은 오로지 한곳을 향해 있었다. 가늠하고 또 재니 그 빛이 엽렵했다.
“가까이 데려오너라.”
“예!”
거한이 움직였다. 그리고 뽑힌 사내가 냉상 위에 던져졌다. 찰나, 지금껏 내내 그림자인 양 섰던 이가 그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불빛 아래 도드라진 것은 뱀눈, 사악함이 그것을 닮았다.
“제발 이러지…… 크억!”
지익!
투걱!
차악!
일은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입이 막히고 팔이 잘렸다. 예리한 칼이라 뼈도 그저 끊어졌다. 피가 분출하여 사방으로 튀었다.
“잘 부탁한다.”
“그럭저럭 된다 치고, 색깔을 맞춰야하겠소만.”
사내에게서 떨어진 게 펄떡펄떡 뛰었다. 짙은 쇳내 너머, 둘의 시선이 얽혔다. 입술 붉은 이가 픽 웃었다.
“정 구하기 어려우면.”
소름 끼치게 고운 입술이 는실난실 벌어졌다.
“내 것은 못 줄까?”
그 대답을 바랐던지 뱀눈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 앞에서 나대는 팔을 덥석 움켜잡았다. 팔 잃은 사내는 극심한 고통에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샥!
칼이 파르랗게 빛났다. 염이 서렸던 것, 저번엔 거듭 실패했으나 이건 또 달랐다. 뾰족한 턱이 웃느라 크게 들렸다. 그 알기로 한과 원은 같지 않았다.
***
“아오…….”
“자, 율아. 옳지.”
아기는 물을 좋아했다. 다사함이 좋고 찰랑댐이 좋은지 손을 활짝 펴고 록흔을 향해 웃어 주었다.
“그렇게 좋으냐?”
“오옹.”
손안에 해를 담은 듯했다. 율이 함박 웃으면 록흔은 마음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연한 입술로 하는 그 말이 그저 예뻐 그녀는 아기의 뺨에 가만 숨을 묻었다.
“폐하, 이것으로…….”
신상궁이 부풋부풋한 깁을 내밀었다. 그 위에 내려놓자, 아기는 또 방싯거렸다.
“우리 율인 웃음보로구나.”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조그만 머리로 록흔은 물기를 구석구석 닦아냈다. 일찍 나왔어도 마굴에서 주렸어도 율은 탈 없이 자라주었다. 그것이 마냥 고마워 그녀는 짙은 시선으로 딸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문제없다 답하는 듯 아기는 조그만 입술을 쫑긋거렸다.
“폐하, 많이 젖으셨사옵니다.”
“율이 바동대서 그렇지.”
“어서 갈아입으셔야, 감모라도 드실까 두렵습니다.”
“이 정도로 아무렇잖아. 율아, 졸리느냐?”
“아니라 하시는데요.”
신상궁이 상그레 웃었다. 그녀 말마따나 율은 눈이 초롱초롱해서 잘 생각이 바이없는 듯했다.
“이리 주셔요. 폐하, 제가 재워 드릴게요.”
“아니, 내가 하마.”
“폐하, 감모 걸리시면…….”
“괜찮다.”
록흔은 율을 깁 채로 안아 들어 침상으로 향했다. 옷을 챙겨 입혀 요람에 누이니 아기는 그녀를 똑바로 올려 보았다. 노래 불러주세요 하는 눈, 별 같이 드맑고 반드르르했다.
“하나밖에 모르는데.”
“…….”
괜찮아요, 들을래요. 꼭 그리 말하는 듯, 율이 연한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질리지도 않아?”
“오아…….”
“아바마마껜 비밀이다.”
“오옹.”
록흔은 율의 연한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보얗고 말랑한 뺨을 가만가만 쓸었다.
하늘에 별은 많지만 나처럼 생긴 애는 하나 없어요.
아기 달님은 너무나 외로워서 밤마다 울었다는데
별도 구름도 모른 체하고 밤새도 그냥 지나갔대요.
맑진 음성이 침전에 은은히 퍼졌다.
어둔 하늘에 혼자 떠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기 달님은 부연 얼굴로 먼산바라기만 했다는데
산도 바다도 모른 체하고 생쥐도 그냥 지나갔대요.
통통한 손이 꼼지락거렸다. 반은 잠에 빠진 듯 점점 움직임이 느려졌다.
별은 찰랑찰랑 구름은 몽실몽실 밤새는 부우부우
울지 않고 잘 견디어 내면 어른 달님이 된다는데
바람은 차고 구름은 짙어서 그냥 무섭기만 했대요.
록흔이 뺨에 입술을 대자, 율이 하품 한 번 하더니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부챗살처럼 뻗어 연한 그늘 드리우매, 바라보는 이의 입술도 연삽하게 늘어졌다.
“별은 찰랑찰랑, 구름은 몽실몽실…….”
록흔의 숨결에 율이 눈을 감고 웃었다. 젖을 찾는지 통통한 입술이 오물거렸다.
“밤새는 부우부우…….”
율이 색색거렸다. 록흔은 딸애의 연한 머리칼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그것은 봄바람처럼 감겨 그녀의 눈에 이슬로 차올랐다.
“잠들었나?”
‘……!’
록흔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가륜이 문가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재우는 걸 다 본 모양, 그 눈이 짙게 갈앉은 채였다. 왠지 부끄러웠다. 행여 눈물이 뵐까 봐 그녀는 이불을 덮어 주는 척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살풋 흘러내린 머리칼 새로 뺨은 우련하게 붉었다.
“본체만첸가? 이제 아이가 제일이로군.”
“아, 아니요.”
귓전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있어, 록흔은 혀를 자그시 물었다. 가륜이 곁에 선 참, 그 숨결에 머리칼이 가분가분 날렸다.
“남더러 우지라 하더니…….”
가륜이 록흔의 눈가를 쓸었다. 눈물이 그 손끝으로 방울방울 돋아 흘러내렸다.
“그냥 장해서, 많이도 컸구나 싶어서요.”
“그래, 어여쁘고 기특하지.”
록흔이 한숨처럼 속삭이자, 가륜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끌어 당겼다. 숨결이 섭슬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아내의 눈물을 입술로 문질렀다.
“폐하…….”
록흔은 그저 불렀다.
“음.”
어언간 달싹 들어 올려져 록흔은 소천의 품 안에 있었다. 율은 요 람에서 잠이 든 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그 볼만큼이나 연했다. 오늘 하루 힘드셨을 터. 그녀는 정위국의 일은 부러 묻지 않았다. 다만 다슨 빛으로 올려 보았다.
“주침(오수)은?”
“율이 잘 때 잠깐 시들었어요.”
가륜이 눈을 가늘이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는 아니지만…….”
“아닐 텐데. 율인 살이 오르는데 넌 한줌도 안 되지 싶다.”
“몇…… 줌은 넉넉히 되어요.”
록흔이 볼우물을 잡으며 하는 말에 가륜이 눈시울을 자그시 좁혔다. 매일매시 드는 건 다행이란 생각, 아내를 볼 적마다 그는 안심하고 또 안심했다. 이리 잡히니 이리 뵈니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마저 불러 봐라.”
“어, 그게…….”
“흠, 율만 특별하지.”
가륜이 입귀를 실긋 비틀어 록흔은 고개를 저었다. 이내 ‘아니라면 불러 봐라’ 하는 눈빛이 바로 떨어졌다. 그녀가 입술을 버긋지게 벌리는데 부드러운 것이 등에 닿았다. 어언간 침상 위에 놓여 그의 시선 아래였다.
“내 침의는 지을 생각조차 안 하잖나.”
“폐하…….”
“하긴 율하고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 당연한가?”
“그게 아…….”
“우승상에게 물으니 아이 생기면 지아비는 뒷전이라던데.”
“예에?”
“좌승상도 그랬던가?”
록흔은 농인지 진담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천의 눈을 한참 응시했다. 깊이 든 것은 웃음, 분명 그 빛이었다.
“뉘가 그러길 사내는 애라더군.”
가륜이 이제는 드러나게 웃었다.
“내겐 노래해 준 적 없잖나.”
“잘 못해요.”
“듣기 좋았다.”
“그래도…….”
록흔은 입술을 감물었다. 목전에 소천이 있어 그 눈 닿으니 가슴이 또 우둔우둔 뛰었다. 그 시선에 옭아매진 듯 그녀는 꼼짝도 못했다. 가슴 앞으로 묶인 끈이 사락사락 풀렸다. 그제야 그녀는 제가 젖은 것을 알았다. 아기를 씻기고 또 안았던지라 가슴께가 더 축축이 달라붙어 있었다.
“밤새는…… 그다음은?”
하얗게 드러난 가슴 위에서 가륜이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 가슴 끝이 꼿꼿이 일어섰다.
“……눈물 삼켜 섬섬초월로.”
록흔이 애잔하게 답했다. 흐린 노랫소리가 도홍빛 입술 새로 엷게 흘러, 가륜이 음파 하나까지 잡아챘다. 입술을 겹치고 혀를 겯고 숨을 넘기고 그는 그녀에게 그리 깊었다.
“……무서움 참아…….”
노래도 숨결도 자신의 것이었다. 가륜은 심해처럼 깊은 눈으로 록흔을 내려 보았다. 이 밤에 아내를 안고 싶었다. 그간 참았던 것, 이제 한계였다. 그는 설백으로 솟은 젖가슴을 그러잡았다. 그리고 가냘픈 몸에 감긴 것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렸다.
“록흔, 잠들 것 같지 않다.”
가륜이 탁하게 읊조리는 말에 록흔은 온몸이 우련 붉어졌다. 그녀는 도홍으로 익어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그러면…….”
록흔이 한숨인 양 속삭여 가륜이 몸을 일으켰다. 온밤 내내 곁에 있겠다는 말, 가슴에 금빛으로 와 박혔다. 아내는 항시 신월이었다. 반월이 될지라도 만월이 될지라도 처음 만나던 그때와 같을 듯했다. 그는 격식 갖춰 차려입은 의장을 차례로 풀어헤쳤다.
“아무래도 널 울릴 거 같은데.”
“괜찮아요, 전.”
가륜은 록흔의 뺨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그간의 갈증은 잊은 듯 느릿하고 깊게 그녀를 빨아들였다.
차악.
휘장이 늘어졌다. 침상 안은 오롯이 둘, 세상이란 바이없었다.
***
봄꽃이 갈꽃이 여섯 차례 피고 졌다. 그동안 청죽원의 대나무는 생존을 계속해 누르던 것이 이제는 푸르렀다. 척박한 토양과 질긴 잡초들과 싸우고 이겨, 신생죽은 가느다라나 결코 약하지 않았다. 댓줄기가 배게 서고 댓잎이 무성히 맞결리어 울울창창하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나 장하고 어여뻤다. 듬성듬성하여 가냘픈 저것은 스스로 죽음을 이겨낸 터, 록흔은 축축한 바닥에 파란 손을 비죽이 내민 두릅을 내려다보았다.
“어마마마, 이건 뭐예요?”
율이 눈을 또랑또랑 빛내며 푸른 잎사귀 하나를 가리켰다. 이제 여섯 살, 록흔에게는 저보다는 소천의 모습이 더 많은 딸이었다.
“어디 보자, 이거 멍석딸기로구나.”
“딸기요?”
“응, 조금 있으면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거다. 여느 딸기처럼 달금하고 맛있지.”
“그럼, 이건요?”
율이 이번에는 이리저리 얽힌 덩굴손을 가리켰다. 아직은 아기 티가 많아 하얀 손이 포동포동했다. 동그란 눈에 어린 웃음도 아직은 애어려 록흔은 보드란 눈으로 보았다. 호기심이 왜 저리 많은지 요즈음 모든 말이 묻는 것 일색이었다. 그녀는 딸애의 손을 잡고 낮게 앉았다. 파릇하게 깔린 것들, 그저 보면 같아도 나름 생김이 달랐다. 초록으로 숨탄것이라 하나같이 연하니 곱다랬다.
“그건 새머루…….”
“열매가 열려요?”
“그렇지. 까만 보랏빛 열매가 열리는데 그건 약으로도 쓴단다.”
율이 두 눈을 드맑게 부풀렸다. 모든 게 신기한 모양, 아이는 마치 해면 같았다. 그 딸이 귀여워서 록흔은 살폿 웃어 버렸다.
“어마마마는 뭐든 다 아셔요. 모르시는 건 하나도 없고.”
“설마, 그러려고?”
“아닌데, 이때껏 모른다 하신 적 없어요.”
“그건 내가 우리 율이만 했을 때…… 그때…….”
록흔이 막 복륭사 이야기를 꺼내는데 율이 반짝 웃었다. 그녀보다 그 너머를 보는 듯, 어언간 짙은 그늘이 둘 위로 드리워졌다.
“아바마마!”
율이 뽀르르 달려갔다. 가륜이 저 앞에 있어 록흔은 눈이 연해졌다. 두 그림자가 하나로 섞이는 참, 딸애와 소천을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부듯하게 차올랐다.
쉬이익!
서늘한 바람이 일어 대숲을 훑고 연둣빛 치맛자락을 슬쳤다. 록흔의 귓전에서 금빛 타니가 달랑였다.
사삭사삭!
댓잎이 부스대는 소리가 맑졌다. 그 푸름에 보요 끝의 떨새가 취옥빛으로 빛났다. 록흔은 눈귀를 연삽하게 좁혔다. 저 앞에 가륜이 율을 안고 선 참, 그녀가 미소 지어 부녀가 닮은 눈빛으로 웃었다. 상깃상깃한 죽엽 새로 들이친 햇발 아래에서 소천도 딸애도 모두 빛으로 빚은 것만 같았다.
“장인태감께 들었는데 틈 없이 바쁘시다고…….”
“없긴, 만들면 되는 것을.”
가륜이 빛접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헤아릴 수 없이 잡았어도 설레는 것, 록흔은 그 온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 지나는 곳마다 쪽물이 푸릇푸릇 깨졌다. 두 손이 얽히자 율이 볼우물이 쏙 패도록 웃었다.
“황후께선 뭘 하고 계셨나?”
소천의 날캄한 눈에 깊이 밴 건 정이었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몹시 다사해 록흔은 그 빛을 마주 보았다.
“율이 여길 좋아해요.”
“어마마마도 그러셔요.”
록흔과 율이 거의 동시에 말하자, 가륜이 싱긋 웃었다. 그는 아내의 뺨을 어루만지다 고개를 숙여 연연히 고운 향을 들이마셨다.
“힐은?”
“아, 안에 있어요.”
율의 뺨에 보조개가 더 깊어졌다.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 앞에서 말을 더듬으시거나 뺨이 붉어지시면, 아이는 저도 몰래 그리 깊다랗게 웃었다.
“할머님께서 오셨나?”
“예…….”
율이 앞이니까 하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가까웠다. 록흔은 가륜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딸이 토끼처럼 웃고, 소천께서 놀리는 빛인 것은 보였다.
“차 마시려던 참인데…… 같이 가시…….”
“어마마마, 복숭아 같아요.”
“그렇구나, 곱답다.”
록흔이 한 발 물러서려는데 가륜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그 귓가에 그녀만 닿게 속삭였다. 율이만 없었으면, 그 소리만 또렷하게 돋아 등줄이 갉힌 듯했다.
“아바마마, 아까 어마마마 필사하실 때 먹을 갈아 드렸어요.”
“기특한데.”
“그리고 색실도 골라 드리고요. 또 검…… 검은색으로 시를 수놓았는데……. 저는 아직 못해도…….”
검이란 말을 율이 재빨리 사리자, 가륜이 눈귀를 치올렸다. 딸애가 조그만 머리통을 졸래졸래 흔들며 조잘대는 와중에도 그는 록흔을 곧게 응시했다. 그에 그녀가 연삽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한 말은 그새 잊고 아이는 쉴 새 없이 반나절 동안 한 일을 읊어댔다.
“아바마마, 그런데요.”
율이 갑작스레 말을 끊고 눈을 호동그레 부풀렸다.
“제가 검 배운다면 싫으세요?”
“왜, 배우련?”
“으응. 어마마마처럼 되고 싶어요.”
“어찌 보이기에?”
“천녀처럼 고우신데, 호류무 오라버니처럼 강하셔요.”
“아가, 네 어머니가 그보다는 훨씬 강하다.”
“어어……?”
율이 입을 벙긋벙긋했다. 아이는 까막까막하는데 가륜이 실긋 웃었다.
“자, 가율. 저 앞에 네 아우가 보이는데.”
“힐아!”
땅에 발이 닿자마자 율이 세죽관을 향해 달렸다. 아이가 달리는 대로 연한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연록이 그 연한 바람대로 살랑댔다. 록흔이 푸릇한 눈으로 보는데 가륜이 그녀의 어깨를 훔켜잡았다. 창졸간에 안겨 그녀는 숨을 앗겼다. 짧지만 격한 입맞춤, 그녀는 그에게 급히 스몄다.
“폐하, 할머…….”
“탕감 안 된다고 했잖나.”
가륜이 록흔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상처 나지 않을 만큼만 자긋자긋, 그러나 이미 짙붉었다.
“해 지면 그때…….”
록흔이 흐린 숨으로 속삭였다. 그에 가륜이 어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조만간 시안으로 가야겠다. 율도 힐도 떼어놓고.”
시안에는 여름궁전이 있었다. 그러나 피서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 록흔은 볼이 붉어졌다.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가륜이 그녀의 턱을 잡아 양 입귀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귓불을 물어 당겼다.
“거기서는 어머니라는 건 잊고, 내 아내로만 있어.”
이젠 익을 때도 됐건만, 소천 앞에서는 심장이 제멋대로였다. 록흔은 목덜미까지 도홍으로 익어 고갯짓만 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율이 불렀다.
“어서요!”
가륜이 입귀를 실긋 틀었다.
“록흔.”
“…….”
록흔은 눈만 사분히 들었다. 댓잎이 비쳐 연빛 눈이 유난히 푸르렀다.
“율이 널 그대로 닮았다.”
“저보다는 폐하를 더 많이 닮았는걸요. 다른 이들도 그리 말하고, 제 보기에도 그래요.”
“글쎄, 너 요만할 때 생각하면.”
가륜이 손을 내렸다. 저만한 크기면 복륭사던가? 록흔은 명부전에 선 듯 맑진 눈으로 소천을 응시했다.
“재잘재잘 아기 새 같았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세요?”
“음. 반작반작 빛이 났었다.”
가륜이 록흔의 손을 잡으며 실긋 웃었다. 다행이란 말을 문득문득 되뇌니, 그녀는 얽힌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마음일랑 깊어지고 넓어져, 저 빛 잃지 않았으매 나날이 안온했다.
“어마마마, 힐이가 어서 오시래요.”
힐은 태후가 안아 어르고 있었다. 율이 들여다보는 중, 아기는 록흔이 곁에 오자마자 입을 쫑긋 내밀었다. 옹알대고 방긋대 젖살 오른 뺨이 통통했다. 아직 한 돌이 채 못 되어 옹알이는 오롯이 제 어머니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기는 햇발처럼 미소 지었다.
“우리 태자, 어마마마 오시니 좋습니까?”
반달눈에 가시주름살이 깊어 그 골골이 정이 담뿍 배어 있었다. 태후가 보드라이 묻자, 힐이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입을 오물거렸다.
“힐아, 우리 예쁜 힐이.”
율이 제 아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못내 안아 보고 싶은 듯 반작대는 눈이 별만 같았다. 그에 힐이 볼을 부풀리며 방긋 웃었다. 아마도 누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
“한 할마마마, 저도 안아 보고 싶어요.”
“아직 율이 어려서 안 되느니.”
“한 번만요.”
태후는 짐짓 엄하게 말하며 웃음을 참았다. 어린것이 졸라대는 게 그저 어여뻐 부러 고개만 설레설레 내둘렀다.
“황상, 파류가 또 좋은 차를 보냈지 뭡니까? 단지 열자마자 이리로 가져왔어요. 안으로 드십시다.”
그 말마따나 차 달이는 내가 향긋했다. 가륜이 그러마 하고 록흔의 어깨를 안아 안으로 들어서자, 태후도 그 뒤를 따랐다. 힐은 신상궁이 안아 든 참, 율은 그 곁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율아.”
문께서 가륜이 부르자, 율이 고개를 갸울이며 해죽 웃었다. 귀염 많은 딸이라 그는 입귀를 부드럽게 늘였다.
“곧 벗이 올 거다.”
“벗이요?”
“음.”
“와, 신난다!”
“힐이 잘 보려무나.”
“예, 아바마마!”
율이 싹싹하게 대답하자마자 가륜 역시 유리문 너머로 온전히 들어갔다.
“신상궁.”
“예, 공주마마.”
“나 힐이 한번 안아 보면 안 돼?”
“아직은 안 되셔요. 공주마마 드시기엔 좀 무겁답니다.”
“그럼 언제 되는데?”
“공주마마 좀 더 자라시면요.”
신상궁이 상냥하게 대답하는데 율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럼, 난 영영 못 안아 보겠다.”
“예에?”
“나 자라면 힐이도 자랄 테고, 그리 미루다가 언제 안아 볼까? 신상궁이 좀 도와주면 될 텐데.”
공주 아기씨께서 하신 말씀에 신상궁은 혀를 내둘렀다. 장난기 많으신 듯해도 문득문득 날캄하셔 그녀는 놀라곤 했다.
“예, 공주마마. 그러면 제가 받쳐 드릴 테니…….”
“응.”
율이 그예 힐을 안았다. 아우에게 나는 건 젖내, 그리고 어마마마 향기……. 아이는 아기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말랑말랑 보들보들 통통한……. 맑진 눈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동생……. 도홍빛 입술이 벙긋 열렸다.
“힐, 가힐.”
아기가 두 개 솟은 앞니를 드러내며 방긋거렸다. 사이좋은 오뉘를 신상궁은 반드레한 눈으로 보았다.
타각.
죽근이 밟히는 소리였다. 율은 저도 몰래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사내애가 저만치 선 참, 처음 보는 애였다.
“공주마마!”
“금방 올게.”
율은 한걸음에 대숲 그늘로 들어섰다. 사내애는 그 자리서 미동 없이 서서 지켜만 보았다. 마치 그래 주기를 기다렸던 듯 율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 누구냐?”
“…….”
사내애는 율이 지금껏 보아온 어떤 애들보다 예뻤다. 황친의 아이도 대신의 아이도 저리 생기지는 않았었다. 그 눈이 슬프매 율은 입귀에 힘을 꽁 주었다. 서늘한 대숲 새로 바람이 일었다. 그에 아이의 머리칼이 연하게 날렸다.
“이름이 없어?”
“……가율.”
“정말?”
율이 외마디로 묻자, 사내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께서 내 어릴 적 이름이라 하셨어.”
이상한 애였다, 모두 하는 경대도 안 하고 이름도 따로 있는 것 같고. 율은 고개를 갸웃대다 방긋 웃었다. 아마도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신 벗인 모양, 더는 의심치 않았다.
“그래? 우리 이름이 같네. 나랑 친구 할래?”
율이 볼우물을 잡고 웃자, 사내애가 밝은 빛이라도 본 듯 눈을 가늘였다. 그건 슬프고도 예쁜 눈이었다.
“친구?”
입에 설고 귀에 선 양, 사내애가 천천히 발음했다.
“응! 이름도 같은데 친구 하자.”
율이 드밝은 눈으로 보자, 사내애가 눈귀를 우그렸다. 한참 동안 둘은 바라보기만 했다. 율이 채근할 때까지 사내애는 말이 없었다.
“싫어?”
“아니, 그건…….”
“자.”
“……!”
율이 손을 내밀어 율이 그 손을 주저하며 잡았다.
“지금은 이름이 뭐야?”
“진류.”
사내애는 목전에 어린 빛을 보았다. 아이 없는 파류 공주가 거둬 작금은 그저 진류이나 어릴 적엔 국저라 불렸었다. 아비는 가조, 어미는 서린, 저는 몰라도 어른들은 그리 쉬쉬하며 대했다. 아이는 소후모(양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제가 지녔던 무게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너 웃으면 더 예쁠 텐데.”
진류는 율에게서 빛을 보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라 가지고 싶었다. 대숲에 이는 바람이 서늘하고 맑았다. 신생죽 옆에서 소녀 가율, 소년 가율과 조우했다.
“어머니께선 잘 계시고?”
“예, 황후 폐하.”
“꽤 몸이 무거우시겠구나.”
“예. 이걸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일곱 살 범원, 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다. 갓난이 때는 말랑말랑하더니 어린것이 바위 같은 구석이 제법 있었다. 록흔은 저 혼자 고개를 갸울였다. 자라면 크게 한몫할 터. 아이에게서 진양후의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곱구나.”
이설은 세 번째 아이를 가져 함께 오지 못했다. 대신 아들 손에 들려 보낸 것은 연록이 하르르한 대수삼, 천의무봉인 양 맵시 있게 지은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제게 황후 폐하 말씀을 가끔 하십니다. 뵙고 싶으시다고, 다음에는 같이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소천께 전해 듣기론 진양후가 내자에게 지극 끔찍하다 했다. 이설이 서간으로 간간이 말하는 것도 그저 행복이었다. 록흔은 보드란 눈으로 조카 같은 아이를 보았다.
“범원.”
록흔이 손짓하자, 원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현국 황제가 막내딸의 부마로 점찍었다던가? 아직 어리나 늘품 있고 준미했다. 부전자전이라니 사내 중의 사내로 자랄 터. 그러나 그녀에게는 갓난이처럼만 뵀다. 태어나기까지 곁에서 지켜보아 그러는 듯싶었다.
“많이 자랐구나.”
“황송…….”
율과는 딴판이었다. 의젓하게 구는 게 귀애스러워 록흔은 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가 볼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는데 미향이 돋았다. 이설을 닮았구나, 순간 든 생각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마마마!”
서실 문이 빠끔 열렸다. 그 틈으로 율이 얼굴을 내밀고 햇살인 양 웃었다.
“율이 왔구나.”
“어…….”
율은 어마마마 곁에 선 사내애를 보고 눈을 치떴다. 저렇게 가깝게 가는 건 저여야 하는데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어언간에 입을 내밀었다.
“이리 와서 인사하렴. 원이 오라버니시다.”
“오라버니요?”
“네 생일 때마다 이설 이모님께서 고운 옷 지어 보내셨잖느냐.”
이설이란 이름에 율은 다시 눈이 말랑해졌다. 어마마마께 듣기만 해도 그냥 좋은 분, 아이는 노느라 더러워진 손을 치마에 문지르고 한 발 두 발 가깝게 다가섰다.
“공주마마.”
“오라버니…….”
범원이 깍듯이 예를 갖추자, 율은 볼이 발개졌다. 록흔은 웃음빛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맏이라 저보다 손위이면 정답게 구는 아이가 딸애였다. 제자리에 있다 밉게 여기던 빛은 이제 흔적도 없었다.
“율아, 아바마마께서 벗이 올 거라 하셨지?”
“어, 그럼……?”
록흔은 딸애가 시선 돌린 곳을 바라보았다. 비긋이 열린 문 너머에 미처 들지 못한 이가 있었다.
“율이는…….”
“응?”
“제 동무예요. 율아, 들어와.”
율이 불러 문 그늘에 섰던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마마, 쟤도 가율이래요.”
파류 공주가 태화성에 왔다 했었지. 록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를 거두겠다 읍소했던가? 그녀는 눈을 가늘였다. 아이에겐 그 아비를 닮은 구석이 별로 뵈지 않았다. 숨은 듯이 키우겠다 하였는데……. 아이는 제 어미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밤에 보았던 대로. 그녀는 애참함에 눈시울을 좁혔다.
“아가, 네 어머님이 파류 공주시더냐?”
“예, 황후 폐하. 저는 진…… 류라 하옵니다.”
진류가 고개를 숙이는데, 범원이 한 발 나섰다. 날선 눈이 진양후와 같아 어린것이라 보기 어려운 호기였다.
“어느 쪽이 진짜 명이냐?”
진류는 원을 보고 율을 보고 마지막으로 황후라 불리는 분을 올려 보았다. 섧게 빛나는 눈에 담긴 것은 그리움이었다. 청죽원에 숨어들어 뵈었을 때 눈물이 났었다. ‘어머니’란 말이 계속 혀끝에서 맴돌았었다.
“아명일 테지.”
록흔이 잘라 말하자, 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가 보기에 뭔가를 감싸는 것만 같았다.
“율아, 모두 네 손님이다. 잘 대접할 수 있겠느냐?”
“예, 어마마마.”
율이 반드레한 눈으로 웃었다. 자라면 어마마마처럼 돼야지, 아이는 뵐 적마다 생각했다. 제 곁에서 사내애 둘이야 어떤 빛이든지 상관 않고 해바라기하는 참, 신상궁이 들어와 다과 준비가 되었으니 화원으로 납시자 아뢨다.
“예 정리하고 곧 가마.”
“응.”
아이들이 나간 후, 록흔은 서궤에 놓인 책을 폈다.
“검수죄옥을 지났으니…….”
언젠가 소천께서 말씀하신 책이었다. 진광원 서고 구석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것, 한수 말로는 이것이 저 혼자 이동을 한다 했다. 표지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고 반 이상은 빈 종이였다. 이 안에서, 이름 없는 사내는 이름 없는 여인을 찾아 그리 먼 길을 헤맸다. 책장 넘길수록 연빛 눈이 짙어졌다. 바람이 건듯 일어 그 눈귀를 보드라이 스치고 지나갔다.
“꽃잎 바스러지듯 그 아내 또한…….”
도홍빛 입술이 잗다랗게 여닫혔다.
하늘에 별은 많지만 나처럼 생긴 애는 하나 없어요.
아기 달님은 너무나 외로워서 밤마다 울었다는데
별도 구름도 모른 체하고 밤새도 그냥 지나갔대요.
어둔 하늘에 혼자 떠 있으면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기 달님은 부연 얼굴로 먼산바라기만 했다는데
산도 바다도 모른 체하고 생쥐도 그냥 지나갔대요.
별은 찰랑찰랑 구름은 몽실몽실 밤새는 부우부우
울지 않고 잘 견디어 내면 어른 달님이 된다는데
바람은 차고 구름은 짙어서 그냥 무섭기만 했대요.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빗물 돋아 흐린 밤에도
엄마 달님 그리면서 입술 꾸욱 물고 참았다는데
산도 들도 뵈지 않고 논도 밭도 아슴아슴했대요.
초하룻달 아기는 눈물 삼켜 섬섬초월로
초승달 아기는 무서움 참아 반달음에 상현이 되고
반달 아기는 토실토실 실히 부풀어 환한 보름이니
별 총총한 밤하늘에 저처럼 생긴 애 하나 없어도
이울고 이울어 사위고 사위어 가늘게 여윌지라도
무섬일랑 그예 버리고 고독일랑 그예 이겼다지요.
갈고리달 그믐달이 되고 깜장달 합삭이 될지라도
여위어도 다시 살 오르고 살 올라도 다시 여위니
우리 아기도 아기 달님 닮아 어여삐 자랄 테지요.
-월적요, 남협-
-환-
마침
재련 후에
밀레니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호회에서 가장 먼저 연재했던 나센은 아직 하드에 있고, 이프(If)는 혜잔의 향낭으로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단팥빵, 바리공주 이야기, 연록흔……. 모두 그 즈음에 시작했던 글들이다. 2000년 6월 이전까지 글을 쓰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냥 읽는 게 제일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옛적이 정말 좋았다.
연록흔은 2002년에 처음 출간이 됐었다. 총 세 권, 깜냥껏 열심히 썼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다. 그 뒤로 5년이 넘어서 재련을 내놓았다. 총 다섯 권, 분량이 엄청 늘었다. 신국판으로 치자면 전의 것보다 지금 것이 두 배하고 이백여 쪽이 더 많다. 보통 개정증보판이란 말이 있는데 난 재련이란 말이 쓰고 싶었다. 내겐 의미 있는 작업이었고 그래서 작게 덧붙여 달라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저러한 의미로 재련이 쓰이지는 않았다.
왜 재련을 내놓았나? 그렇게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확실한 건 2002년 판이 못나고 미워서 그런 건 아니다. 짐작하시는 이유도 다 아니고, 다만 혼자만 사리려고 한다. 부끄럼 없이 할 수 있는 말, 쥐 소금 먹듯이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내가 가진 것만큼은 다했다.
나는 정식으로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작법책 또한 읽어 본 게 없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께 배웠던 맞춤법이 전부다.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건 내가 모르는 건 쓸 수가 없다는 것, 그게 내 눈앞에 뵈는 것처럼 쓰였으면 좋겠다는 것……. 오감이 살아 있어야, 나는 그게 눈앞에 보인다. 그래서 읽으시는 분들께도 그게 보였으면 하고 바란다. 책도 보고 영상물도 많이 보는데 늘 부족하다. 재련 작업하면서 참고문헌 역시 배가 들었다. 그러나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각설하고 절대자료가 되어 주실 분, 어디 안 계신가? 아시는 것 좀 나눠 주셨으면, 그러면 힘이 크게 될 듯하다.
책날개마다 밝혔듯 나는 이야기꾼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게 꿈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면 일단,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 신이 나 있다. 연록흔을 두 번째로 달구어 불릴 때도 그랬다.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 재미있으면서 그것만은 아닌 다른 게 있는 이야기가 좋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그랬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제 소금 먹기는 다했으니, 다른 걸 먹어야겠다. 항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2007년 8월
온고을에서 한수영
_곁에 있어 늘 힘이 되어주시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든든한 내 동생들.
_그 존재만으로 든든한 은영 언니, 민지 언니, 나영 언니, 선화 언니, 쭈영이, 현정이를 비롯한 꿈집 식구들. 경화님, 천사 언니, 그리고 C.
_도움 주신 마야 출판사 사장님, 은아님, 의정님, 현경님.
_항상 조용히 그 자리에 계신 고마운 임들.
_비패(悲貝) for 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