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92
16화. 아무래도 그렇지?
“이게 뭔…….”
순간 말문이 막힌 임대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차원 허브를 돌아다니며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을 보아 온 그였지만, 릴리의 새로운 집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손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릴리의 행복하고 맛있는 집이에요-!]건물 안으로 들어온 순간, 녹음된 릴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의 집이라기보다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작은 성이었다. 성벽은 잘 구운 와플처럼 생겼고, 성의 첨탑은 아이스크림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지나온 정문은 폭신폭신한 식빵처럼 생겼는데, 버터를 발랐는지 반질반질한 윤기가 흘렀다.
콰콰콰콰-!
초콜릿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를 지나자 침샘을 자극하는 익숙한 튀김 냄새가 풍겼다.
“……치킨?”
날개가 달린 치킨박스들이 파닥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설마 진짜 치킨이 들어있는 건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도 드론이었다.
“아하하! 지구가 아닌 곳에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부터 평범한 집은 아니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역시 릴리다운데요?”
백영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그녀는 연신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반면 임대인은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집이 장난이야? 무슨 장난감 성을 만들어 놓고……. 잠깐만. 적용된 기술들은 뭐가 이렇게 많아?”
임대인의 예리한 기감에 릴리의 성에 숨겨진 다양한 기계들과 마력포, 전투형 아티팩트 등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동화에 나오는 과자 집처럼 예쁘게 생겼지만, 실상은 거대한 최신 기술이 집대성된 요새나 다름없었다.
‘단독 기동은 물론이고 변신 기능까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차원 허브의 마법 기술과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한 달 만에 이만한 물건을 완성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하! 독립하겠다고 해서 참견 안 하고 그냥 뒀더니 이동형 전투 요새를 만들었어? 이 바보 꼬맹이가…….”
“진정 좀 해요.”
임대인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가득하자, 백영희가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릴리가 이런 집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해 보라고 허락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언제는 독립하려는 게 대견하다면서요? 조용히 지켜봐 줄 거라면서요? 그리고 변신 로봇 좋아하는 건 대체 누굴 보고 배웠다고 생각해요?”
“흠흠.”
아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자 임대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그의 비밀 창고에는 변신형 탑승 로봇이 여러 대 있었으니까.
백영희가 싱긋 웃으며 임대인에게 팔짱을 꼈다.
“좋은 날에 괜히 잔소리하지 마요. 알겠죠?”
“……알았어.”
멋쩍은 표정으로 한숨을 쉰 임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릴리의 독립을 축하하는 자리이니만큼, 제대로 축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그들은 릴리가 집들이 파티를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웬만한 공원만큼 넓은 마당에 뷔페처럼 수많은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고, 하늘에는 여러 색의 풍선들이 떠 있었다.
“어서 와!”
그리고 중앙에선, 하얀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릴리가 활짝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두 사람을 발견한 릴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시는 길이 멀었죠? 외투는 저한테 주시겠어요?”
“꼬맹이가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자, 집들이 선물이다.”
피식 웃은 임대인은 아공간을 열어 집들이 선물을 꺼냈다. 백영희와 함께 고른 옷과 모자, 가방과 신발이었다.
“너무 예쁘다!”
릴리는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하나하나 몸에 대 보기도 하고, 써 보기도 하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릴리를 보며 흐뭇해했다.
집들이 파티에는 릴리의 또래 친구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인이닷!]“늦으셨네요 사장님!”
장영신, 쿠로다마 신, 통통한 눈눈이, 소신한, 웬디와 WHA에서 사귄 안나도 와 있었고.
우끼끼끼!
캬아아앗!
“사형? 말랑이까지 데려왔어?”
이미 잔뜩 취한 금오는 물론이고, 모종의 마법을 사용했는지 크기가 평범한 아나콘다 수준으로 작아진 말랑이도 있었다.
아부우! 아붓!
말랑이가 작아져서 만만해 보였는지, 아부우는 그 등에 말처럼 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삼촌이 목말을 태우고 조카와 노는 것처럼 보였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마음껏 먹어!”
“진짜 어디서 본 건 많아서…….”
릴리가 상다리가 휠 정도로 준비한 음식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임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이걸 한 달 만에 지었어? 아무리 요즘 기술이 좋아도 그렇지…….”
돈과 재료가 충분하더라도 웬만한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임대인의 의문을 느꼈는지, 릴리가 두 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말했다.
“인맥을 활용했지! 영신 오빠가 많이 도와줬어!”
“……요즘 시간이 좀 남아서요.”
장영신이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우쭐한 표정을 짓자, 그게 아니꼬웠는지 쿠로다마 신이 끼어들어 견제를 했다.
“집의 동력원이 되는 주재료는 제가 구했어요.”
“……가공도 못 하는 주제에.”
“뭐? 주제에?”
두 소년이 서로 잡아먹을 듯 쏘아보며 티격태격하는 것을 뒤로하고, 다른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집들이를 즐겼다.
‘꼬맹이가 진짜 독립을 하다니……. 이제야 실감이 나네.’
임대인은 집들이 손님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릴리를 지켜보며 묘한 감흥에 빠졌다.
왕구호의 집에서 지낸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독립보단 친척 집에서 놀다 오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집을 짓고 집들이에도 참석하자, 비로소 릴리가 완전히 독립해 버렸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꼬맹이. 만약 혼자 사는 게 지겨워지면 언제든…….”
그때 임대인의 눈에, 장영신과 쿠로다마 신, 웬디 등이 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쓸쓸함과 허전함이 담겼던 임대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들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려고?”
“그, 저희도 이제 성인이라…….”
웬디가 사소하게 반박을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금나수로 꼬마들의 술을 빼앗은 임대인은 그걸 전부 금오에게 주었다.
우끼끼끼!
신이 난 금오를 뒤로하고, 임대인은 단호한 어조로 소년·소녀들에게 경고했다.
“너희가 내 앞에서 술 마시기엔 백 년은 이르다. 어딜 감히 어린 것들이 어른 앞에서.”
“…….”
그러자 릴리가 아부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봤지? 아저씨도 엄청 꼰대라니까.”
아부우?
“꼬맹이. 설마 너도 술을 마시려는 건 아니지?”
“난 이거 마실 건데?”
릴리가 손에 든 와인잔을 임대인에게 보여줬는데, 냄새를 맡아 보니 논알코올 와인이었다. 사실상 주스랑 다를 바가 없었기에 임대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뭐, 이 정도는 봐주지.”
그리고 때마침 왕구호와 김민재, 백창수가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함께 도착했다.
“이사 축하한다, 릴리야! 독립이라니 어른이 다 됐네!”
“집이 엄청나게 좋은데? 못 했던 게임들 들고 왔는데 어디다 둘까?”
“사위는 왜 애들을 혼내고 있나?”
덩치가 큰 세 사람이 들어서자 마당이 꽉 찬 느낌이었다. 릴리가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환영해! 맛있는 거 잔뜩 먹고 가!”
왁자지껄한 집들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집들이가 거의 끝나 갈 때쯤, 릴리가 백영희에게 물었다.
“근데 아기는 언제 나와?”
“아직 많이 남았어. 한참은 더 있어야 만나 볼 수 있을 거야. 한번 만져 볼래?”
“……그래도 돼?”
백영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그녀의 배로 가져다 댔다.
아직은 임신 초기여서 육안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의 예민한 감각은 그 안에서 태동하는 작은 생명을 느꼈다.
“신기해…….”
“빨리 만나 보고 싶지?”
“응!”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릴리가 백영희의 배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야. 너도 재밌게 놀다가 가. 그리고 엄마아빠랑 자주자주 놀러 와. 알았지?”
임대인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어서였다. 그가 아쉬움에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스승님이랑 아스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보통 사람들과는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일까, 신혼여행을 떠난 천무극과 아브락사스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임대인은 말랑이의 등에 올라탄 아부우의 턱을 살살 긁어 주며 중얼거렸다.
아부우-!
“대체 신혼여행을 얼마나 즐기고 있으면 애까지 맡겨 두고 말이야. 돌아오면 한마디 하든가 해야지…….”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했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진동에 임대인은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우우우우웅-!
“꼬맹이. 저거 설마…….”
“응! 내가 초대장이랑 주소 보냈어!”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게이트가 열리더니, 천무극과 아브락사스가 나타났다.
“으하하하하하하! 모두 잘 있었느냐!!”
[다들 모여 있었네? 어머나. 우리 꼬마도 많이 토실토실해졌잖아?]아부우우우우웃!
아부우가 자신을 맡기고 홀랑 여행을 떠난 부모에게 설움 어린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부모의 화통한 선물 세례였다.
“자, 차원 허브를 돌아다니면서 뜯어낸, 아니 선물로 받은 물건들을 가져왔느니라!”
[집들이 선물로 줄게.]그들의 등 뒤로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게이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화와 선물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천마와 드래곤 로드의 화통함을 보여 주는 선물 증정이었다.
“……저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이건 거의 폭격이잖아요!”
“피, 피해!”
다들 황급히 실드를 펼치거나 무공으로 쏟아지는 금은보화를 피해야 했다. 그야말로 황금의 소나기였다.
“아하하하하!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 엄청난 선물 공세에 릴리는 폭소를 터트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집들이였다.
“모두 모두 자주 놀러 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백영희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다.
* * *
“자네.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되나?”
“장인어른이야말로 좀 가만히 계시죠. 정신 사납거든요?”
“지금 내 딸이 애를 낳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지금 제 아내가 아이를 낳고 있습니다만!”
두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복도를 오가다가 서로를 째려봤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자꾸만 크게 심호흡을 하는 모습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각각 차원 허브의 관리자와 최강의 초인이라 손꼽히는 이들이었지만, 아내이자 딸의 출산 앞에서는 보통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혼자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릴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희 언니두 초인이야. 너무 걱정할 필요 없거든? 그리고 둘이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언니한테 방해되면 어떡하려구 그래!”
“크흠…….”
“흠흠…….”
이 자리에서 가장 어린 릴리가 가장 어른스럽게 말하자, 두 사내도 민망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초조하게 손톱만 잘근잘근 깨물 뿐이었다.
“하지만 영희가 들어가고 시간이 벌써…….”
“너,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닙니까?”
“들어간 지 5분밖에 안 지났거든?”
“흠흠…….”
“크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 사내에게는 마치 수십 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났을 때,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순산하셨습니다. 아주 예쁜 공주님이에요. 산모도 아주 건강합니다.”
“아…….”
“하…….”
긴장이 탁 풀린 백창수는 의자에 주저앉았고, 임대인은 눈을 감은 채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임대인은 자신의 아이를 처음으로 안아 보았다.
“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이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숨을 쉬었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감정과 생각들이 임대인을 멍하니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후우- 숨을 내쉰 임대인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릴리를 바라봤다.
“이리 와서 안아 봐.”
“……내가?”
“그럼 언니가 돼서 인사도 안 할 거야?”
릴리는 임대인으로부터 아기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이목구비와 제대로 뜨지 못한 눈. 한없이 무해하고 순수한 존재였다.
“안……녕?”
그러자 눈도 뜨지 못한 생명이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도 쉬지 못하고 아기를 바라봤다.
임대인이 그런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출생 신고하러 갈 때 같이 가자.”
“내가 같이 가?”
“당연하지. 일에도 순서라는 게 있는데.”
“……무슨 순서?”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임대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네 입양 신고부터 해야지. 언니가 돼서 동생보다 늦게 신고할 거야?”
“어……?”
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양 신고라니. 생각도 못 했던 말에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그 말은 즉, 아저씨와 진짜로 가족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 하지만 난 독립도 했는걸? 이제 아저씨랑 같이 살지도 않는데…….”
그 순간, 임대인이 릴리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아얏! 왜 때려!”
“까분다. 같이 안 살면 가족이 아니야?”
“…….”
릴리는 비로소 보았다. 임대인의 따뜻한 시선이, 자신과 아기를 똑같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네가 독립한 거랑 상관없어. 영희도 좋다고 했고. 오히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을 했냐고 뭐라고 하더라.”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싫어?”
“그게 아니라…….”
릴리는 잠시 고민해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아빠, 라고 불러야 돼?”
“…….”
“…….”
“좀 오글거리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마주 보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동시에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릴리가 임대인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서로를 뭐라고 부르든, 그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스러운 딸을 둘이나 얻게 된 오늘이야말로, 임대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