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91
15화. 조금 섭섭하네.
갑자기 집에서 나오느라 싱숭생숭했던 것도 잠시, 약속했던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릴리는 왕구호의 집에 완전히 적응했다.
“호구는 왜 맨날 배달 도시락만 먹어? 그러면 몸에 나빠.”
“이거 회사에서 짜 준 식단 도시락이라 몸에는 좋을걸. 맛도 그럭저럭…….”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왕구호는 WH그룹에서 제공해 주는 특제도시락으로 항상 아침을 해결했는데, 덕분에 릴리도 한 달 가까이 같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맛이 없잖아! 예전에 아저씨가 만들어 주던 마나영양식보다 나을 게 없다구!”
지금껏 묵묵히 먹어 왔지만 오늘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릴리가 젓가락질을 멈추곤 항의했다.
아부우!
릴리가 도시락에 포함돼 있는 정체불명의 젤리 같은 반찬을 젓가락으로 푹 찌르며 투덜거리자, 그 옆에 있던 아부우도 똑같이 포크로 음식을 찌르며 항의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왕구호는 대수롭지 않게 반찬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거보단 낫지. 팀장님 요리는 예전에 먹다가 몇 번이나 토할 뻔했는데?”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오늘 아침 도시락은 너무 별로야!”
“한 달 내내 잘 먹다가 갑자기?”
사실 왕구호 정도의 초인이라면 식단을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체내에서 순환하는 마나의 양이 육체의 한계를 초월시킨 지 오래인지라, 몇 날 며칠을 굶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잘 먹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다만 해 먹거나 배달시키는 것도 귀찮아서, 남이 챙겨 주는 대로 먹을 뿐이었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대체로 그렇듯.
“도시락이 싫으면 배달이라도 시켜 줄까?”
평소 같았으면 솔깃할 제안이었지만, 릴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얹혀사는 입장에서 반찬 투정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릴리는 식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의 반찬 투정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은 내가 해 볼게!”
“어, 어어어?”
왕구호는 말릴 새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가는 릴리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불안한데…….”
임대인의 요리 실력을 아는 그에게, 릴리의 요리가 어떨지 추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먹었던 수많은 마나영양식과 임식당의 신메뉴가 떠오르자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리려 했다.
“나, 나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출근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에 식재료도 거의 없을걸?”
“걱정하지 마! 재료는 내가 어제 다 사다 놨거든! 금방 만들어 볼게!”
대체 왜 그런 짓을?
왕구호는 잠시 후 생겨날, 음식을 가장한 끔찍한 무언가를 상상하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릴리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자 사라졌다.
탁탁탁탁-!
앞치마를 두른 릴리는 냉장고에서 전날 사 온 재료들을 꺼내더니,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부우! 김치찌개에 넣을 고기에 불맛 좀 입혀 줘!”
아부우우우웃-!
비록 새끼 드래곤을 토치 대용으로 써먹는 등, 듣도 보도 못한 과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왕구호의 눈앞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소시지 야채볶음이 놓여 있었다.
“……이걸 다 릴리 네가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요리들인 데다가, 심지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어서 먹어 봐! 일찍 가야 한다며!”
“어어…….”
반쯤 넋이 나간 왕구호는 릴리가 만든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냄새만 좋은 걸 수도 있어. 팀장님 것도 가끔 냄새는 좋았으니까. 방심하면 안 된다 호구, 아니 구호야.’
그러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먹은 왕구호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맛있다…….”
전체적으로 설탕을 넉넉히 넣었는지 좀 달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맛있는 편이었다.
“정말루? 맛있어?”
아부우?
릴리와 아부우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자, 왕구호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맛있어. 솔직히 팀장님한테 배워서 끔찍한 걸 만들어 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 거야?”
“요리는 영희 언니한테 배웠거든. 오늘 호구한테 꼭 아침 만들어 주고 싶어서.”
“나한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릴리의 말에 감동한 왕구호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릴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동안 집을 빌려줘서 고마워.”
“……벌써 내일이지? 새집으로 이사 가는 거.”
“응! 짐은 다 싸 놨으니까 아침에 가져가기만 하면 돼.”
새집으로 이사 가기 전, 릴리는 지난 한 달 동안의 고마움을 담아 왕구호에게 아침식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는 이제 좀 익숙해진 것 같은데…….”
왕구호는 항상 시끌벅적했던 지난 한 달을 떠올리며 말했다.
늦은 퇴근 후엔 대부분 혼자였다. 릴리와 아부우가 오기 전까진.
그래서인지, 내일부터 집에 릴리와 아부우가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사 가서도 자주 놀러 와. 둘 다 아무 때나 와도 환영이니까.”
“응!”
아부웃!
셋은 잠시 멈췄던 아침 식사를 마저 했다. 왕구호는 릴리가 만들어 준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었고, 릴리와 아부우도 함께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진짜 맛있었다. 나중에 또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아니, 다음에는 셋이서 같이 만들어 먹을까?”
왕구호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하자, 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 안 돼. 언제까지 우리랑만 밥 먹을 거야? 호구도 빨리 여자 친구 만들어서 결혼해야지. 평생 혼자서 살 생각이야?”
“그, 그건 아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여자랑 데이트도 한 번 못 했지?”
“너희들끼리 저녁 먹을까 봐 신경 쓰여서 빨리 온 건데…….”
“핑계야. 우리가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미리 말한 날에도 호구는 항상 먼저 집에 들어와 있었거든?”
“크윽…….”
한마디 한마디가 급소를 푹푹 찌르는 공격에, 인류 최강의 벽이라 불리는 초인은 반박 한 번 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릴리는 왕구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호구는 잘생기진 않았지만 마음씨가 착하니까 분명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러니 좀 더 노력해 봐.”
“……그래. 고맙다.”
잠시 후, 그들은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함께 현관을 나섰다.
왕구호는 WH그룹으로 출근을, 릴리도 차원 허브의 관리자로서 일하러 나가는 길이었다.
“이따가 저녁에 보자. 우리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인데 치킨 먹어야지.”
“응! 이따가 봐!”
아부웃!
왕구호는 릴리와 아부우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잠시 바라봤다.
지난 한 달 동안 릴리와 아부우가 출근길을 배웅해 주거나 함께 집을 나섰는데, 오늘로 그것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올해는 꼭 여친 만들어야지.”
왕구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군가와 매일 아침 함께하는 식사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 *
지이이잉-!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이 가깝게 보일 만큼 높은 허공에서, 임대인이 게이트를 열고 걸어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맞은편에서 릴리도 게이트를 열고 나왔다.
“꼬맹이. B구역은 어때?”
“특이반응 없음! 안전 점검 이상 무!”
반대편에서 게이트를 열고 나온 릴리가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그 어깨에 목말을 탄 아부우도 짧은 앞발로 경례를 흉내 냈다.
아부우!
릴리가 만들어 준 우주 보안관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아부우도 지난 한 달 동안 릴리와 차원 허브 정기 순찰을 함께했다.
임대인이 한 달 전보다 확실히 통통해진 해츨링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다음 대 차원 관리자 후보생도 수고했다.”
아붓!
차원 허브의 평화를 해칠 만한 위험이 없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로도 특별한 에너지 반응이 없는지 체크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시간을 확인한 임대인이 말했다.
“나머지 구역은 점심 먹고 확인하자.”
“내가 맛집 검색해 놨어!”
아부웃!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임대인은 릴리에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침밥 만들어 주니까 호구가 좋아했어?”
“응!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엄청나게 좋아했어!”
스스로 생각해도 아침에 왕구호에게 해 준 요리가 만족스러웠는지, 릴리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임대인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지나가듯 툭 말했다.
“……나한테는 뭐 없어?”
“아저씨는 영희 언니가 있잖아. 호구는 몇 년째 여자친구도 한 번 못 사귀었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임대인은 작게 탄식했다.
“꼬맹이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몇 년을 키워 줬더니 홀라당 집이나 나가 버리고 말이야.”
“아저씨 혹시 삐졌어?”
임대인은 대답 대신 식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를 뒤따라 들어간 릴리가 냉큼 자리에 앉으며 외쳤다.
“저희 치킨카레랑 치즈돈가스 주세요! 아저씨 진짜로 삐졌어?”
“까분다, 꼬맹이 주제에.”
“역시 삐진 거 같은데…….”
아부부부-!
“맞다! 모듬 돈가스도 하나 주세요!”
여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임대인은 재잘재잘 떠드는 릴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심을 먹었다.
처음 릴리가 독립한다고 선언했을 때, 사실은 걱정이 앞섰다.
‘며칠 못 가서 돌아올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조용히 지켜본 결과, 릴리는 꽤나 잘 지내고 있었다. 옆에서 잔소리하지 않아도 이불을 잘 개고, 반찬 투정도 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칠칠 맞게 음식을 옷에 흘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자기보다 어린 아부우를 언니처럼 챙기기까지 했다.
“이것 봐. 또 몸에 흘렸잖아. 천천히 조심해서 먹어야지.”
아부! 아부우-!
파닥거리는 아부우의 입가와 몸에 묻은 돈가스 소스를 닦아 준 릴리가 임대인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안 먹어?”
“천천히 먹고 있잖아. 왜?”
“……나 치즈돈가스 한 개만 먹어도 돼?”
“이런 건 한결같단 말이지.”
임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가장 큰 돈가스 조각을 릴리의 그릇에 덜어 주었다.
“고마워!”
임대인은 돈가스를 맛있게 먹는 릴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 이상 자신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릴리의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소녀는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이 치기 어린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조금씩 증명하고 있었다.
‘조금 섭섭하네.’
밥을 다 먹고 밖으로 나온 후, 임대인은 옆에 선 릴리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어디 보자. 한 달 전보다는 키가 조금 큰 것 같기도 하고.”
임대인이 자신의 키를 가늠하는 듯 보이자,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투덜거렸다.
“키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어른다운 마음가짐이지.”
“벌써부터 다 큰 척하기는.”
임대인이 피식 웃으며 릴리의 볼을 쭉 잡아당기자, 릴리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하지 말라고 웅얼거렸다.
슬쩍 손을 놓아준 임대인이 물었다.
“이사 갈 새집은 마음에 들고?”
“응! 엄청 예뻐! 새로 짓기로 한 걸 잘한 것 같아!”
릴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허브의 중심인 지구는 초능력과 마법, 무공과 과학 기술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설계도만 있으면 웬만한 집을 짓는 데도 한 달이면 충분했다.
“처음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땐 어쩌나 걱정했는데…….”
며칠 동안 독립할 집을 열심히 알아보던 릴리는 결국 새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말려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나, 드디어 새집이 완공되었다고 했다. 덕분에 릴리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
“내일 집들이에 와서 직접 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가서 미리 보거나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중간중간 확인하거나 참견할 수도 있었지만, 임대인은 그러지 않았다.
릴리가 스스로 하겠다고 결정한 만큼,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임대인은 새삼스럽게 훌쩍 자란 듯 느껴지는 릴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알았다. 내일 선물 사 들고 갈게.”
다음 날, 임대인은 집들이 선물을 가지고 백영희와 함께 릴리가 알려 준 주소로 향했다.
추가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