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90
14화. 기특해서 말이야
왕구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거실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차원 허브의 영웅이자 현세대 최강의 초인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인류 최강의 벽’ 왕구호지만, 지금은 자신의 집이 침략자들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인형이랑 게임기는 여기다 놓자!”
아부웃!
“장난감이랑 책은 여기 두면 되겠다!”
아붓!
“간식은 여기 찬장에 정리해서 놓구, 오늘 먹을 것만 밖에 꺼내 놓을 거야!”
아부우?
신이 난 릴리와 아부우가 빨빨거리며 거실을 돌아다녔다. 두 개나 되는 커다란 캐리어에서 처음 보는 물건들을 끝없이 펼쳐 놓는데, 내부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물건인 게 틀림없었다.
‘에이. 그래도 금방 돌아가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캐리어에서 나오는 물건들의 크기가 차츰 커지며 기어코 침대까지 빠져나왔을 땐, 왕구호의 눈도 퉁방울처럼 휘둥그레졌다.
“자, 잠깐만……!”
“괜찮으니까 호구는 가만히 있어! 짐 정리는 이제 스스로 할 수 있으니까!”
‘남의 집에다 짐 정리 잘해 봤자 하나도 기특하지 않거든!’
왕구호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겨우 삼키곤 어색하게 웃었다.
“그…… 며칠이나 있으려고?”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푹 쉬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예전에 사 놓고 바빠서 못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어렵게 구한 한정판 프라모델을 조립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두 꼬마 악동이 집에 불쑥 쳐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릴리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집 구할 때까지! 아마두…… 한 달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하, 한 달씩이나?”
“응! 아저씨가 부동산 매매는 신중하게 보고 결정해야 한다구 했거든!”
“……그렇긴 하지.”
묘하게 설득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왕구호는 난감함에 울상을 지었다.
하루 이틀 정도야 얼마든지 자고 가도 상관없었다.
그전에도 종종 심심하다며 놀러 와선 자고 간 적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고마울 때도 있었다. 겉보기엔 화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왕구호에게 진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몇 명 없었기에……. 종종 놀러 와 주는 릴리는 고마운 친구였다.
‘어차피 여자 친구도 없으니 손님들이 며칠쯤 지내다 가도 상관은 없지만…….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잠깐 든 한심한 생각에, 왕구호는 스스로의 뺨을 찰싹 때렸다.
‘없으면 만들 생각을 해야지, 거기서 납득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갑자기 자기 뺨을 때리는 왕구호의 돌발행동에, 릴리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래? 호구 어디 아파?”
“갑자기 얼굴이 좀 간지러워서……. 하하하!”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릴리는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작고 야무진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계속 가려우면 내가 때려 줄까?”
얼핏 보기엔 작고 여린 고사리손이었지만, 왕구호는 예전에 릴리가 천무극에게 배운 장법으로 수십 미터가 넘는 괴수를 때려잡는 것을 보았다.
순간 섬찟했던 왕구호는 볼을 단단히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것 해.”
“응! 그럼 이제부터 내 방 꾸며야겠다!”
내 방?
왕구호는 비어 있는 방 중 가장 큰 방으로 달려가는 릴리와 아부우를 보며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한 달 동안 눌러앉을지도 몰라.’
며칠 놀다가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만, 장기 투숙을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어떻게 돌려보내지?’
일단 힘으로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고 대놓고 나가라고 무안을 주면서까지 내쫓고 싶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설득해서 돌려보낼 구실이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차원 허브가 평화를 찾은 이후로, 왕구호의 두뇌가 가장 치열하게 회전했다.
그렇게 간신히 쥐어 짜낸 끝에, 제법 괜찮은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팀장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그 말에 활발하게 움직이며 방을 꾸미던 릴리가 멈칫했다.
‘역시!’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에, 왕구호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릴리가 독립하겠다며 집을 나왔다고 해서, 임대인이 그걸 순순히 허락했을 리 없다는 것을.
‘아마 하루 이틀 놀다 오겠다면서 거짓말하고 나왔겠지.’
왕구호는 그렇게 확신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나야 괜찮지만, 한 달이나 다른 집에서 자는 걸 팀장님이 아시면 걱정을 많이 하실 텐데…….”
“호구는 날 뭘로 보는 거야?”
“으, 응?”
왕구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자, 릴리가 두 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말했다.
“아저씨한테는 이미 다 허락받았거든?”
“……정말로?”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 표정이 조금은 시무룩해 보였지만, 이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당연하지. 독립하기 전까지 호구네 집에서 지낼 거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그러라구 했어.”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허락의 주체가 왜 집주인이 아니라 팀장님인 거지?
왕구호는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한테는 미리 물어볼 생각은 안 해 봤어?”
“아저씨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냥 가도 호구라면 반겨 줄 거라고 했어.”
“그, 그래?”
아까부터 왕구호의 표정과 말투에서 떨떠름함이 느껴지자, 릴리의 목소리가 살짝 작아졌다.
“혹시…… 호구는 우리가 온 게 싫어?”
“그, 그게 아니라…….”
릴리도 조금은 눈치가 있었다. 반겨 줄 거라 생각했던 왕구호가 난감해하는 분위기를 풍기자, 고개를 푹 숙인 릴리가 소심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난 호구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안 된다고 하면 돌아갈게…….”
아부웃…….
릴리의 분위기가 처지자 아부우도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곤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릴리와 함께 왕구호의 눈치를 살폈다.
꿀꺽.
왕구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민했다.
‘릴리가 설마 갈 곳이 없을까?’
차원 허브에서 인맥이 가장 빵빵한 사람을 꼽으라면 한 손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릴리였다.
굳이 자신의 집이 아니어도 갈 곳이야 얼마든지 있으리라.
그러니 거절한다고 해서 릴리가 길에서 자거나 할 일은 없었다. 위험해질 일은 더더욱 없고.
하지만 왕구호의 입은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
“……당연히 되지! 우리 집에서 얼마든지 지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저 모습을 보곤 도저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진짜? 고마워! 역시 호구가 최고야!”
고개를 푹 숙였던 릴리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울먹일 것 같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또 당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왕구호는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릴리에게라면 언제까지나 호구로 남아도 상관없었으니까.
“방 정리 다 하면 같이 게임이나 할까? 전에 사 놓고 안 한 게임이 엄청 쌓여 있거든.”
“응!”
아부우!
혼자만의 시간도 좋지만, 역시 함께 노는 게 더 즐거운 법이었다.
* * *
다 함께 짐을 정리하고, 게임을 하고, 치킨을 시켜서 먹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고로롱- 고로롱-
피곤했는지 아부우는 먼저 잠이 들었다. 통통해진 배를 드러내고 옆으로 누워서 새근새근 숨을 쉬는데, 릴리가 그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와 기름기를 닦아 주었다.
“이빨 안 닦고 자면 충치 생기는데……. 아, 드래곤은 상관없을까?”
“글쎄.”
왕구호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항상 어린아이만 같았던 릴리가 자기보다 어린 존재를 돌보는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져 괜히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릴리도 이제 다 컸네.”
“당연하지. 나도 이제 좀 있으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구!”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아부우의 등을 쓸어 주었다. 자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아부우가 방긋방긋 웃으며 꼼지락거렸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흐물흐물해졌다.
“귀엽다아…….”
“이 모습 사진, 아니 동영상으로 찍어도 될까?”
“응! 빨리 찍자!”
두 사람은 말도 못하게 귀여운 해츨링의 꼼지락거림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며 한동안 행복해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긴 왕구호가 릴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팀장님이 정말 독립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어?”
“응? 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릴리의 표정이 어딘가 시무룩해 보였다.
-아저씨. 나 독립하기로 결정했어!
-뭘 한다고?
오늘 아침. 릴리의 독립 선언에 처음엔 황당해하던 임대인도 꽤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짜루?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었어?
-아, 아니거든! 진짜로 독립할 거야! 나도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뭔 소린지 모르겠다만……. 네가 독립하고 싶다면 안 말릴 테니까. 그런데 갈 곳은 있고? 짐 싸 놓은 거 보니 당장 나갈 기센데.
-일단 호구네 집에서 지내면서 알아보려구 하는데……. 나 진짜 독립한다?
-누가 말린대?
아침의 일을 짧게 회상한 릴리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작게 투덜거렸다.
“아저씨는 바보 멍충이야.”
“갑자기?”
“그냥…….”
릴리는 서운했다는 말은 못 하고 아부우의 등만 토닥거렸다. 먼저 독립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릴리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기를 키우는 건 많이 힘들겠지?”
“나도 안 키워 봐서 모르겠지만, 다들 쉽진 않다고 하더라.”
왕구호는 주변의 유부남이 된 초인 동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릴리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기쁘다고 했어.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고, 부모로서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대.”
“그렇구나…….”
릴리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는데, 왕구호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릴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저씨는 내가 귀찮아졌을까?”
희미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항상 당당하고 활기찬 릴리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왕구호는 커다란 손을 뻗어 릴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그는 비로소 릴리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소녀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팀장님은 릴리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도 느끼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셨어. 내가 옆에서 봐서 잘 알아.”
“정말?”
릴리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왕구호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별루 안 자랐는데?”
“아주 많이 자랐는걸.”
왕구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릴리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박하지만, 이제는 어른스러움도 공존하는 웃음이었다.
“팀장님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릴리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여러 번 느꼈어. 릴리는 나한테 조카 같은 존재니까.”
“…….”
“그러니까 확신해도 돼. 팀장님은 여전히 너를 아끼고 사랑해. 그건 아기가 생겨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야.”
불안감에 흔들리던 소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릴리는 큰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왕구호를 빤히 올려보았다.
“……호구도 어른이었구나?!”
“설마 지금까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야?”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왕구호는 릴리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이럴 때는 또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의 릴리 같았다.
“아무튼, 팀장님이 독립을 허락해 주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동생 생겼다고 너무 기죽지 마.”
“누가 기죽었다고 그래! 그리고 아까부터 호구 표정 엄청 느끼하거든!”
릴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왕구호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단숨에 품으로 파고들며 작은 주먹을 휘둘렀다.
“숙녀의 머리를 허락도 없이 함부로 만지다니 용서할 수 없다!”
“자, 잠깐만!”
둘의 체격 차이는 말 그대로 거인과 아이였지만, 날다람쥐처럼 파고든 릴리의 주먹질에 왕구호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물론 반쯤 장난이었기에 아프지는 않았다.
왕구호는 도리어 히죽 웃으며 릴리를 놀렸다.
“하하! 릴리 너 지금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
“아뵤오옷!”
“처, 천마장으로는 때리지 마! 그건 진짜 아프다고!”
그리고 창문 너머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은밀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흩어졌다.
* * *
“이 야밤에 어딜 갔다 왔어요?”
집으로 돌아온 임대인은 아직 잠들지 않은 아내의 질문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냥 잠깐 산책 좀 했어.”
“……잠깐 산책하는데 은신까지 쓰고 다녀왔다고요?”
백영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임대인의 초인 특성인 은 과거 마계의 마왕들조차 속인 적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가 특성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일은 최소한 마왕급의 힘을 지닌 상대를 살펴볼 때나 있다는 뜻.
만약 임대인이 집 밖에서 은신을 풀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백영희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뭔가 수상해……. 그리고 뭐가 좋아서 그렇게 음흉하게 웃으실까?”
하지만 뭔가 위험한 일을 하고 왔다고 하기에는, 임대인의 표정이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기특해서 말이야.”
“……누가요?”
“둘 다.”
씨익 웃은 임대인이 백영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러곤 눈을 감고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온기, 뱃속에 있을 소중한 생명을 천천히 느꼈다.
“갑자기 안 어울리게 왜 이러지?”
백영희는 민망한 듯 작게 투덜거렸지만, 가만히 남편의 품에 기대듯 안겼다. 두 사람은 잠시 그러고 있었다.
“당신한테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귓가로 들리는 임대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백영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