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389
13화. 결심했어!
그날 밤.
백영희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한 간단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굳이 오늘 해야 해요?”
“오늘이야말로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축하받아야 할 날이니까.”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지만, 부모님에겐 바로 알려야 한다는 임대인의 강력한 주장에 우선 백창수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빠는 메시지 잘 안 봐서 내일이나 알게 되실 텐데…….”
“걱정하지 마. 차원 허브에 중요한 문제가 터졌을 때만 보내는 긴급 통신으로 보냈으니까.”
“……진짜로?”
“지금 이거보다 중요한 문제가 어딨어?”
상상도 못 해 봤던 팔불출 남편의 진심 어린 말과 행동에 백영희가 당황하기도 잠시.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집 밖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창수가 거의 현관문을 뜯어내다시피 열고 들어왔다.
“으하하하하! 우리 딸이 아이를 가졌다니! 이런 경사가 다 있나!”
차원 허브를 여행하며 수행을 이어 가던 백창수가 한달음에 날아왔다. 백영희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빠? 어떻게 벌써 왔어요?”
“사위가 당장 오라며 내 앞에 게이트를 열어 주었단다!”
“세상에……. 아무데나 게이트를 여는 건 중대한 차원 허브 법 위법이라고요!”
애초에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둘뿐이긴 하지만…….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백영희에게 다가온 백창수가 딸을 안아 주었다.
“영희야.”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은 백창수는 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잔잔한 목소리에 애틋한 감정이 담겼다.
“그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새 엄마가 되다니 놀랍고 감격스럽구나. 넌 분명 좋은 엄마가 되겠지. 그러니 불안함이 있어도 마음을 편하게 먹고, 남편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뭐, 남편이 영 못 미더우면 언제든 훌륭한 육아 경력이 있는 아빠한테 와서 상담해도 되고.”
“풉……!”
결국 웃음을 터트린 백영희가 아버지를 꼭 안아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그리고 사위.”
시선을 돌린 백창수는 흐뭇함과 음흉함 그 어디 쯤에 있는 표정으로 사위를 바라봤다.
“자네도 남자였구먼. 슬슬 병원에서 검사라도 받아 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장인어른의 짓궂은 농담에 임대인은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평소 같으면 능글맞게 받아치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여러 감정으로 벅차오른 상태였다.
“앞으로 더 잘하게.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어쩔 수 없이 예민해지기 마련이야.”
“걱정 마십시오. 저야 바쁠 때 빼면 남는 게 시간 아닙니까. 잘…… 하겠습니다.”
임대인은 퍼스트 게이트 당시 부모님을 잃었다. 그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겪은 일이었다.
때문에, 그에게 찾아온 새로운 가족은 더욱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형수님! 형님! 축하드립니다-!”
“급하게 오느라고 선물도 제대로 못 챙겨 왔습니다!”
이미 반쯤 뜯겨 나가 덜렁거리던 현관문을 완전히 부수며 왕구호와 김민재가 거대한 몸을 들이밀었다.
아부웃! 캿!
커다란 덩치 둘이 좁은 문을 동시에 비집고 들어오려는 모습에, 깜짝 놀란 아부우가 드래곤 피어를 마구 쏘아 냈다.
……물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 자식들은 왜 남의 집 문을 부수고 난리야?”
임대인이 툴툴거리며 바라보자, 두 덩치는 조금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문은 원래 부서져 있던데요?”
“저희가 오기 전부터 누가 저렇게 만든 것 같은데…….”
밖에선 차원 허브의 영웅들이라고 칭송받는 두 사람이지만, 임대인에게는 여전히 좀 모자란 동생 취급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양손에 꽃다발과 케이크, 과자 따위를 잔뜩 사 들고 찾아왔다. 백영희가 그걸 받아 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두 사람은 또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저희 남편이 부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릴리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내가 불렀어! 호구랑 시루떡도 함께 축하해 주면 더 좋으니까!”
처음 길드에 가입하고, WH-7팀을 만들 때부터 쭉 함께한 인연들.
임대인도 그 시절이 떠올랐는지, 사람들을 둘러보곤 작게 웃었다. 그가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어. 사람이 이 정도는 있어야 축하할 맛이 나지. 다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오늘의 주인공인 백영희가 직접 케이크를 자르고, 다시 한번 모두가 축하를 건네고,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룹에는 한동안 비밀로 할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귀찮아질 게 뻔하니까.”
“잘 생각했다. 주변에 시끄러워지면 아이한테도 안 좋을 수 있으니.”
“산모님은 절대 안정하셔야죠!”
“이 멍청아. 산모는 아이를 낳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아부우. 이거 먹어 봐. 당근이 들어간 케이크인데, 당근이 들어간 음식 중에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거야!”
아부웃?
밤이 깊어지면서 임대인은 아껴 두었던 비장의 술을 꺼냈고, 백창수는 딸에게 임신부로서 조심해야 할 것들에 관한 잔소리를 무수히 늘어놓았다.
“영희 너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다. 백수 같은 네 남편 좀 본받아라. 응? 저렇게 놀고 먹고 자야 피로가 풀리지 않겠니? 그러고 보니 자네는 스트레스도 없는지 날이 갈수록 피부가 좋아지는군.”
“……그거 칭찬이죠?”
“아빠. 적당한 일은 오히려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니까요.”
“내가 봐도 당신은 일이 너무 많아. 이참에 좀 줄이는 게 어때?”
“어머.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챙겨 줬대? 내가 쫓아다니면서 비서일 할 땐 온갖 잡무를 다 시키더니?”
“흠흠. 다 지난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하고 그러실까…….”
“어디 오늘 한번 섭섭했던 얘기 다 꺼내 볼까?”
멋쩍은 표정의 임대인과 이때다 싶어서 남편을 실컷 놀려먹으려는 백영희.
백창수는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지켜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하하! 행복하구나! 오늘은 다 같이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
“아빠는 그게 임신부 앞에서 할 말이에요? 그리고 여기 릴리도 있는데?”
“너랑 릴리는 당연히 안 되지! 자자, 사위부터 한잔 주고! 자네들도 받게!”
몇 명만 모인 조촐한 축하 파티였지만,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밤이었다. 다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마시며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히 취기가 오른 왕구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릴리에게 물었다.
“릴리야. 동생이 생겼는데 어때?”
“……응?”
릴리는 잠시 딴생각에 빠졌는지 포크를 입에 물고 말이 없다가,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하자 눈을 깜빡이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엄청 기쁘지! 나는 아기가 쌍둥이였으면 좋겠어.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로!”
아붓! 아붓!
릴리의 무릎 위에서 아부우도 당근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호응하는 게 분명했다.
두 꼬맹이의 모습을 본 임대인이 피식 웃었다. 그가 케이크가 묻은 둘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 주며 말했다.
“쌍둥이라…….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벌써부터 김칫국 마시지 마요. 하나 키우기도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그래 봤자 설마 차원 관리자 일보다 힘들겠어?”
“우리 남편 자신감이 굉장하네.”
두 사람이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다들 웃으면서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릴리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흐릿했다.
“……이제 나두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거야…….”
소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당근 케이크를 포크로 폭폭 찔렀다. 항상 엉뚱한 말을 자주 하는 릴리였기에, 거기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놀라운 하루가 저물었다.
* * *
“잠이 안 와.”
아붓?
불이 꺼진 방 안에는 별이 가득했다. 마치 우주의 축소판 같은 모습이었다.
수많은 별 무리가 천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릴리와 아부우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부우. 사람은 있잖아. 언젠가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있어. 하기 싫어도 말이야.”
아부우……?
아부우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이 체력이 좋은 종족이 드래곤이라지만, 아직은 해츨링. 이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웬디도 그랬잖아.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거라구. 나는 지금이 좋지만…….”
아부우…….
아부우는 이제 그만 좀 자면 안 되냐는 듯 앞발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릴리는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그냥 무시하고 잘 수도 없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릴리가 침대 위에서 한 번씩 뒹굴뒹굴 굴렀으니까.
“아기가 태어나면…….”
릴리의 눈에 행복해 보이던 두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들 사이에서 자랄 아이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왠지 아저씨를 닮아서 눈매가 좀 뾰족할 것도 같고, 아니면 영희 언니를 닮아서 엄청 예쁠 것도 같았다.
……어쨌든 엄청나게 귀여울 것은 분명했다.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릴리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어른들이 아기를 잘 보살펴 줘야 해.”
아붓.
자신부터 잘 보살펴 주라는 뜻인지, 아부우가 볼을 뚱하게 부풀렸다. 하지만 릴리는 듣지 못한 것처럼 혼잣말을 계속했다.
“항상 아기 옆에 있어야 하고, 바르게 크도록 이것저것 가르쳐 줘야 해. 세상에 맛있는 게 아주 많다는 사실이나,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거나, 착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법 같은 거.”
릴리는 그 모든 것을 임대인에게 배웠다.
그렇게 불러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와 다름없는 고맙고 소중한 존재.
그런 아저씨에게 아기가 생기는 것이다.
분명히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일이다.
마음으로는 분명 그렇게 알고 있지만…….
릴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렸다.
“마음이 이상해.”
아저씨는 아기가 태어나면 자신에게 지금까지 해 준 것처럼 잘해 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이 잘해 주고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저씨는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그건 당연한 거야. 당연한 건데…….”
자연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소녀의 마음은 생각과 다르게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부웃?
괜찮냐는 듯 아부우가 손바닥으로 릴리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릴리는 애써 웃으며 아부우를 꼭 껴안았다.
“고마워.”
릴리는 고개를 돌려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액자를 바라봤다.
WHA를 졸업할 때 찍은 사진이었다. 오늘 파티에 온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저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중 모습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릴리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꽤 많이 변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릴리가 말했다.
“……역시 언제까지 나만 아이일 수는 없어.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해.”
마음은 아직 복잡했지만, 생각은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잠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한 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나 결심했어!”
아부웃!
겨우 잠들었던 아부우의 제발 잠 좀 자자는 외침과 파닥거림을 뒤로하고, 릴리는 불을 켜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그러니까.”
왕구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봤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와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등에 메고, 갑자기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소녀와 해츨링을.
“……그게 우리 집에 온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나 독립할 때까지만 호구네 집에서 신세 질게! 짐은 어디다 풀면 돼?”
아붓!
그 당당함에, 왕구호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추가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