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lf I saved proposed marriage RAW novel - Chapter 14
14장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도, 루퍼스도, 크리스틴도.
안드레아는 담담한 눈으로 그 장면을 멀거니 지켜보았고, 아버님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셨다.
고개가 돌아간 모리스는 당황하지도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어머님을 마주 보았다.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듯, 초연한 태도였다.
어머님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 밑을 겨우 추스르며 입을 여셨다.
“나에게 이해를 바라지 마세요. 난 자식을 잃을 뻔한 어미입니다. 당신에게 저 아이가 꽤 소중한 모양인데, 엄마인 나한테 내 아들은 오죽하겠어요?”
처음이었다. 늘 자애롭고 쾌활하던 어머님이 저렇게 날 선 눈으로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은.
그 시선의 끝에 닿은 건 엘리엇이었다.
“얼추 들었습니다. 그쪽이 내 며느리를 도와 이곳까지 데려다줬다는 사실. 그러니 나도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죠. 마음 같아서는 저 아이를 씹어먹어도 시원찮지만, 나도 도의라는 건 있으니까요.”
분에 차서 숨을 고르는 어머님을 뒤로 물리고 앞에 나서신 건 아버님이었다.
두 분의 핼쑥한 얼굴에서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지 난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당신들을 용서할 수도, 용서할 생각도 없소. 하지만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늙은이가 무슨 주제로 나서겠소. 가주는 내 아들이오. 내 아들이 의식이 없으면 며느리가 가주고. 난 며느리 의견을 따를 거요.”
그 말에 나는 눈치껏 루퍼스와 크리스틴에게 두 분을 모시라고 지시했다.
이런 분위기가 불편한 건 마찬가지인지라, 두 사람도 망설이지 않고 두 분을 모시고 방을 나섰다.
묘한 삭막함만이 감도는 와중, 나는 모리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요?”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지른 짓에 비하면 약하지. 좋은 시부모를 뒀군.”
“일단 모리스도 쉬어요. 쉬지 않고 달렸잖아요. 빈방은 많아요. 치워 놓으라고 할게요.”
“마음만 받지. 저 녀석이 깨어나는 걸 보고 싶어서.”
“계속 묻고 싶었는데, 형제 같은 사이인 건가요?”
모리스가 엘리엇을 멀거니 바라보며 대답했다.
“동생 같기도 하고, 아들 같기도 하고. 워낙 어릴 때 거둬져서 내가 키우다시피 했거든.”
그렇다면 머리를 땅에 박으면서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게 이해가 갔다.
엘리엇과 레이먼드를 번갈아 보던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레이먼드에게 사촌 동생이 있어요. 오스틴이라고.”
아마 모리스도 알 거다.
엘리엇이 단독으로 랜달에 쳐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습격했던 상대가 오스틴이었다.
“나이는 열아홉이에요. 오스틴도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었대요. 밀렵꾼들 손에. 그래서 몇 년 이 저택에서 같이 자랐나 봐요.”
자주는 아니어도 몇 번인가 레이먼드가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오스틴과 루퍼스와 셋이서 시끌벅적하게 살았던 때를.
말은 형이고 남동생이고 징글징글하다면서도 그 시절을 회상하는 레이먼드는 즐거워 보였다.
“그 때문인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게 눈에 보여요. 툴툴대면서도 아껴주고 무슨 일 생기면 걱정해주고. 그냥 그렇다고요.”
왜 이 얘기를 꺼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모리스와 엘리엇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레이먼드와 오스틴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난 이만 가서 씻고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쉬어요.”
말이 없는 모리스를 뒤로한 채, 방을 나서자 서늘한 공기가 나를 휘감았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진작 일어나 준비를 마친 클레어가 이미 목욕물을 받아놓은 뒤였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게, 설마 내 걱정에 전날 눈물을 쏟은 건가 싶었는데, 본인은 절대 아니라며 극구 부인하길래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피로와 더불어 근육까지 싹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습관적으로 배가 뭉치지는 않았는지 문지르며 아기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아빠가 얼른 눈을 떠야 할 텐데. 그렇지?”
그러다 보니 절로 러더퍼드 공작이 떠올랐다.
주변에서 하도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어도, 사람을 사지 한복판에 던져놓고 온 거나 다름없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이런저런 우려로도 신체의 고단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머리를 말리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남편은 사경을 헤매는데 잠들어서 되겠냐는 죄책감에 허우적대는 나를, 클레어가 슬그머니 침대에 눕힌 뒤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마님은 충분히 주무셔도 돼요. 사자 공작님 오시면 깨워드릴게요. 그때까지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주무세요.”
그 말에 마법처럼 의식이 뚝 끊겼다.
* * *
“마님은 주무십니다.”
루퍼스는 말이 아닌 꼴로 랜달에 도착한 사자를 보며 불현듯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분명 사냥터에서 사슴을 잡아먹다가 오스틴 도련님에게 붙잡혀 왔지.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출발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타난 라이언은 기절한 남자 하나를 무슨 짐짝 던지듯 툭 내려놓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안드레아나 잠깐 보고 가죠.”
“시장하실 텐데, 식사랑 목욕은 하고 가시죠. 마차도 빌려드리겠습니다.”
라이언은 귀찮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바로 올라가서 황후 폐하께 보고를 드려야 하거든요.”
“보고요?”
“난 직접 보고 왔잖아요? 가만히 내버려 둘 상대는 아니더라고요. 조사해야죠.”
“알겠습니다. 친구분을 불러드리죠.”
루퍼스가 올라간 사이, 라이언은 멀찍이 완전히 해가 떠오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짐을 하나 메고 온 탓에 평소보다 속도가 더뎌졌다.
프로스트 공작의 성격이라면 내내 자기 걱정에 마음 편히 있지 못했을 게 눈에 훤했다.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나마 당신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다면야.
역시 한순간에 마음을 접는 건 어려웠다.
그녀에겐 여전히 후각을 사로잡는 향기가 났고 언제쯤 그런 향을 가진 다른 사람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나타나지 않을지도.
그래도 그는 슬프거나 비참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것이 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약간 질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는 찌뿌둥한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혹사하고 수축했던 근육들이 이완하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몸은 더러웠어도 기분은 개운했다.
그러면 된 것이었다.
* * *
눈을 뜨니 알 수 있었다.
아. 오래 잤구나.
이상하리만큼 가뿐한 몸이 그 증거였다.
러더퍼드 공작은 세 시간 안에 온다고 했으니 못해도 그가 오고 두 시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황급히 일어나서 안드레아를 찾아가자, 웬 낯선 남자가 그의 감시를 받으며 물약을 만들고 있었다.
“일어났네?”
안드레아가 날 힐끔거렸다.
난 그 대신 모리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사자 공작이라면 진작 왔다 갔어. 그쪽이 잔다고 하니, 저자를 넘겨주고 갔지.”
“왜 깨우지 않았어요?”
“깨우고 싶지 않았대. 밤새 내달린 임산부를 뭐하러 깨워? 아, 라이언이 전해달래. 그 영주, 조만간 조사에 들어갈 거라고.”
안드레아가 심히 가벼운 투로 말했다.
마침 낯선 남자가 손을 벌벌 떨다가 뭔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나는 반쯤 거리를 두고 남자를 살피기 위해 기웃거렸다.
음산한 분위기에 안드레아처럼 긴 머리였는데 좀체 정리되지 않아 흐물거렸다.
“그 사람이 그 마법사예요?”
“그렇겠지? 내 생각이 틀렸더라고. 거기 영주에게 큰돈을 받고 계속 요구하는 것들을 만들어줬나 봐. 거래 관계는 맞지만, 지속성이 길었던 거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돈을 받고 사람을 해치는 독을 만들어줬다니.
해독제만 아니었더라면 확 러더퍼드 공작에게 황실에 신고해버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독제를 만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대를 손톱으로 긁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곧이어 엘리엇에게 먹인 것과 똑같은 액체를 만들어냈다.
“늑대 백작은 저 소년보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날 거야. 상태가 더 나은 편이라.”
안드레아의 얄따란 손가락이 레이먼드의 머리를 받치고는 액체를 천천히 입 속으로 떠밀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안드레아의 손이 레이먼드에게서 떨어지자, 어쩐지 허무해졌다.
이 짧은 한순간을 위해 긴장을 풀 수 없는 이틀을 보냈다.
안심과 허탈함.
심장이 텅 비는 듯하면서 몸이 느슨해졌다.
남은 건 기다림이었다.
스노우 백작 측의 마법사는 안드레아의 감시 아래에 다른 방에 감금됐다.
조치가 끝난 마당에 안드레아도 더는 자신이 해줄 게 없다나.
모리스와 나는 그 방에 남아 무한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도중에 루퍼스와 크리스틴이 식사를 가져다주면서 함께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다시 두 시간쯤 지났을까.
엘리엇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바로 눈을 뜨지는 못했어도 숨소리도 안정을 되찾았고 부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게 진짜 해독제였나 보네요.”
“그러게. 다행이야. 정말로.”
모리스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엘리엇이 정신을 차리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베스칼로 되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야지. 우선 저 녀석 건강부터 되찾고.”
내 생각인데 아마도 두 사람은 되돌아갈 것이다.
스노우 백작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는 두 사람에겐 가족과도 같은 라나나 다른 사람들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머지않아 황실에서 스노우 백작에 대해 조사가 들어가면 두 사람이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될지 모르고.
그때였다.
“마님!”
루퍼스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그가 이 상황에서 나를 부를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서 내 눈은 저절로 한곳으로 향했다.
레이먼드.
퉁퉁 부어오른 팔이 차츰 줄어들어 제 크기를 되찾고는 엘리엇보다도 빠른 속도로 혈색이 돌아왔다.
그리고.
“……에블린.”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
가느다랗게 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황갈색 눈동자.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레이먼드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아직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자못 차가웠지만,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아 어루만졌다.
안정적으로 숨을 내뱉은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웅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살아있는 거죠?”
피식 실소가 나왔다. 눈을 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이거라니.
어쩌면 그 어떤 말보다 레이먼드다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할까요?”
“살아있나 보네요. 나 좀 일으켜 줄래요?”
재빨리 루퍼스가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멍하니 앉은 레이먼드는 문득 제 옆에 누운 엘리엇을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당연하겠지만, 아직 정확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엘리엇을 한 번, 모리스를 한 번, 그러다가 다시 내게 꽂힌 황갈색 눈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가만히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으음. 얘기해도 되는 걸까.
솔직히 완전히 숨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식을 이제 막 되찾은 사람에게 늘어놓을 만큼 평화로운 얘기도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자기를 구하기 위해 내가 적진 한가운데까지 들어갔다 나온 걸 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뻔했다.
그래도.
“얘기해줄게요. 먼저 하나만 약속해주면요.”
난 봉쇄하듯 그의 두 손을 꽉 붙들고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한테 화내지 마요. 알았죠?”
* * *
숨조차 함부로 쉴 수 없는 적막함이 흘렀다.
미리 단단히 일러둔 덕에 그가 속상함을 내비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입을 꾹 다문 탓에 표정이 탐탁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면 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조금 눈치가 보였다. 루퍼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슬쩍 나를 두둔하는 말을 꺼냈다.
“큰일은 없었을 겁니다. 마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그의 좁혀진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돌연 고생한 장본인인 내가 왜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지, 억울해졌다. 울컥한 마음에 코끝이 시큰해지려던 찰나에 레이먼드가 나를 불렀다.
“에블린. 잠깐 자리를 옮길까요?”
갑자기?
흐름을 깨는 발언에 솟구친 섭섭함이 쏙 들어가 버렸다. 루퍼스가 아직 움직이는 건 무리이지 않겠느냐 묻자, 그는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보였다.
“옆 방으로 가요. 할 말이 있어요.”
그가 손짓했다. 묘하게 차가운 얼굴이라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그 뒤를 따랐다.
아무도 쓰지 않아 미묘한 한기가 감도는 방의 문을 닫고 들어오자 손끝과 발끝이 차게 식었다.
손을 어루만지며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데 별안간 따스한 온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이윽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울렸다.
“고마워요.”
이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모르겠다. 그가 중독되어 쓰러졌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왜 멀쩡하게 정신을 되찾은 뒤에야 이러는지.
“그리고 미안해요. 그런 곳에 가게 해서.”
“아니에요. 내가 더 고마워요. 살아줘서.”
한 번 널뛰기 시작한 감정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 도리질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를 몇 분, 조금 울음이 가라앉자 레이먼드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사실 정신을 잃었을 때, 긴 꿈을 꿨어요.”
“꿈……이요?”
“누군가와 기분 좋은 산책을 하는 꿈이었어요.”
“그게 누구였는데요?”
눈가를 문지르며 묻자,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 그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그러자 매끄러운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걸렸다.
“머리가 흑단처럼 검고, 파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밤하늘을 닮은 눈을 가진 남자였어요.”
구태여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레이먼드는 천천히 자신이 꿈속에서 겪은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꿈을 꾼다는 자각조차 없었어요. 그냥 자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별안간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하더니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꽃밭이 펼쳐졌더랬다.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특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꿈이야 종종 꾸는 거니까요. 근데 누가 나한테 다가오는 거예요.”
상대의 얼굴과 말소리가 그토록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온화한 인상의 젊은 남자. 초면이지만, 어딘지 기시감이 드는 모순적인 외모에 한참을 쳐다보자 불현듯 내가 떠올랐더란다.
“그래서 난 내가 죽은 줄 알았죠. 예전에 돌아가셨다는 에블린의 아버지가 날 보고 웃고 계셨으니.”
얘기를 들어보니 아까 왜 날 보자마자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내 소개를 하려고 했더니 이미 알고 계시더라고요. 걷자고 하셔서 그렇게 한참 걸었어요. 어린 시절 얘기부터 어머님을 처음 만나신 얘기까지 들려주셨어요.”
엄마 얘기에 쓰게 웃다가 눈이 레이먼드의 가슴팍에 매달린 펜던트에 닿았다. 악한 기운을 쫓아내 주고 악몽도 막아준다던데.
어쩌면 아버지가 그의 꿈에 나타난 건 저 펜던트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에블린 얘기도 하셨어요.”
그 말에 반쯤 떨어뜨린 고개가 홱 들렸다.
현실이 아니라지만 아버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그만큼 내겐 머나먼 사람이었다.
레이먼드는 부드러운 눈빛만큼이나 나직한 음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에블린. 아버님은 계속 지켜보고 계셨나 봐요.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사후세계가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다. 꿈이란 것도 평상시 머릿속에 담아놓은 소망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도 저 말이 진짜든 아니든, 굳어버린 마음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얼른 엄마를 옮겨드려야겠네요. 외로우실 텐데.”
“그러게요. 원래 진작 옮겨드려야 했는데. 본의 아니게 늦었네요.”
어쩐지 모든 게 끝난 듯한 말이었지만, 아직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레이먼드는 깨어난 직후였고,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지만 엘리엇은 눈을 뜨지 못한 채였다.
베스칼은 들쑤셔진 뒤였고, 스노우 백작도 어떻게 되었는지 불분명했다.
그래도 체감상 큰 고비는 넘어갔다는 막연한 안도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때문일까.
지금은 이 너른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오든 이 순간이 주는 안정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내 마음에 공감하는지, 레이먼드도 한참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아무런 걱정도, 위험도 없는 둘만의 시간.
그냥 그게 필요했다.
* * *
엘리엇은 레이먼드가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다.
워낙 중태였던지라 눈을 뜨고도 망연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모리스를 보자 초점이 돌아왔다.
나와 레이먼드를 보고서는 바로 안색이 차갑게 질려버렸지만.
모리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준 덕분에 공격성을 내비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껄끄러운 기색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나한테 신세를 졌다는 게 아마 미치도록 굴욕일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레이먼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더욱.
죄책감을 더 심어주려는 요량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하여튼 엘리엇에겐 차라리 그가 역정을 내는 게 더 편할 수도.
어쨌든 증세가 중하기도 했을뿐더러, 공교롭게도 다람쥐 수인은 늑대 수인만큼 회복력이 빠르지 않았기에 그가 움직일 때까지는 다소간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그레이 저택에 머물면 좋으련만, 상호 껄끄러운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거처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 엄마가 살던 집으로.
우리의 지원은 일절 받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던 엘리엇은 모리스가 스노우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현실을 자각시키고 타이른 덕에 조금은 고분고분해졌다.
오스틴보다도 어린 소년이 충격받는 건 별로 원하지 않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안드레아는 사나흘 정도 더 레이먼드와 엘리엇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수도로 돌아갔다.
본인 잇속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인지라 애초에 약속했던 연구 관련 얘기는 거의 못을 박아두듯 강조까지 하고 떠났다.
그 수상쩍은 마법사는 뒷덜미를 붙잡힌 채 안드레아에게 끌려갔다. 정식으로 조사를 청할 거라면서.
그가 만들어준 약과 음식을 챙겨 모리스와 엘리엇을 찾아가 그 말을 전하자, 짐짓 모리스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
배신했다고는 해도 한때 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스노우 백작의 말로가 그렇게 끝난다니, 씁쓸한 것도 당연했다.
아무런 감시역도 없는데 몰래 도망가면 어쩌냐는 내 질문에는,
“백작님은 영지를 떠나지 못해. 부인과 딸의 묘가 거기 있거든.”
라고 대답했다. 부인과 딸. 거기에 묘. 붙기만 해도 비극적인 서사가 떠오르는 문장이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어,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괜히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건 사절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 뒤.
러더퍼드 공작으로부터 스노우 백작을 체포했다는 서신을 받았다. 죄목은 그레이 백작 살인미수죄.
정황상 모리스와 엘리엇, 라나도 심문을 받아야 하는데 희한하리만큼 백작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어 진행이 더뎌지고 있다고 했다.
한숨은 나왔지만, 그냥 서신을 접어 서랍에 넣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더는 이렇게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공작의 서신과 함께 온 다른 초대장을 펼쳤다. 마커스와 레이나의 결혼식 청첩장이었다.
다른 동족에겐 별다른 피해가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예쁜 필체로 쓰인 두 사람의 이름을 보자니, 그동안 건조하게 말라붙었던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점점 하루하루 일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직 뒤틀려 있었어도 평범한 나날로 복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엄마도 뵈러 가야 했고, 마커스의 결혼식 선물도 골라야 했고, 슬슬 아기를 위한 물건도 갖춰야 했다.
이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질 테니.
음. 수도에서 들여오는 게 나으려나? 예쁜 물건들은 보통 수도에 많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은 그뿐이 아니라는 것을.
* * *
“재밌는 기사가 났던데.”
가브리엘라가 신문을 툭 던지며 비스듬히 웃었다.
그 말과 웃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기사를 접한 라이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호락호락한 인사는 아니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잡아갈 거라고 선전포고를 들은 마당에 무슨 짓을 못 하겠어. 프로스트 공작이 난처하겠네.”
“난처한 정도가 아니겠죠.”
라이언은 질린다는 눈으로 내던져진 신문을 흘겨보았다. 대서특필로 보도된 전면에는 프로스트 공작과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인식 좋았는데 말이야. 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가브리엘라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동안의 일들과는 달리 해결책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죠. 다만, 이건 제삼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밝혀진 셈이니.”
“비단 공작과 그 부군만의 일이 아니지. 종족 전체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봐도 좋으려나.”
라이언은 물끄러미 누나를 쳐다보았다. 수인으로서 인간의 국모에 선 그녀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막연히 남의 일로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문득 라이언은 베스칼에서 모리스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체 높은 자들이 나서준다면.
“폐하.”
동생의 부름에 황황한 주황색 눈이 돌아섰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10여 년이 넘도록 좀체 찾아오지 않던 그 기회. 이 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
눈치껏 라이언이 심상치 않은 말을 할 것임을 직감한 가브리엘라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참에 저희도 밝혀버리죠.”
때로는 주사위를 던져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그때였고.
* * *
눈앞이 아찔해졌다.
별안간 하얘졌다가 핑그르르 돌더니, 정신을 차리자 주저앉아 있었다.
놀란 클레어와 크리스틴이 나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해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도 똑같은 심정인지, 섣불리 내게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나는 다시 손에 들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꽤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는 레이먼드의 정체는 물론, 그레이 가문과 다른 동족들의 신상까지 낱낱이 공개되어 있었다.
정보의 출처는 뻔했다. 이런 식으로 내게 협박을 가했던 사람은 한 명이었다. 아마도 붙잡히기 훨씬 전부터 손을 써놓은 듯싶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마커스의 결혼식이었다. 분명 하객 중에는 인간도 있을 텐데, 이 시기에 이런 기사가 나는 건 분명 화이트 가문에 좋지 않았다.
더구나 인간에게 안주인을 잃은 화이트 가문이라면 이 일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여 정식으로 항의를 한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행여 태중의 아기에게 무리가 갈라, 침대로 옮겨진 내게 때맞춰 레이먼드가 다가왔다.
다행히 조금 안색이 어두운 것 말고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도리어 그런 태연함에 난 더 울고 싶어졌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미안해요.”
“전혀요. 에블린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내 손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스했다.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요. 아버지, 어머니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냉정하게 얘기하면 에블린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요.”
저절로 입술이 깨물렸다.
“하지만 좋게 얘기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얘기할게요. 나 때문에 너무 고생했잖아요. 두 분도 에블린이 어떤 마음인지 아시니까, 아예 알려주기 싫으신가 봐요.”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이미 다 밝혀졌는데.”
“그러니까요. 어차피 다 퍼진 마당에, 에블린이 굳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비슷한 일들은 종족 역사에 여러 번 있었어요. 나 믿고 푹 자고, 잘 먹고, 쉬면 돼요.”
저 다정한 미소에 더 무슨 말을 하랴.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배를 감싸며 숨을 고루 내쉬었다.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했다.
그동안 내 욕구가 먼저인 이기적인 엄마였는데 더는 그럴 수 없었다.
* * *
사실 물릴 지경이었다.
에블린에겐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거짓말에 가까웠다.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킬 뻔한 전례는 여럿 있었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서재에 콕 박힌 레이먼드는 한참 머리를 싸매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 일의 순서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더글러스와 벨리카는 안전상의 이유로 이곳에 머물던 것이니, 알아서 거처로 돌아갔다. 뒷일은 오롯이 레이먼드 자신에게 맡기겠다고도 덧붙였다.
책임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현재 종족의 우두머리는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못내 불안했던지,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연락을 취하라는 언질은 남겼다.
“블랙과 화이트를 부를까요?”
혼자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신 안정에 좋다는 차를 슬며시 내려놓으며, 루퍼스가 물었다.
레이먼드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법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찾아봐야지. 가능하면 도지어와 시모어 어르신도.”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화이트는 갑자기 벼락을 맞은 셈이네요. 아들의 결혼식이 얼마나 남았다고, 참.”
그 누구보다 이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할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책임은 아니었어도 레이먼드는 무거워지는 마음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렇겠지. 영지민 반응은 살펴봤어?”
“다행히 랜달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루퍼스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뜻밖의 반응이 나온 모양이었다.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데요.”
상황은 심각한데 저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한편으로는 어깨에 매달린 책임감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래. 여긴 늑대 신을 믿는 지방이었지.”
“애초에 백작님은 늑대 신의 후손이란 소문이 자자했고요. 그보다도 마님께서 자란 마을에선 프로스트 공작이 그 에블리나였다는 게 더 충격인 듯 보였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그 마을이 워낙 후미져야죠. 그래서 유골 뿌리는 숲도 거기 있는 거 아닙니까.”
유골 뿌리는 숲.
새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몇 개월 전 그곳에서 에블린과 재회했다. 꼭 몇 년은 된 듯 아득했다.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기도 잠시, 루퍼스가 헛기침 두 번으로 주위를 환기했다.
“그보다 말입니다, 백작님.”
“뭔데?”
“말과 다람쥐 수인 말인데요.”
“그 두 사람은 왜?”
“조만간 참고인 조사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안드레아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저번에 보니 마법사는 수도에서부터 여기까지 한 시간이면 소식을 전하는 마법을 쓰기도 하더라고요.”
루퍼스가 빳빳한 봉투 한 장을 스윽 내밀었다. 겉면에는 대놓고 ‘참고인 조사 협조 요청’이라고 적혀 있어서 굳이 내용물을 읽지 않아도 요구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레이먼드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스노우 백작인지 뭔지, 그자가 일을 터뜨리고 입을 열었나 보군.”
“애초에 기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거겠죠. 듣자니 양 수인이라던데. 머리가 좋네요.”
레이먼드는 턱을 쓸어내렸다. 에블린의 말마따나 스노우 백작이란 남자는 자신처럼 회색 머리와 금색 눈을 가진 수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태계에서 늑대의 대표적인 먹잇감으로 알려진 양이라니.
괜스레 기분이 기묘해져서, 레이먼드는 동족들에게 보낼 서신을 쓰게 종이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꼼꼼하게 현재 상황을 적어 내린 서신을 보내고 하루 뒤.
라이언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어. 저들이 수인이라 황제 폐하께서 내게 이송을 담당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다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변명하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레이먼드는 아무 말 없이 라이언과 그를 따라온 사자 수인 몇몇을 데리고 이동했다.
모리스와 엘리엇이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은 순순히 따랐다. 말이 참고인이지, 사실상 공범이나 다름없어서 손을 포박당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라이언도 착잡한 얼굴로 잠시 먼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먼드는 슬쩍 그 곁에 서서 말을 건넸다.
“들었어. 나 때문에 애먼 고생을 했던데.”
“멀쩡히 살아났으면 됐어. 그보다 이곳은 퍽 조용하군. 소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예로부터 늑대 관련 신앙이 퍼진 곳이라. 다들 당연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나 봐.”
어울리지 않게 거구의 사자가 힘없이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미련 없이 웃음을 털어낸 그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뭐, 영지에서 인정받았으면 됐지. 안 그래?”
“수도에서는 어때?”
“잠잠해. 근데 그거야 공작과 그쪽이 여기 있으니까 그런 거고. 만약 수도에 있는 그 광활한 저택에서 살았더라면 말이 많았겠지.”
후우.
건조한 숨이 나왔다. 레이먼드는 마른세수와 동시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조만간 동족들을 모을 거야. 단체로 어떤 견해를 내놓아야 할지, 의논하려고.”
“뭘 그렇게까지 하나.”
“뭐?”
“심란한 건 이해해. 원하지 않게 종족 전체가 드러난 셈이니까. 근데 잘못한 것도 아니고, 왜 그래야 하지?”
라이언이 자못 눈가를 가늘게 떴다. 레이먼드는 콧잔등을 잔뜩 구긴 채 머리를 박박 헝클어뜨렸다.
“그쪽은 모르겠지. 나름대로 왕은 왕대로 골치 아픈 게 있다고. 잘못한 게 없어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때가 있어.”
“우리 누님은 그럴 생각이 일절 없던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레이먼드가 금색 사자를 쏘아보았다.
회색 늑대의 추궁에도 라이언은 두루뭉술한 대답만 남겼다.
“내일 아침 신문을 챙겨 봐. 그럼 알 수 있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 * *
다음 날 아침,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가브리엘라 황후와 그의 남동생인 러더퍼드 공작이 자신들과 출신 가문 역시 대대로 수인이라는 것을 밝혀버린 까닭이었다.
화제성이 있다 한들, 일개 귀족의 부군이 수인이라는 것과 한 나라의 국모가 수인이라는 것의 파급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 비교적 조용하던 수도는 물론 제국 전체가 시끄럽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사자 수인도 있었어요?”
“황후 폐하와 러더퍼드 공작이 그렇다잖아요.”
“어쩐지 두 분 모두 남다르시더라니.”
사람들의 반응은 다채로웠다.
그저 두 사람이 수인이라는 점을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
“이건 우리를 농락하신 거요! 자그마치 10여 년을!”
“맞아요!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셨을까.”
“황제 폐하도 속으신 거 아니에요?”
“아그네스 공주 전하는 알고 계셨을까요?”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는 사람들.
“수인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제껏 잘해오셨으면 그만이지.”
“그러게요. 어디 남의 자식 제 새끼처럼 키우는 게 쉬운 줄 아나.”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 말도 못 하시고.”
황후의 업적과 인품을 칭송하며 두둔하는 사람들까지.
“재미있지 않습니까?”
빛 한 줌 스미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이었다. 무언가 툭 앞으로 날아들자 스노우 백작의 금안이 자연스레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어두워도 대략적인 윤곽은 알아챌 수 있었고, 이미 어둠에 눈이 적응한 터라 어렴풋한 글자도 읽을 수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 남자는 음산함이 밴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던진 돌멩이가 이런 파장을 만들어냈어요. 어떻게든 그레이 가문에 흠을 내고 싶었던 모양인데, 뭐, 안타깝게 됐습니다.”
이미 사람들은 프로스트 공작과 그의 부군에 관해서는 관심 너머로 넘겨버린 뒤였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도 있겠으나 처음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할 터였다.
정좌로 앉아 신문을 내려다보던 스노우 백작은 사각형 동공을 철창 밖으로 고정했다. 잘게 난 쇠창살 사이로 매서운 두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흡사 지옥 불처럼 느껴지는 그 안광을 물끄러미 보던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묻겠습니다. 당신, 왜 그렇게까지 그 늑대를 돕는 겁니까?”
“돕는 걸로 보입니까?”
“누가 봐도요.”
“잘못 봤습니다. 이번 일은 내 누님께서 오래도록 심사숙고한 일입니다. 당신이 기회를 마련해준 것뿐이고.”
“황후 폐하께 도움이 됐다면 영광입니다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설마 내가 살면서 사자를 돕는 날이 올 거라곤.”
흐음.
지독히도 까슬하고 감정이라곤 없는 태도였다. 베스칼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시종일관 저런 자세였다.
라이언은 팔짱을 끼며 넌지시 물었다.
“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도망이라뇨?”
“그때 내가 또 보게 될 거라고 분명히 언질을 남겼는데도 당신은 영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서요.”
“영주가 영지에 있는 게 이해가 안 간다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군요, 사자 공작.”
“아내와 딸의 묘 때문입니까?”
한 박자도 쉬지 않고 맞받아치던 스노우 백작의 대응이 고요해졌다. 한참 뒤에야 그는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모리스입니까?”
“당신 부하였던 말과 다람쥐 수인은 진작 붙잡혀 왔습니다. 라나였나요? 그 사슴 수인. 그 친구는 정신적인 문제로 말을 거의 안 한다고 해서 감시만 붙여 놓았습니다.”
“눈앞에서 자기 가족이 몰살당하는 걸 봤는데 정신적으로 멀쩡할 리가요.”
말라붙은 음색에 자못 라이언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들어도 별로 달가운 얘기는 아니었다.
누군가 죽는 얘기는.
“그 아이 하나를 지키려고 부모와 오라비 셋이 희생했습니다. 겨우 표범 한 마리한테요.”
“그런 아이를 당신은 도구로 써먹었죠.”
“본인이 원했습니다. 이 일을 본보기 삼는다면 언젠가 가족을 해친 그 표범도 잡을 수 있지 않겠냐며.”
“당신은 그 아이의 상처를 이용한 겁니다. 정당화하지 마십쇼. 역겨우니까. 어린 소년에게 독을 주고 살인을 사주한 주제에.”
“종용한 적 없습니다. 선택은 오롯이 엘리엇의 몫이었죠.”
“엘리엇이라는 그 아이도 부모와 여동생을 늑대에게 잃었다면서요? 그런 아이가 그레이 백작이 눈앞에 있는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겠습니까? 당신은 그걸 알고 독을 준 겁니다. 내 말 틀려요?”
다소간 얕은 한숨이 들렸다. 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둠을 뚫고 철창 가까이 스노우 백작이 다가왔다.
“……뭡니까.”
“내가 위협적입니까?”
툭 튀어나온 코와 입. 완전히 사각형으로 변한 검은 동공. 구불거리는 회백색 머리칼은 턱밑까지 덮었다.
인간과 양의 중간쯤 되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동물의 입을 하고 그는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당신들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손톱도 없습니다. 동족이었던 내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였죠.”
굽처럼 변한 두 손이 천천히 철창을 붙잡았다.
“보세요. 철창조차 부러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내와 내 아이는 죽었습니다. 왜죠? 수인의 정점에 선 당신은 대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서 하는군요. 그래봤자 소용없습니다. 당신 부하였던 두 사람과 거래 관계였던 그 마법사가 다 얘기했으니까. 당신 자백은 필요 없어졌거든요.”
양의 얼굴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내 그 안에서 우중충한 목소리가 울렸다.
“좋습니다. 어차피 끝난 마당에 나도 부탁 하나 청하죠.”
“부탁이요? 지금 처지를……”
“레이먼드 그레이를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쏘아붙이려던 라이언은 입술을 쓰읍 쓸며 지그시 철창 안에서 희끄무레 빛나는 금안을 응시했다.
“뻔뻔하군요. 응할 것 같습니까?”
“물어보는 건 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날 만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제정신이 아니군.
라이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홱 몸을 돌렸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며 거듭 강조하는 억양 없는 목소리가 꽂혔다.
분명 들어갈 때는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태로 나오려니 뒷덜미가 찝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짓씹던 라이언은 문득 떠오른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쇠창살 속 어둠에 고했다.
“가족들을 잃었을 때, 만약 황실에 도움을 청했다면 황후 폐하께서는 절대로 모른 척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절대로요.”
* * *
설마 내 첫 태교의 읽을거리가 황후 폐하의 신문 기사가 될 줄은.
“그 사자 공작님, 황후 폐하의 동생이셨어요?”
크리스틴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같이 그 고생을 해놓고도 몰랐다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놀라웠다.
“말 안 했나요?”
“그냥 공작님이신 줄 알았죠.”
“난 당연히 아는 줄 알았죠.”
“저희 굉장한 분을 부려 먹었던 거네요. 어떡하죠?”
“불이익은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보다도 시기가 절묘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와 관련된 기사를 덮어주기 위해서 그러신 건가 싶다가도, 이런 큰 희생을 하시면서까지 감싸줄 만큼 돈독한 사이는 아니라는 객관적인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그냥 속된 말로 레이먼드가 ‘까발려진 김에’ 얹어서 밝힌 셈이었다.
대체 왜? 내심 정체를 드러내고 싶으셨나.
뭐가 됐든 우리로서는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같은 길을 걸을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크리스틴. 레이먼드는요?”
“루퍼스 님과 얘기 중이세요. 굉장히 바빠 보이시던데요. 얼핏 듣자니 동족끼리 모이기로 한 것을 취소하신다나. 일단 두고 보시겠대요.”
하긴. 내 기사가 터진 직후 바로 이런 기사를 냈다는 건, 은연중에 ‘황실과 프로스트 공작이 연이 닿아있다.’라는 걸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럼 섣불리 우리를 매도하거나 공격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있자, 크리스틴이 나가고 레이먼드가 얼떨떨한 얼굴로 등장했다. 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잘됐네요.”
“글쎄요.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인데.”
“그건 차차 해결해야죠. 근데 난 이렇게 생각해요. 드러났다고 굳이 인간과 교류할 필요는 없다고.”
그냥 우리는 우리로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전보다 성가신 일은 생기겠지만.
그러나 레이먼드는 조금 생각이 다른 듯했다.
“동족들과 잘 얘기해보려고요.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잖아요. 황실과 연이 있다는 것도 알려진 상태고. 그때처럼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지는 않겠죠.”
“그래도.”
“힘든 길일 거예요. 아직 에블린을 받아들이지 못한 동족도 있는데 인간과의 교류는 오죽하겠어요. 하지만 이대로 영영 숨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난 적어도 내 아이가 인간 아이와 사람 모습으로 함께 뛰놀았으면 하거든요.”
부드러운 손길이 내 배 위로 올라왔다. 그때.
“어.”
나도 모르게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덮어버렸다. 레이먼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래요?”
“움직였어요.”
찰나의 순간이라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 신경을 스치는 듯했다. 그의 황갈색 눈이 커졌다.
“정말요?”
“태동인가 봐요. 신기하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아기 늑대는 잠잠해졌다.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던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레이먼드를 보면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내 아이가 인간 아이와 사람 모습으로 뛰놀 수 있으면.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어린 시절에 내가 멍멍이가 아닌 레이먼드를 만났다면.
그랬다면 좀 더 일찍 행복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돌고 돌아 그의 곁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 길이 너무 험난했다. 결말을 알고 있으니, 나는 똑같은 일을 두 번 겪을 수 있어도 내 아이는 아니었다.
“레이먼드의 말이 맞아요.”
비록 내가 가시밭길을 걸어도 뒤따라오는 내 아이는 꽃길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 같이 걸어요. 그 길.”
얼마든지 지르밟을 수 있었다.
* * *
얼마만의 평화인가.
몇 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그레이 저택의 고요한 오전을 바라보던 루퍼스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몇 개월 만에 제대로 된 풍요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아직 스노우 백작인지 뭔지, 그 작자가 주도한 초식 수인 관련한 사건은 마무리를 맺지 못한 듯했지만 그건 황실에서 해결할 일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쭉 펴며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 그는 오랜만에 일찍 맞이하는 아침에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밖에서 서신을 가져왔다.
이건 마님께 온 프로스트 방계의 안부 편지, 이건 블랙 가문에서 온 거고, 이건 화이트…….
한 장 한 장 넘기며 분류하던 루퍼스는 ‘라이언 러더퍼드’의 이름으로 온 서신을 보고 별안간 뒷덜미가 콱 조여왔다.
그의 이름으로 온 건 뭐든 좋은 소식을 몰고 온 적이 거의 없던 까닭이었다.
일단 받는 이가 레이먼드였으니 레이먼드 앞으로 온 편지에 얹어놓은 그는 제게 밝게 인사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루퍼스 님.”
크리스틴이었다. 아침부터 활기가 넘쳐서는 두 뺨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그거 편지인가요?”
“이쪽이 마님 앞으로 온 안부 편지입니다. 전해드리세요.”
“아침부터 부지런하시네요.”
“원래 전 아침잠이 없어서요. 근데 크리스틴 양은 오늘 유난히 일찍 일어났군요.”
“오늘 본가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동생 결혼식이 곧이라.”
“아. 바쁘겠군요.”
크리스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제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들러리를 서달라고 해서 조금 신경은 쓰이네요.”
“동생분과 사이가 좋은가 보네요.”
“쌍둥이잖아요. 사실 떨어져서 사는 것도 지금이 처음이거든요.”
“섭섭하겠네요. 참, 줄 게 있는데. 혹시 나뭇잎 좋아합니까?”
“나뭇잎이요?”
루퍼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크리스틴은 손바닥 위에 톡 떨어지는 금속성 감각에 의아해졌다.
나뭇잎 모양의 브로치였다.
“예전에 마님께 받은 겁니다. 애인 생기면 주라고 했는데 만들 시간이 나야 말이죠. 마음에 듭니까?”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멍하니 브로치를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럼요! 마음에 들어요.”
“다행입니다. 아, 본가 가기 전에 마님께 오늘 일정 한 번만 말씀드려주세요. 철저하신 분이지만 임신 중이시라 그런지, 요즘 깜빡하실 때가 있더라고요.”
“알겠어요. 오늘 일정이 분명…….”
크리스틴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마자, 루퍼스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어머님 묘 이장입니다.”
* * *
“스노우 백작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레이 가문의 가묘로 향하는 마차가 한 번 약하게 덜컹거렸다.
레이먼드는 내가 휘청이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한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만나고 싶대요.”
“제정신 아닌가 봐요. 뻔뻔하게.”
“진정해요. 화내면 안 좋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요?”
“만나고 싶어요.”
이럴 줄 알았다. 못마땅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가 변명하듯 자기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한 걸음 나아가기로 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동족의 잘못도 인정해야 해요.”
“동족의 잘못이라뇨?”
“에블린은 못 들었나 보네요.”
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스노우 백작이라는 그 사람, 아내와 딸을 늑대 수인에게 잃었대요. 엘리엇처럼.”
모리스가 얘기해줬나 보다.
왜 나한테는 얘기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레이먼드가 물어봤다거나.
말이 좋아 그레이 가문이 본보기였던 거지, 사실 개인적인 복수심이었던 건가.
“그랬군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알았어요.”
“그 사람이 하는 말 묵묵히 듣고만 오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인정할 건 인정하고, 아닌 건 반박하고. 오해는 풀어야죠.”
“믿어요. 근데 난 그 사람을 겪어봤잖아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레이먼드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나도 만만치 않아요. 맨날 에블린한테는 푼수 같은 모습만 보여줘서 그렇지.”
오랜만에 자기 가슴을 팍팍 내리치는 모습이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그렇게 레이먼드의 애교를 보면서 그레이 가문의 묘에 도착했다. 무덤지기의 안내에 따라 엄마가 묻힌 곳을 찾아가니 이전과는 달리 비석에 ‘레베카 멜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엄마 나 왔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이도 가졌고, 처음으로 아버지도 만났고.
근데 비석을 한없이 쓸어내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까스로 내가 아기를 가졌고, 내년 초에 태어난다는 것까지 얘기했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다가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났어요.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웃기지? 왜 그렇게 미워했나 몰라. 다 부질없는 짓이었는데.”
엄마가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슬퍼했을 거다. 누구보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한 장본인이었으니까.
“이제 아버지 곁으로 모실게요. 두 분이 함께 편안히 쉬세요.”
무덤지기에게 보석함을 꺼내 달라고 부탁하자, 금세 꺼내주었다. 저택으로 돌아와 미리 영지의 대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실어 보내자 심장이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가면 좋았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이제는 랜달을 벗어나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워졌다.
난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힘든데 엄마는 혼자서 어떻게 견디고 날 낳았을까.
레이먼드는 다음 날 바로 수도로 올라갔다. 빨리 움직이겠다고 루퍼스와 단둘이서 늑대 모습으로 달려갔으니 못해도 새벽에는 돌아올 터였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가벼운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는 등 정신을 집중할만한 일들을 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배 속의 아기 늑대가 또 한 번 움직였다.
“너도 아빠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부디 아무 일 없기를.
* * *
“우리 죽어?”
황실의 감옥에도 급이 있었다.
빛이 일절 들지 않는 지하 감옥, 손바닥만 한 창문을 통해 그나마 미약한 햇살이 드는 일반 감옥.
멍하니 찬란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던 엘리엇이 툭 물었다. 모리스는 부쩍 퀭해진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올해 열일곱이 된 소년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나치게 무미건조해서 도리어 보는 이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 죽으면 가족들 곁에 묻힐 수나 있을까.”
“죽긴 왜 죽어.”
“난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을까. 초식이라도 다람쥐 말고 코뿔소처럼 강한 수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기왕이면 육식 맹수로 태어나지, 그래. 무서운 것도 없고.”
“그건 싫어. 심심풀이로 사람 죽이는 것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다 그렇지는 않아. 너도 봤잖아. 그레이 백작은 회복하고도 널 내치지 않았어.”
“차라리 프로스트 공작에게 감사하라고 하면 할게. 근데 백작은 아냐.”
더는 모리스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그건 폭력이었다.
“근데 스노우 백작님도 아니야.”
모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완전히 현실을 보는 감각이 흐려지지는 않은 듯해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복수할 수 있다고 하니까 무조건 백작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렸어. 형도 그랬잖아. 라나도 그렇고. 근데 독으로 그레이 백작을 찌르는 순간에 뭔가 깨달았어. 이게 맞는 건가.”
아직도 그때의 통증이 생생했다. 온몸이 불에 타는 듯이 뜨겁고 내부에서부터 녹아내리는 끔찍한 고통.
“내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복수를 완성하면, 과연 가족들이 좋아할까.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어.”
“우린 너무 늦게 깨달은 거야. 방법이 틀렸다는 걸.”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스노우 백작의 처벌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형벌도 결정될 것이었다.
모리스는 씁쓸한 눈빛으로 망연히 내리쬐는 햇빛만 바라보는 엘리엇을 지켜보았다. 자신이야 그렇다고 쳐도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인생이 죗값으로 시작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죄를 저질렀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엘리엇은 단지 이끌어줄 어른을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죄라면 너무 가혹했다.
그때, 별안간 무거운 철문이 묵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앞에는 그들을 이곳에 감금한 병사가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갑주로 무장한 병사는 딱딱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명했다.
“나오시오.”
* * *
지하 감옥은 레이먼드에겐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하게끔 하는 공간이었다.
그때는 설마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붙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도 똑같은 남자와 똑같은 구도로.
“스노우 백작이라고.”
앞서 걷던 라이언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양 수인. 그러고 보니 그쪽과 외모적 특징이 비슷하군.”
“에블린도 그런 소리를 하던데. 우스운 일이지. 아마 그자가 들으면 기함할 거야.”
“글쎄. 그 정도로 감정이 있다면 말이지.”
살벌한 소리였다. 어지간해서는 상대에게 긴장하지 않는 라이언이 하는 소리인지라 더욱 실감 나게 와닿았다.
축축하고 곰팡내 나는 계단을 지나 도착한 곳은 그때처럼 어둡기 짝이 없는 쇠창살 앞이었다.
에블린의 두 고모는 이곳에 며칠 있는 것으로 거의 미쳐버리다시피 되어버렸는데, 멀쩡히 이성을 유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스노우 백작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레이 백작입니까?”
안쪽에서 굴곡이 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다소 수척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었다.
에블린과 라이언의 말마따나 정말 레이먼드 자신과 외모적 특징이 동일했다.
회색 머리. 노란 눈.
레이먼드는 입가를 뒤틀어 올렸다. 무미건조한 남자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천천히 꺾었다.
“당신에게선 피 냄새가 안 나는군요. 다행입니다.”
“보통은 그렇지.”
“내 아내와 딸을 죽인 그자에게선 진동했거든요. 코가 썩을 정도로.”
“……왜 날 보자고 했지?”
“얘기가 빠르군요. 좋습니다.”
“당신을 오래 보고 싶지는 않거든.”
스노우 백작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기이하게도 동요가 없는 얼굴이라 레이먼드는 내심 놀라웠다. 마치 입만 뻐끔대는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부탁 하나만 하죠.”
그는 스윽 앙상한 팔을 내밀었다.
무얼 원하는 건가 레이먼드가 의심의 눈초리를 짓던 찰나.
“날 죽여주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 * *
레이먼드는 확신했다.
이 자는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고.
그건 먼발치서 지켜보는 라이언도 동의하는 듯했다.
아마도 아내와 딸을 죽인 그 늑대를 찾아서 처벌이라도 해달라, 그런 요구를 하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했으리라.
레이먼드도 그렇게 생각했다.
상식선에서 가늠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가 한계였기에.
“내가 잘못 생각했군.”
쓰읍. 신경질적으로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황갈색 눈은 금색으로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당신, 상상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어.”
스노우 백작이 내밀었던 팔을 도로 거둬들였다.
“그럼 내 가족을 해친 그 늑대를 찾아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당신도 그자와 다를 바 없는 늑대인데 뭘 믿고 그런 부탁을 하죠?”
“당신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찾아낼 생각이었어.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잖아?”
한참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적막함을 깬 것은 스노우 백작이었다.
“내 딸이 살아있었다면 당신 아내와 나이가 비슷했을 겁니다.”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또래의 남자를 만나 결혼해 손주를 안겨줬을지도 모르죠. 그래요. 프로스트 공작처럼.”
그의 복수에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 몰랐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딸과 엇비슷한 나이의 에블린이 늑대의 아내로 나타났을 때는, 분명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을 테다.
“그럼 아무 일 없이 잘 살았겠죠. 여느 평범한 사람처럼. 내 영지에서. 나와 내 아내는 자라나는 손주를 보면서 함께 늙었을 테고, 그렇게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듣고만 있어도 심장을 콕콕 찌르는 말이었다. 가지지 못한 자의 가질 뻔했던 것들은.
“난 내 아내와 딸을 위해 저지른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해도요.”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레이먼드가 물었다. 이번에는 그가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대신 사과하지. 몰랐다고 하더라도 동족이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을 지고 사죄하는 게 맞아. 당신 가족을 그렇게 만든 그자는 내 손으로 붙잡아 처단하겠어. 약속해.”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어내는 게 유난히 힘겨웠다. 잔혹한 진실의 무게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한테, 에블린에게 저지른 짓들을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야. 복수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목표를 나로 삼았어야 했어. 아무 연관도 없는 에블린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당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마시죠.”
“그렇다고 당신들보다 명백한 약자를 노려? 그게 당신 가족을 해친 그 늑대와 다른 게 뭔데?”
처음이었다. 밀랍으로 만든 창백한 인형 같던 편평한 얼굴에 처참히 균열이 일어난 것은.
“간절했다는 거 알아. 그렇지만 방법이 잘못됐어. 아내와 딸을 위해 벌인 일이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
힘줄이 튀어나온 두 손이 창살을 붙잡았다. 그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레이먼드는 서느렇고 나직한 기세로 읊조렸다.
“나도 똑같아. 내 아내와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 그러니 당신은 절대로 이 철창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 * *
“나오시오.”
병사의 거듭된 재촉에도 두 사람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별안간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살 겁니까?”
동시에 늑대 냄새가 두 사람의 코를 찔렀다.
루퍼스는 성가시다는 듯이 허리춤에 두 손을 갖다 댄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새 감옥에 정이라도 들었습니까? 왜 요지부동이죠?”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지방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두 사람이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사이 병사가 다가와 단칼에 손을 동여맨 밧줄을 잘라냈다.
루퍼스는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이 답답하다는 양, 성큼성큼 다가가 등을 떠밀어 감옥 밖으로 밀어냈다.
“정말이지, 끝까지 손이 많이 가는군요.”
햇살이 선연한 바깥에 나오자, 그제야 모리스가 설명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루퍼스는 헛기침 두 번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특별사면입니다. 본래 피해자가 요구하면 공범 정도는 처벌 없이 넘어갈 수도 있거든요.”
‘피해자’라는 말에 가닥이 잡혔는지, 엘리엇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레이 백작이 지금 여기 있어?”
“네. 계십니다. 한때 당신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분을 만나고 계시죠.”
심드렁한 비아냥이 잇따랐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보건대, 그레이 백작의 비서라는 저 늑대는 주인이 스노우 백작을 만나는 게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데 왜 우리를 사면해달라고 한 거지?”
“지도자로서의 죄책감이죠. 흔한 경우입니다.”
“죄책감?”
모리스의 반문에 루퍼스는 자못 뚱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직 당신들 모두 마음에 안 듭니다만. 특히 그쪽 다람쥐분은 뭐가 됐든, 우리 동족에 의해 가족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엇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내 그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러나 곧 루퍼스가 취한 어떤 행동에 표정은 얼떨떨함이 섞인 의아함으로 탈바꿈했다.
“대신 머리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있는 말끔한 남자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저희 백작님 뜻이라서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분들을 그렇게 만든 자를 찾아보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난 백작을 죽이려고 했어.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것과는 관계없습니다. 당신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당연한 거잖아요? 잘못을 저지른 동족을 동족이 처단하는 게. 못 믿겠다면 할 수 없지만요.”
루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 엘리엇 대신 모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우리는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건가? 베스칼은?”
“영주가 없어졌으니 혼란스러워졌겠지만…… 그건 추후 황제 폐하께서 다시 얘기해주시겠죠. 일단은 감시가 풀렸을 겁니다. 되돌아가셔도 됩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리스의 얼굴이 온화해졌다.
“뭐라고 할 말도, 백작을 볼 면목도 없군. 고맙다고 전해줘. 프로스트 공작에게도.”
“네. 그리고 앞으로 또 안 좋은 일을 당하거든 얼마든지 도움을 청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든, 러더퍼드 공작님이든.”
수도로 오는 길에 레이먼드가 말했다.
자신의 꿈은 제 아이가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의 아이와 뛰어노는 것이라고.
그 사이에 초식 수인의 아이도 끼어 있으면 두 배로 보기 좋지 않겠냐면서.
끝까지 불신의 눈을 거두지 못한 엘리엇을 보건대, 갈 길이 구만리인 듯했지만.
먼 길을 달려오느라 뻐근해진 뒷덜미를 문지르며, 루퍼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드디어 일을 완전히 끝낸 기분이었다.
* * *
레이먼드와 루퍼스는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
본인 말마따나 내가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는 하나, 그냥 수도에 오래 붙잡혀 있기 싫었던 것 같았다.
황실의 지하 감옥이라면 레이먼드에게 안 좋은 기억밖에 없을 터였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내 배에 귀를 대고 있었던 일을 재잘대기 시작했는데, 스노우 백작의 원수를 갚아주기로 한 점에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노우 백작의 아내와 딸을 해친 늑대를 잡아요?”
“그자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건 우리 종족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예요. 대충 윤곽은 잡았으니까, 추적은 해봐야죠. 워낙 오래된 일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엘리엇의 가족을 죽인 진범까지 잡아주겠다는 말에, 나는 그의 뺨을 양쪽에서 잡고 꾹 눌렀다.
“그런 거 확언하는 거 아니에요. 혹여 못 잡아서 엘리엇이 실망하면 어떡해요.”
“나도 확실치 않다고 언질은 넣었어요. 그러기 이전에 엘리엇인지, 그 다람쥐는 애초에 날 안 믿는 눈치라고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응어리진 분노와 증오가 하루아침에 눈 녹듯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 울분은 오랜 시간 단단히 뭉쳐 딱딱해져 있을 테고, 그건 그 시간만큼 천천히 공을 들여 깎는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부서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볼멘소리에 뺨을 놓아주었더니 그는 다시 내 배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래도 사과는 제대로 전했어요. 모리스는 에블린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라고도 했고요. 떳떳한 아빠 되기 정말 힘드네요.”
“원래 떳떳해지는 건 힘든 거예요. 그리고 모리스에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잘살아야 할 텐데요.”
“잘살 거예요. 황후 폐하도 들여다 봐주시기로 했으니까. 그보다 베스칼 말인데요.”
아. 맞다.
잊고 있던 주인 잃은 영지에 대해 말이 나오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새 영주가 오거나, 그냥 마을처럼 운영되거나 둘 중 하나일 듯해요. 내 생각에는 후자이지만. 워낙 폐쇄적이었던 곳이라면서요.”
그의 말대로였다. 새 영주가 온다고 한들, 스노우 백작이라는 큰 영향을 흩뿌리던 사람이 군림하던 곳이었으니 영지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설령 그자의 진짜 얼굴이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본래 한번 머릿속에 박힌 신념, 사상, 생각은 건 잘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그보다 이제 진짜 다 끝난 거겠죠? 또 사건 같은 거 안 터지겠죠?”
“쉿. 입방정 떨지 말아요. 그냥 평소대로 지내면 돼요.”
내가 검지를 입에 대자 그가 배시시 웃었다.
“참, 마커스의 결혼식 선물 말인데요. 뭐가 좋을까요?”
“그런 건 보통 신부 위주로 들어오죠? 우리도 에블린에게 많이 들어오지 않았나요?”
“그랬죠.”
“그럼 크리스틴에게 물어봐요. 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그렇지, 아가야?
레이먼드가 짓궂은 목소리로 배에 속삭였다.
아기 늑대가 대답이라도 하듯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