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10)
113화. 산서의 진량현
다그닥, 다그닥.
비룡대 일행은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갈 길이 시급하므로 철면개는 말을 달리며 설명을 이었다.
“산적이… 쳐들어왔다구요?”
“그렇소. 오늘 아침 발 빠른 거지 하나가 다 죽어가는 몰골로 이곳 분타에 겨우겨우 도착했더군.”
“…….”
산서성의 진량현.
지난 새벽 그 현내에 있는 개방의 분타가 습격을 당했고, 이에 가까스로 빠져나온 거지 하나가 가장 가까운 분타인 이곳에 지원을 요청하러 왔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산적들이 우르르 산을 내려 와서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구요?”
“그렇다는 것 같소. 그 외에 본방을 습격할 이유가 있는 다른 적은 없으니 말이오.”
공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개방의 분타라면 현내에 있을 것인데, 일개 마을도 아니고 그런 짓을 했다간 무림 이전에 우선 관에서 나서지 않나요?”
“…나 역시 영문을 잘 모르겠소. 여태껏 이런 일은 없었거든. 우리 측 인원들이 뒤를 쫓을 때마다 놈들은 그저 도망치기 바빴지.”
철면개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다급한 마음이 묻어나고 있다.
“다만 이곳까지 달려온 거지놈의 상태가 과히 처참한데다 까무러치기까지 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캐묻지는 못했소.”
“…공교롭네요. 개방의 분타를 쳐서 피해를 입힐 정도면… 그냥 간땡이 부은 동네 산적은 아니겠죠.”
공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있는 일이 하필이면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곳의 바로 옆 분타에서 일어나다니.”
공손수는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허나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틀리지 않은 말이오. 하오문에 적을 둔 비룡대주가 우리 개방, 소림과 접촉했음은 이제 공공연한 이야기가 되었으니. ‘놈들’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
“…….”
“비룡대주께선 당금의 무림에서 놈들을 뒤쫓는 두 세력의 교차점이 되었으니. 어쩌면… 우리를 노린 함정일 가능성도 적지 않소.”
이벽은 생각했다.
놈들이라 함은 즉, 녹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며 또한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을 ‘별개의 세력’일 테다.
‘…혈교.’
문득 이벽은 소림에서 혜공, 그리고 취풍신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놈들의 흔적을 눈치채는 건 우리 개방에게도 쉽지 않았네.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게 본래 강호의 일이 아닌가? 아니, 어쩌면 비단 강호의 일만은 아니기도 하지.
—그렇구려.
—허나… 혈교가 어째서 혈교라 불리는지 아는가? 그 이유는… 놈들이 ‘피’를 탐하기 때문일세.
—…그게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의 뜻일세.
혈마(血魔).
혈교의 정점에 서는 존재.
백여 년 전, 무림사에 홀연히 나타났던 혈마는 ‘타인의 피를 흡수’하여 본인의 힘을 키우는 전대미문의 저주받은 마공을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일찍이 강호무림이 그의 존재를 제대로 눈치채기 전까지, 희생당한 이들의 수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고 했다.
—선대무림이 놈을 공적으로 지정하고 쫓기 시작한 후에는 이미 늦은 후였지. 심지어 놈은 그런 식으로 부풀린 힘을 추종자들에게 나눠주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더군. 그렇게 놈은 놈들이 되었고, 그것이 혈교의 시작이었네.
—…….
그렇기 때문에.
당금의 녹림에서 혈교의 사술을 쓰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건, 혈마의 가르침을 이은 후인이 나타났다는 뜻과 다름없노라 했다.
—녹림이 행인을 습격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말이네. 어쩌면 놈들은 그런 식으로 납치한 가엾은 이들을 제놈의 주군에게 ‘영약’으로 바치고 있었겠지.
이벽은 인상을 찌푸렸다.
녹림과 혈교의 잔당들이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엮여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혈마가 곧 녹림왕일 수도 있으며, 혹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위장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재림한 혈마는 녹림의 껍데기 뒤에 숨어 무럭무럭 힘을 모으고 있으며, 교활하고 신중했다.
과거를 거울삼아 충분한 힘이 모이기 전까지는 전면에 모습을 드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전에 막는다.’
혈교 준동의 증거를 찾아 강호무림에 내보이고 힘을 모아 혈마를 추적, 처단하여 음모를 막는다.
그것이 이벽이 혜공으로부터 받은 부탁이자 스스로 결심한 무림행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증거라.’
대체 무엇을 찾아내어야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직 알기 어려웠다.
“벌써부터 시작인가요.”
하아, 공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혈맹의 이유모를 뒤끝도 채 정리되지 않았는데… 앞뒤로 찜찜하기 짝이 없군요.”
“케헤, 아무렴 어때?”
파진성이 웃음을 흘렸다.
“복잡한 건 나는 잘 모르겠고, 덤비는 족족 때려잡으면 되는 거잖아? 잘 됐어. 안 그래도 요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해졌는데 말야.”
“…퍽이나 든든하네요.”
공손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네요. 솔직히 혈교라고 해도 너무 먼 옛날 얘기라… 대체 무엇과 싸우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그것은 이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벽은 과거 스스로를 녹괴천웅이라 일컬했던 절정의 산적과 그 부하들을 떠올렸다.
놈들은 본보기 몇을 제외한 마을사람들 대부분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었다.
어쩌면… 그들이 정말로 혈교의 끄나풀이 맞았다면, 촌민들은 산 채로 혈마에게 바쳐질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
이벽은 죽은 소년과 몸과 마음을 다친 소녀를 생각했다. 그런 일들이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왔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면.
“걸개.”
그때 다시 공손수가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뭐하지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분타 뿐 아니라 현내 전체가 당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 정도 규모라면 우리만으로는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 또한 맞는 말이오. 허나 너무 걱정은 마시오. 본래부터 이 근방에서 놈들을 추적하고 계시던 본방의 어르신께 전령을 보냈으니, 분명히 함께해주실 것이오.”
“…어르신이라면 어떤?”
“본 방의 장로이신 누명개 장로이시오. 그분이라면 충분한 전력이 되고도 남지. 아마 지금쯤 소식을 듣고 진량현으로 달려오고 계실 테요.”
“아, 누명개라면……!”
“알고 계시오, 소저?”
“물론이죠. 장법으로 이름 높은 개방의 노고수가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절정이 무려 셋이니… 확실히 웬만한 문파 하나는 순식간에 찜쪄먹을 만한 전력이긴 하네요.”
공손수는 조금 긴장되는 듯했다. 허나 이내 표정을 달리했다. 이벽을 바라보며 태연한 듯 웃었다.
“잘해보죠, 협객 오라버니. 여차하면 저는 혼자 튈 자신 있으니 이제 제 걱정은 마시구요.”
“…그래.”
* * *
일행은 한나절을 꼬박 달렸다.
역참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말을 바꾸어 계속 길을 박찼다.
그리고 산서성에 접어든 무렵부터는 말을 버리고 경공을 펼쳤다.
다음날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일행은 마침내 진량현의 목책 앞에 도착했다.
“…….”
목책의 외관은 멀쩡했다.
허나 일행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산적들의 습격이라면… 현내의 민초들 사이에서 무림에 속하는 개방도만을 골라 죽였을 리는 없는 것이다.
즉, 저 너머로 어떤 지옥도가 펼쳐져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케헤.”
부르르, 파진성이 어깨를 떨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군.”
“…….”
그 순간 비룡대 일행들의 머릿속에는 일제히 같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산골 마을에서의 참혹한 광경.
일행은 기척을 죽인 채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목책으로 다가섰다.
이내 내부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캐한 죽음과 피의 냄새가—
‘…안 나는군.’
오히려 냄새는 친숙했다.
그것은 밥 짓는 냄새였다.
뿐만이 아니다. 목책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명백한 인기척이었다.
“내가 들어가 보겠소.”
그때, 철면개가 말했다.
“잠깐, 걸개? 일행은요…? 누명개 장로와 더불어 합류할 부하들이 더 있다고 했잖아요?”
공손수가 다급히 말했다.
“…아무래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소. 허나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기도 뭐하니, 정탐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소?”
“…그렇다면 제가 갈게요. 그런 류의 일이라면 본래 저희 암영각이—”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철면개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세한 사정이야 어쨌건 이것은 우리 개방의 일이거늘 그런 위험한 역할을 어찌 소저에게 맡긴단 말이오?”
“…….”
“비룡대주와 여러분들께는 여기까지 함께 와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있소. 이 거지의 발재간 역시 그리 얄팍하지 않으니 걱정은 마시구려.”
씩, 철면개가 웃었다.
때 묻은 얼굴 위로 씩씩한 주름이 그어졌다. 그리고 철면개가 소리 없이 튀어 올랐다.
날렵하게 날아오른 몸이 간단하게 목책을 뛰어넘었다.
남은 일행은 길 바깥의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굳게 닫힌 목책의 문을 주시했다.
“누구 지친 사람 있어요?”
문득 공손수가 말했다.
“이제 곧 피 터지게 싸우게 될 것 같으니, 운기할 사람은 나중 가서 울고 짜고 보채지 말고 지금 말해요.”
일행은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바삐 달려오느라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는 못했으나, 내력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내력의 소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경공을 거의 펼치지 않고 줄곧 말을 탄 것이다.
“얘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그때, 송영영이 말했다.
턱짓으로 언미희를 가리켰다.
“…소저, 괜찮소?”
이벽이 말했다.
말마따나 언미희의 표정은 창백했다. 허나 그것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줄었고, 수련 중의 움직임은 마치 팔다리에 달라붙은 무언가를 떨쳐내듯 절박해졌다.
“아… 네. 물론이죠.”
언미희가 짐짓 태연하게 답했다.
“…….”
마음의 문제란 결국 타인이 도와줄 수 없는 본인만의 영역이다. 그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팽가 무인들의 피 얼룩이 그녀의 마음에 묻었고, 그 피를 뿌린 것은 자신이다.
이벽은 다시 책임감을 느꼈다.
“빠져. 발목 붙잡히면 짜증 나.”
송영영이 다시 말했다.
과격한 언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뭣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설령 늦었더라도,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야죠.”
언미희가 웃었다.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내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미희는 답이 없는 고민에 빠졌으나, 스스로를 잃지는 않았다.
끼익.
그때, 목책의 문이 열렸다.
일행은 황급히 숨을 죽였다.
몸을 낮춘 채 시선을 집중했다. 인영 하나가 문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휙.
고개가 단번에 일행을 향했다.
일순 일행은 숨을 들이켰으나, 그 호흡은 곧 안도의 한숨으로 새어 나갔다.
“…걸개, 어떻게 된 거예요?”
걸어 나온 사내는 철면개였다.
비장한 모양으로 목책을 넘은 지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문으로 걸어 나온 철면개의 표정은 퍽 복잡미묘했다.
“그게… 일단은 그냥 들어오시면 될 것 같소.”
“…네?”
* * *
“평화롭기 짝이 없네요.”
일행은 진량현을 거닐었다.
초저녁 무렵의 거리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상인들은 소리높여 떨이를 외치고, 애를 업고 안은 아낙네들이 오고 가며 물건을 흥정한다.
사내들은 벌써부터 술판을 벌였다.
밥 냄새와 사람 냄새가 자욱했다.
“어딜 봐도 산적들한테 목숨과 재물을 강탈당한 민초들의 애환 어린 모습은 아닌 것 같죠?”
“…이게 대체.”
철면개가 알딸딸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곳은 무림이 아니다.’
이벽은 생각했다.
진량현의 오늘은 평화로웠다.
무림과 무림 바깥의 경계선은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거리에는 칼이나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우지 않았다.
“걸개, 애당초 그 전령은 도대체 누구였나요? 정말로 이곳에서 온 거지가 맞나요?”
“그는… 분명 이곳 진량현 분타의 거지가 맞았소. 신분을 확인했고… 적들의 습격을 당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덥석.
“이, 이보시오!”
홀로 무언가를 읊조리던 철면개가 불현듯 거리의 상인 한 명을 붙들었다.
“뭐, 뭐요?!”
“호… 혹시 근래에 대규모의 악적들이 이 동네를 습격하거나 위협을 가하지 않았소?!”
“…무슨 헛소리야?”
상인이 철면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탁, 철면개의 손을 쳐내었다.
“에잉, 뭔가 했더니 거지구만? 정신이 좀 이상한 모양인데 장사 방해되니까 절로 가슈~ 훠이! 모처럼 안 보여서 좋다 싶더니만.”
“…….”
일개 상인이 절정고수의 손을 쉽사리 떨쳐내었다. 그만큼 철면개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한동안 일행은 거리를 거닐었다.
허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전투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거리는 오히려 여느 도시보다도 깨끗했다.
“헹, 슬슬 김빠지는데?”
그때, 파진성이 말했다.
“뭐, 별일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잖아? 동네 깔끔해서 보기 좋기만 하구만. 됐고 우리 이제 술이나 마시러 가면 안 될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정말로.”
언미희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내 인파들은 하나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어둠이 내렸다.
“…….”
이벽은 문득 생각했다.
평화로운 곳이다. 허나.
위화감은 천천히 찾아왔다.
“…맞아요. 깨끗하군요.”
그때 공손수가 말했다.
목소리는 가볍지 않았다.
이벽은 공손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음을 확인했다.
“그렇군.”
이벽은 답했다.
위화감의 정체를 이해한다.
“지나치게 깨끗해요. 이 정도 크기의 현인데다 시장바닥인데도 단 한 명의 거지조차 없다는 건…….”
사내, 여인, 노인, 어린아이.
모든 인간군상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마치 거지들만이 거리에서 깨끗이 ‘청소’된 것 같았다.
탓.
철면개가 돌아섰다.
황급히 땅을 박찬다.
“걸개, 잠깐만—?!”
일행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한달음에 걸어온 거리를 되짚은 철면개는 이내 좌판을 정리하고 있던 조금 전의 상인을 발견했다.
덥석.
“이보시오!”
“누, 누구…? 케헥!”
“당신, 아까 모처럼 거지가 안 보여서 좋다고 했었지? 대체 그게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이 거리에서 거지들이 사라졌지?!”
“히, 히익!”
“빨리 말해!”
이벽이 철면개의 팔을 붙들었다.
“걸개, 진정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