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k Heaven examination RAW novel - chapter (161)
166화. 권왕 황보혁
이벽과 취풍신개는 황보세가가 자리한 태안의 시내로 접어들기에 앞서 인근의 마을에 들렀다.
민가가 자리한 곳으로 들어서는 것은 안휘에서 이곳까지 달려오는 내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예까지 왔노라고 기별을 넣기는 해야지. 싸우자고 쳐들어온 건 아니니 말일세.”
쩝, 취풍신개가 입맛을 다셨다.
“모처럼이니 끼니도 해결하고 말이지.”
“그렇구려.”
이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숙과 사냥에는 이미 익숙할 만큼 익숙하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은 물론 나쁠 것 없다.
취풍신개가 앞장섰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마을을 가로지르다가는 여느 객잔 앞에 섰다.
이벽은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허나 몽둥이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금 뭘 하는 건가? 거길 들어가긴 왜 들어가나?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그럼 밥을 어떻게 먹소?”
“잘 보게, 어험어험!”
취풍신개가 헛기침을 했다.
다음 순간 늙은 거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털썩, 객잔의 외벽 앞에 주저앉았다.
바르르, 몸을 떨었다.
“콜록… 콜록콜록!”
헛기침은 기침이 되었다.
삽시간에 병색이 완연해졌다.
이내 객잔 앞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둘 취풍신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에헤이, 뭐야. 재수 없게?”
“동네에서 못 보던 거지들인데? 늙고 어린 게 노인과 손주라도 되나?”
“…….”
행인들의 대화로부터 이벽은 본인 역시 영락없는 거지로 비치고 있음을 깨우쳤다.
그야 사흘 밤낮을 같은 옷으로 달리고 까무러치고 뒹굴었으므로 무리는 아니었다.
뻐억.
그때, 이벽의 무릎이 굽혀졌다.
몽둥이가 오금을 두드린 것이다.
“뭘 그리 멀뚱멀뚱 서 있나? 그러고 있으면 누가 밥을 거저 준다던가?”
“…….”
이벽은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취풍신개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무작정 손을 뻗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나으리들…! 이틀간 물과 입술 각질밖에 먹지 못 했습니다요… 콜록!”
“…뭐요? 노인네야 그렇다 쳐도 이 어린 녀석은 사지 멀쩡해 보이는구만, 왜 빌어먹고 있어?”
“…나는 거지가 아니오.”
“뭐어?”
행인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뻐억, 취풍신개의 동냥 바가지가 이벽의 머리를 두드렸다.
“보, 보시다시피 제 손주 녀석이 머리를 다쳐서…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하는지라… 콜록콜록!”
“…에잉, 쯧! 기구하기는.”
짤그랑, 동전 한 닢이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요, 대인!”
취풍신개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
동냥질이 한동안 이어졌다.
취풍신개의 몰골은 누가 봐도 늙고 병든 거지 그 자체로,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자아냈다.
천하에서 가장 약하기로 줄을 세운다면 능히 열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았다.
급기야는 빗자루를 들고서 씩씩대며 나타난 객잔의 여주인마저 말없이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온갖 것들이 뒤섞인 음식을 들고나와 취풍신개의 동냥 바가지에 부어주었다.
“…줄 테니 딴 데 가서 드슈.”
“가, 감사! 압도적으로 감사합니다요……!”
그리고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여느 인적 드문 뒷골목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헐헐! 좋구만!”
우걱우걱, 취풍신개가 맨손으로 ‘음식’을 게걸스레 집어먹기 시작했다.
“자네도 먹겠나?”
“…사양하겠소.”
“헹, 싫음 말게!”
바가지에 담긴 것은… 이벽이 보기에 ‘아슬아슬하게’ 음식이었다. 그러한 취풍신개를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증이 떠올랐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딱히 중요치는 않은 질문이었으나, 참을 이유도 없었다.
“개방도는 왜 그런 걸 먹소?”
“쩝…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힘과 인원을 지녔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지 않소?”
“…헹!”
취풍신개가 코웃음을 쳤다.
“거 황당한 소릴 다 듣는구만. 거지가 걸식을 안 하면 누가 걸식을 한단 말인가?”
“…….”
“잘 듣게.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그 어떤 빌어먹을 고귀한 몸이라도 단 한 순간에 추락하여 거지가 될 수 있는 게 이 세상의 이치라네.”
취풍신개가 손가락을 빨았다.
“쩝… 험! 허나 우리는 다르지. 우리는 이미 거지라서 더 잃을 것이 없네. 그러니까 혈교 같은 잡것들이 나타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거라네.”
“…그렇구려.”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벽은 이진천을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처음 이진천에게 주워진 이후 화정촌에 이르기까지, 이벽은 ‘약장수 이진천’과 함께 온갖 마을에서 약을 팔았다.
능히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힘을 지녔음에도, 힘에 취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약장수 이진천.
그리고 거지 취풍신개.
삶의 방식은 곧 마음가짐이며, 마음가짐은 무인으로서의 굳건함이다.
지금이라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어때? 멋있지? 자네도 거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
“그래도 그건 아니오.”
“헹! 더러운 사파의 주구 같으니.”
“…….”
저벅, 탓.
그때였다.
한 무리의 인영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이벽은 면면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두가 거지임을 확인했다.
“그래, 동향은 어떻든가?”
취풍신개가 말했다.
태연한 목소리였다.
“…아무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헹, 꽁꽁 틀어박혀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안에서 벼르고 있던가.”
취풍신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거지들을 슥 둘러보았다.
“잘했네. 일들 보게나.”
“…부디 조심하십시오, 방주님.”
꾸벅, 거지들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탓, 그리고 구름처럼 흩어졌다.
“자 그럼 갑세.”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을을 나서서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시내로 향하는 마지막 산을 탔다.
“헹!”
취풍신개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이벽이 새 무복을 사 입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거지가 아니니 말이오. 상대가 누가 됐건 그런 몰골로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두 사람은 산길을 걸었다.
이내 중천에 뜬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며 하늘의 색이 짙어지는 저녁쯤이었다.
피식, 취풍신개가 웃었다.
“그래, 퍽 기대가 되는구먼. 그렇게나 자네를 찾아 헤매던 녀석의 면전에다 자네를 가져다 두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할지—”
“……!”
멈칫.
두 사람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부르르.
이벽의 몸이 떨렸다.
본능이 위험을 알렸다.
한순간, 산 전체가 고요해졌다. 이벽은 침묵했다. 이 산 어딘가에… ‘맹수’가 숨어있다.
이벽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문득, 화정촌 인근의 산속에서 장석두를 구하기 위해 범과 맞섰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의 이벽은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퍼억.
그때, 취풍신개의 뼈 몽둥이가 이벽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이벽의 몸이 휘청였다.
“뭘 그리 쫄고 앉았나?”
씨익, 취풍신개가 웃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미친개가 친히 마중을 나온 모양이군. 그야 놈이 혼자서 슥 담을 넘어버리면 우리 애들이 알아챌 도리가 없지.”
말마따나 ‘기세’는 산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슥, 취풍신개가 턱짓을 했다.
“얼른 가세. 쫄지 말고.”
* * *
“알겠나? 여차하면 바로 뒤돌아서서 튀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말일세.”
취풍신개가 말했다.
그것은 이미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럴 때를 대비해 자네에게 죽어라고 경신공을 파고들게 한 거니까 말일세.”
“…….”
“주제넘게 나를 도와 황보혁을 친다거나, 그런 건방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말란 뜻일세.”
“…걱정 마시오.”
이벽은 답했다.
‘기세’를 느끼고 나서야 실감했다.
상대의 존재가 맹수로 느껴진다는 것은… 결국 힘의 차이가 그 정도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부스럭.
이내 수풀을 헤치고 들어서자 두 사람은 산 중턱의 빈 공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자가 있었다.
물론, 깊은 산 속에 아무것도 없이 홀로 자리한 정자의 모습은 퍽 부자연스러웠다.
짐작건대 나무를 깎아 인위적으로 공터를 만들고 다시 그 나무로 세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자 한가운데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으며, 사내 한 명이 홀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
몸짓은 느슨했다.
허나 기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벽은 실감했다. 저자야말로 ‘맹수’다.
“…황보혁.”
취풍신개가 침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자 위로 올라섰다. 그제서야 사내의 시선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지,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
천하십대고수, 권왕 황보혁.
채 오십조차 되지 않았으나 일신의 재능과 무력으로 당당히 의혈맹주의 자리와 함께 천하십대고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절대고수.
심지어 외관은 청년에 가까웠다.
고작해야 서른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얼굴에는 여유로움, 혹은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늙은 몸을 이끌고 뭐하러 여기까지 왔나? 조만간에 목이라도 따러 찾아가려 했는데 말야.”
“…미친개, 말조심해라.”
털썩, 취풍신개가 마주 앉았다.
투웅, 뼈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네놈 안방이라고 퍽 세게 나오나 본데, 싸우러 온 건 아니다만 나 역시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는 않음을 기억하거라.”
“…….”
우우웅.
공기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벽은 상의 한켠에 앉아 숨을 죽였다. 그저 버티고 있는 것만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툭.
문득 황보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술잔이 취풍신개에게로 날아들었다. 덥석, 받아들자마자 취풍신개는 즉시 들이켰다.
“푸후. 좋구먼. 주제에 싸구려 죽엽청이나 처먹을 것이지 더럽게 비싼 거 처먹고 있네.”
“…….”
취풍신개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옛다, 우선은 네놈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녀석 데리고 왔다. 물론 줄 생각은 없으니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참도록 해라.”
슥, 그제서야 황보혁의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서늘한 눈빛이 위아래를 훑는다.
“……!”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허나 이벽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팽가에서 남궁세가에 이르기까지, 그간 이벽과 비룡대를 끈질기게도 괴롭혔던 그 모든 의혈맹 무인들이 뒤에는 바로 이 자의 뜻이 있었다.
손에 묻힌 피도.
언미희의 무너진 마음도.
이벽은 맹수를 마주했다.
“잘 모르겠군.”
허나 다음 순간, 황보혁의 시선이 이벽을 먼저 피해버렸다. 쪼르르, 그리고 다시 술잔을 채운다.
“…장난치나? 그 많은 따까리들을 동원해서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개지랄을 쳐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취풍신개가 말했다.
“그야 찾고 있는 녀석이라면 있다. 허나 내가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얼굴을 본다고 어찌 아나?”
황보혁이 답했다.
틀리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이벽이 뭐라 꺼낼 말을 떠올리던 때였다.
“하여 알 만한 이를 불렀다.”
탓.
“험, 어험!”
황보혁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저만치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벽과 취풍신개의 고개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리고.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저만치 나무 사이로 노인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와 수염 모두 하얗게 셌으나, 꼿꼿한 허리와 걸음걸이에서는 노쇠의 흔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
취풍신개의 눈이 흔들렸다.
휙, 그 즉시 황보혁을 향했다.
“미친개, 이 개새끼…! 더럽고 치사한 새끼… 야 이 양심도 없는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정파의 한 축을 이끄는 수장이냐?!”
“…….”
황보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자 위로 올라선 노인이 마침내 빈 자리에 앉았다. 이로써 술상을 중심으로 네 방향에 네 사람이 한 명씩 앉게 되었다.
“험! 걸개, 오랜만이구려.”
노인이 취풍신개를 향해 웃었다.
“오랜만은 지랄! 당평세, 네놈도 씨발… 너보다 한참 어린 새끼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오냐? 하여간 남궁이고 당가고… 늬들은 이제 자존심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냐? 앙?!”
“…허헛.”
백발의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쓸었다. 허나 취풍신개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독왕 당평세.
당가의 전대 가주이자… 독공의 고수로서는 유일하게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타앙.
취풍신개가 상을 쳤다.
“나는 가겠네! 씨발, 내가 미쳤지. 도의도 뭣도 없는 잡놈의 새끼들이랑 무슨 천하 얘기를 하겠다고! 비룡대주, 얼른 일어나세!”
취풍신개가 눈짓했다.
“……!”
훅.
그 즉시 이벽이 일어섰다.
정자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헛! 어딜 가시는가 소협?”
허나… 이벽이 돌아선 순간, 반대편에 앉아있던 당평세가 어느새 이벽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계산에 없었던 또 한 명의 천하십대고수. 이벽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만.”
그리고 황보혁이 말했다.
“앉아라. 화난 척하면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소용없다, 거지.”
“…쳇.”
취풍신개가 혀를 찼다.
허나 이벽이 봉쇄된 이상, 다시 앉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네 사람은 다시 둘러앉았다.
그리고 침묵이 일었다.
그것은 천하십대고수 세 명의 존재감에 해당하는 무거운 침묵이었다.
“걸개, 오해는 말게. 그야 맹주께서 날 찾으신다기에 온 것은 맞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내 뜻이었으니 말일세.”
침묵을 깬 것은 당평세였다.
“헹, 늙은이 정신 승리하고는. 보아하니 된통 깨졌나 본데 차라리 쪽팔린 거 알고 은거해버린 검왕이 백 배는 낫다 이 불쌍한 새끼야.”
“…….”
당평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나 다음 순간, 시선이 이벽을 향했다. 촌로와 같은 소탈한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신가, 소협?”
“…안녕하시오.”
당평세의 눈이 이벽을 훑었다.
이벽의 위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의 눈이 문득 작게 흔들렸다.
“……?”
이벽은 위화감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일면식은 없다.
당가라면… 나름대로의 인연은 있으나 그와는 별개로 독왕과 안면을 튼 기억 따윈 물론 없었다.
허나.
상대의 눈빛은 달랐다.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
무엇보다… 조금 전 당평세가 나타나기 이전에, 황보혁은 이벽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을 불렀노라고 말했다.
“맹주, 맞는 것 같소. 아니… 틀림없소.”
“그렇군.”
이내 당평세가 말하자 황보혁이 답했다.
“사패련 비룡대주 이벽이라.”
핫, 그리고 황보혁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처음으로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너, 내가 누군지 아나?”
“…의혈맹주 황보혁이오.”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허나 답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 나는 의혈맹주이며, 천하 무림세가의 핏줄을 아우르는 이다. 걔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어 쓸 수 있는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지.”
“…….”
황보혁이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헌데 말이다. 옥인지 돌인지 아직 분별조차 이뤄지지 않았거늘 제멋대로 내 안뜰에서 빠져나간 녀석이 하나 있다더군.”
탁, 그리고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벽을 향한 권태로운 눈빛 사이로 문득 열기가 번뜩였다.
“알겠나, 선우벽? 너는 내 거다.”